신약/히브리서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히 13:1-17)

nam씨 2021. 6. 12. 20:01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히 13:1-17)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1-17)

히브리서의 결론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유대교의 압박과 로마의 핍박으로 인해 자칫 신앙공동체가 분열되는 위험과 분쟁과 반목질시로 인해 사랑이 식어지거나 결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적 상황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성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혼인의 순결성을 무시하고 성적 쾌락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박해로 인해 궁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돈을 사랑하는 풍조마저 만연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랑의 회복,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져 냉랭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희생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안이 아니라 성문 밖, 즉 영문 밖 광야 같은 골고다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영문 밖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을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온 인류 구원을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어 영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온 인류를 사랑으로 섬겨 구원하고자 십자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도 마땅히 영문 밖으로 나아가 우리의 고난받는 이웃들을 위해 사랑으로 섬기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으셨다(12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모으는 일뿐만 아니라 고난받는 이웃들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앉아서 교회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임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야만 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살든지 유대인들은 구원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을 찾아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능욕을 지고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더 이상 선교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으러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받는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찾아 가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길 잃어버린 양들이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선교요 사랑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와 사랑으로 섬기는 일은 안락하고 화려한 성안의 장벽과 문을 뚫고 세상을 위해, 세상을 향해 "그가 당하신 능욕" 곧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알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며" "장막 즉 천막에 거하였던" 것(히11:9)처럼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는 신앙공동체의 의미를 찾아 교회 건축과 성장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고립된 요새나 성곽이 아니라 잠정적 거주지요, 광야의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부 교회에서 마치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성전을 짓듯이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그 일에 엄청난 건축비용을 들이는 것이나, 교회 성장을 마치 어떤 세도가나 재벌가를 구축하듯이 목적삼는 것은 교회의 참모습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어디까지나 '성문 밖,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신 예수께 나아가는' 모습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살며 이웃을 위해 능욕을 지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찬미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는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성전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죄와 악의 세계, 고난과 불의의 이 세계는 영원한 도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다만 영원한 도성, 하나님 나라를 행해 가는 성도와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겨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임시 거처에 불과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나그네처럼 살며 나그네 인생을 깨우쳐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도성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 밖에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총을 개인적 소유로서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이웃들에게 증거하여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에 참된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되어질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세계 제2차대전 중 영국의 탄광노조가 스트라이크를 결의했습니다. 이것은 국 가 비상시에 큰 타격을 줄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가장 큰 강당이었던 팔라디엄에 수천 명의 탄광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에 윈스톤 처칠 수상이 자진 출두하여 연설하였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치는 머지 않아 패배하고 런던거리에서는 전승 축하행렬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공군에서 봉사한 사람들은 우리는 격추될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이고 해군에서 나라를 섬긴 사람들은 우리는 잠수함의 위협을 무릅쓰고 험한 파도와 잠수함의 위험 속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이며, 보병으로 일선에 섰던 사람들은 우리는 총알받이가 되어 적의 탱크 앞에서 싸웠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자랑을 할 사람들은 여러분 탄광노동자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하기를 우리는 가장 깊은 지구의 뱃속에 들어가 석탄을 캠으로써 비행기를 날게 하고 군함을 움직이게 하고 탱크를 전진시켰다고 가슴 펴고 말할 것입니다." 드러나는 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숨은 자리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일도 안 하고 돈도 안 내는 태도는 좁은 생각은 오늘날 우리 나라 정치인들과 같은 행태로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정말 훌륭한 사람들은 눈에 안 띄는 구석에서 말없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나 비판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교회도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의 주요 광고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광고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널리 드러내 광고하라는 사명이 아니라 낮고 숨은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일에 충성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과 성장도 역시 경쟁의 내용이 아니라 십자가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마13:31-33)는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즉 겨자씨는 작지만 큰 나무가 된다는 것과 누룩도 적은 분량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물질주의가 사람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많고 큰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알아 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좀 더 큰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교회도 부담스러운 작은 교회보다 여러 가지 이점이 많을 것 같은 대형교회를 찾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물량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가난해지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남보다 높아지거나 크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마17:20) 이는 믿음은 분량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질로 결정됨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크기나 물량으로 신앙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는 또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10:42) 소자는 어린아이로 해석 할 수도 있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작은 사랑도 순수할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0)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조용한 성장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루 서 말속에 넣은 한 줌의 누룩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소리 없이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교회도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자기를 선전하고 나팔을 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말없이 섬기고 사랑할 때 이웃과 사회는 복음화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씨가 자라나는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마가복음 4:26-29) 씨가 흙 속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오르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지만 모든 과정은 자고 깨는 사이에 조용하고 신비하게 성장합니다.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조용히 자라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고요한 밤중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권세와 능력과 각종 은사 등을 떠벌리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조용하게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초라한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을 위하여 조용히 바쳐질 때 5천 명이 먹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요6:5-13) 누룩의 비유에서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었다."는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누룩은 가루 속에 묻혀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기름처럼 우리끼리만 몰려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묻히고 섞여 누룩과 소금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작은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고 작은 시간을 하나님께 봉사하는 작은 누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겨자씨 믿음, 겨자씨 사랑이 산을 옮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내가 은밀하게 짊어졌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계산하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해 쌓아올린 것들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소리 없이 내준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자신이 세상에서 누린 기쁨은 전혀 기록되지 않고 이웃들을 위해 사랑으로 섬기면서 소리없이 흘린 눈물방울들이 계산되어 있습니다. 희생만큼 강한 무기는 없습니다. 희생을 보이는 것만큼 값진 교육은 없습니다. 별로 희생다운 희생을 해보지 않고 죽는 사람은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무가치의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우울하고 슬프고 외로운 것은 남을 위해 희생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을 해보면 그 다음 순간부터 기쁨이 샘솟고 모든 인간이 내 친구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 말씀은 진짜 진리입니다. 받으려고 기대하는 한 결코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희생적 사랑은 나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은총입니다. 희생적인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고 이기적 인간은 반드시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셨지만 그 길이 온 인류와 함께 하시는 길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가실 때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셨고, 들내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가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들내지 아니하며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