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 유1;1-25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 유1;1-25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형제라는 신분으로 이 편지를 썼다. 여기 언급된 야고보는 신약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명의 야고보 중에서 일반적으로 주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교회의 장로였던 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다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한 것은 당시 야고보는 모든 성도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보다는 야고보의 형제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쓸 때 성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보다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적 성격을 띤 편지에서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냐는 것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편지는 수신자들에게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보내는 공적 편지에서 편지를 쓴 사람은 처음 인사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일을 잊지 않았다.
유다는 수신자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호칭을 부여했다. 그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로 불렀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부를 때 사용 된 호칭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 성도들에 대하여 부르는 세 가지 호칭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는 호칭이다. 즉 이 호칭들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이 은혜를 끝까지 지킬 수 없다는 은혜의 사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이 선재(先在)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일생동안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기원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기도할 때마다 “나라가 임하오시며(마6:10)”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은혜로 다스림을 받는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구하는 의미도 된다.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 평강, 사랑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을 상징한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하며 문안 하였다.
1:3,4.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문은 이 편지를 쓴 목적을 말하고 있다. 유다는 처음에는 성도들에게 “구원에 관하여” 쓰고자 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약의 여러 서신 가운데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해 주고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도록 쓴 편지들이 많이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초기에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에 이와 같은 편지들을 쓴 것은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모든 교회들에게 보편화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오순절 이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곳곳에 교회들이 세워졌지만 영적 지도자들이 부족하여 이 교회들 가운데 복음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한 교회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교회들을 방문하여 복음의 진리를 세워주고자 했고 또한 환경으로 인하여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에는 편지로서 방문을 대신했다. 유다도 이와 같은 영적 부담을 가지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목적의 편지를 쓸 즈음에 각 교회로부터 이단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쓰려고 했던 것을 쓰지 못하고 했고 이단에 대한 경고의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는 이단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1:4)” 이단은 “가만히 들어온 자”이고,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 자”이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이다.
여기 “가만히 들어온 자”란 이단의 한 특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성도들을 접근하는 자를 말한다(고후11:14,15).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 가르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도록 하는 자를 말한다. 실제로 당시 이단들 가운데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 하도록 함으로 방종한 생활에 빠지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도덕 폐기론 자들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단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언제나 구원의 길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이단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고 또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로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예정 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유다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이단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그 심각성을 알고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긴급히 이 편지를 쓴 것이다.
1:5-7. “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는 세 가지 실례를 들므로 성도들에게 이단을 경계하도록 했다.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1:5)” 이 말은 유다가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였다. 여기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항상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는 영적 원리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항상 생각하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배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이미 배운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요14:26).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마땅히 행할 일을 알지 못하여 방황할 때 이미 배운 말씀들 가운데 그 시간 그곳에서 적용할 수 있는 합당한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본문에서 유다가 성도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해 준 것은 이런 일을 성령님만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 영적 지도자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세 가지 일이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셨지만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불신한 자들은 멸하셨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를 심판하셨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부패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실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해 주는 것은 의(義)의 길을 떠나 패역의 길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에서 떠나 이단의 길로 행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이단을 허용하는 것은 성도들을 믿음에서 떠나 멸망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1:8-13.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여기 “꿈꾸는 이 사람들”이란 이단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이 말씀은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스스로 부패해 진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 “육체를 더럽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4)”에 해당하는 말로서 성적 부패를 의미한다.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본문이 주는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부정할 때 이단과 부패함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사람에게 권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는 중요하기 때문에 유다는 다시 한 번 천사장 미가엘의 예를 들어 우리로 하여금 권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말해 주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1:9,10)”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었다. 우리는 어떤 문제로 인하여 다투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마귀는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기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천사장 미가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을 말하며 그가 하나님께 속한자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유다는 천사장이 이 사건에서 보여준 태도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런 판단은 마귀에게 속한 것도 천사장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들은 이와 같은 사실에 무지하여 자신들이 말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유다는 그들을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고 했다. 그들의 범죄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정욕이 이끄는 대로 행했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유다는 그들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1)”라고 말했다. 여기 가인은 자신의 불의로 인하여 의로운 동생 아벨을 죽인 자이므로 의를 미워하는 자들의 상징이 되고, 발람은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불의한 일을 행한 자이므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의 대표가 된다. 그리고 고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거역했던 자로서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의 표상이다. 따라서 이단들은 가인과 발람 그리고 고라의 길을 따름으로 배교의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들로서 멸망 받을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에서 애찬의 암초”가 되고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일 뿐이며 또한 자신들에 대해서도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과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 같을 뿐이며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배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과 같을 뿐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단에 대한 수사적 표현으로서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이들은 어떤 경우도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 “암초”란 항해하는 배를 좌초시키는 위험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단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좌시키는 암초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의 이단적이며 배교적인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에 빠져 배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멸망에 빠지게 하는 가장 불행한 일이다.
1:14-16.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4절은 일반적으로 외경 에녹서1:9절의 인용으로 보고 있다. “볼지어다 그는 십만의 성도와 더불어 악한 자들을 멸망시키고…불경건한 모든 일에 대하여 싸우시기 위하여 오시리라” 본문의 여러 묘사들은 주님께서 심판자로 위엄을 가지고 세상에 오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묘사들은 심판의 대상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다.
1:17-23.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는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이단으로부터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지킬 수 있는 길을 말해 주었다.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도들의 교훈에 착념하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권고했다. 여기 사도들이 한 말이란 마지막 때에 이단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이단에 대하여 경계할 것을 권고한 말이다. 또한 유다는 성도들에게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라고 권고했다. 여기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는 것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라는 의미다. 유다가 권고한 세 가지 권고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는 일” “성령으로 기도하는 일” 그리고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 등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내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행하여야할 또 다른 일은 교회 안에 있는 연약한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1:22,23)”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함으로 교회 안에 이단이 들어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지만 동시에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한 영적 생활은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섰을 때 오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영적으로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은 그 자체가 공동체의 영성을 든든하게 해 주는 것이 되어 교회에 속한 성도들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
1: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송영으로 이 편지의 끝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은 송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로,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으로 알았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라는 찬송을 부르게 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영광스런 찬송을 부르기 원한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깊이 아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만큼 그를 찬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