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립보서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 렘 14:7~9, 빌2:12-16

nam씨 2020. 10. 3. 13:15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 렘 14:7~9, 2:12-16

 

일본의 학자 다카바다(高機)씨는 기독교로 귀의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런 중에 결핵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그는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떠날 시간이 임박해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하나님께로 가네.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부끄러움 없이 간다네.”성도가 신앙생활 하다가 때로 낙심하기도 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불신앙, 불순종으로 신앙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심판에 두려움을 알고 주님 앞에 죄를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고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며 합리화하며 고집을 피우고 완악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세상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단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시편 기자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날 때에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천만인이 나를 치려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로다.’ 라고 고백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느냐,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느냐,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로다.’라고 사도 바울처럼 당당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만유를 섭리하시고, 심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14:9“^^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범죄 한 선민이 회개할 것을 외치는 예레미야의 경고도 듣지 않자 결국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망각한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끝내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 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 날짐승에게는 날짐승의 길, 육축에게는 육축의 길,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 성도에게는 성도의 길이 있습니다. 성도의 길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항상 아는 기본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삶은 유익이 없고, 그 길의 결국은 파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경고 하실 때 두려움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될 때, 용서가 따르고, 회복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받고도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회개하고 돌이킬 줄 모르고 계속 불신앙,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결국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간, 사울 왕, 발람 선지자, 여로보암, 가롯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길로 가다가 경고를 받고 회개하고 돌이킨 자들에게는 회복의 은혜가 임하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다윗, 히스기야 왕, 요나, 베드로, 바울 같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성도가 징계로 오는 고난이 올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바로 깨닫고 회개하여 회복의 은혜를 받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 낭비, 시간 낭비, 마음과 영혼에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죽어도 주님 앞에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차량을 안내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간암으로 배가 9개월 된 임신부와 같았습니다. 움직이기도 힘들고, 배가 너무 나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차량안내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그 봉사를 계속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수록 정말 애통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단도, 박해자도, 권세자도, 가난도, 질병도, 죽음도 아닙니다. 육과 영을 함께 멸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지만,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자라면 인생의 성공자요, 실상은 부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극적으로 주님을 만난 이후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 하다가 숫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충성했던 그가 가진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남은 구원 얻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더 말할 것이 없이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 경성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문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에 대한 말씀을 보면

*하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2:8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었나니 란 말씀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뜻으로 구원 문제가 과거형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기에,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약속에 의한 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입니다. 딤후 4: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구원이란 낱말은 우리의 완성된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책임지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 구원을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말씀은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아직도 소망 중에 있는 미래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와의 사이에는 도달 과정을 거쳐야 하고, 시간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서울역에서 부산행 열차를 탔습니다. 차표도 끊고, 열차 안에 자기 좌석에 앉아 가고 있습니다. 그가 부산역에 도착하기 전에 갑작스런 사건으로, 변심이 생겨 도중에 하차 할 수도 있고, 미혹하는 자의 말에 홀려 도중에 내려 다른 열차로 갈아 탈 가능성도 있고, 가다가 표를 분실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열차에 탑승을 하고 천국 역에 이르는 동안 그 과정에서 시험 역도 있고, 환난 역도 있으며, 유혹 역도 있습니다. 이 같은 역은 아직 우리가 지나가 보지 못한 역들입니다. 이 역들을 무사히 잘 통과하기 위해서 정신 차려야 할 모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운동장에서 다름 질 하는 일로 비유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의 과정을 잘 지나가기 위해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가 되어야 모든 역경과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 무사히 하늘 본향 역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앙생활 하면서 수시로 내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내가 은혜 받고 구원 받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 영광 위해 살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내 신앙이 변질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건강 진단을 하듯이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그 당시 독일 교회를 바라보면서 독일 교회가 왜 그렇게 무기력해 졌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따르는 대가를 치르기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는 데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이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신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했다.

 

그러나 이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을 강조할 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는 값비싼 대가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우리 주님처럼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심장이 고동이 멈추고, 내 몸의 더운 피가 식는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17:4절 참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그 모든 대가를 기쁨으로 지불할 결의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천성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이러한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하는 두려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구원과 관련하여 같이 사용하는 세 가지 용어가 있습니다. ‘중생성화영화라는 용어입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죽었던 영이 거듭나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성화는 살아가는 동안 거듭난 영이 점점 거룩해져 가는 것을 말하며, 영화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 완성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화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에 해당하는 카텔가조마이(κατεργαζομαι; work out)'행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는 뜻에서 온 명령형의 용어로, 다르게 표현 하면 성화 사역을 수행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성장 하여 20, 3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2-3 개월 된 갓난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우유병을 들고 다닌다면 부모나 가족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주 예수를 믿어 영적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도 처음 예수를 믿던 그 수준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성도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지도자에게, 주님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15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여’,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빛들로 나타나며등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순도가 높은 금이나, 은처럼 나무랄 것이 없고, 얼룩이나 오점 티가 없는 순수하고 신실한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이러한 장성한 믿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라는 요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행하므로 하나 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를 온전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화합하여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세워 나가기 위해 한 마음, 곧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그 모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형체로 오신 겸손하신 예수님의 비하를 제시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 문제 해결 방안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두가 낮아져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개개인이 성화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성화 사역 곧 죄를 회개하고 죄 성을 복종시키고 주님을 본받아 닮아 가고 말씀을 인격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약 본문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 해 계셔서 무엇인가를 행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행하다’(operating) 는 헬라어로 에네르곤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힘을 공급하셔서 어떤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본래 우리 몸은 쉬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을 위해 몸을 쓰게 하고, 시간과 재능을 쓰게 하고, 물질을 쓰게 하는 것이 에네르곤입니다. 게다가 나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그러한 일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에네르곤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공급됨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밝히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며, 약한 지체들을 보살피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며, 물질로 구제 하게 하며, 세상에 나가 싸워 승리하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내게 주신 주님 은혜를 깨닫고 더욱 사모하여 주님 영광 위해 살기를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 주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 부호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출석하는 교회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를 보기 위해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록펠러는 항상 예배 시작 40분 전에 와서 맨 앞에 앉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만 보았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회장님, 왜 그렇게 일찍 교회에 오십니까?” “그것은 예배의 앞자리를 놓칠까 봐서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예배의 앞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행위나, 남을 위해, 민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는 행위나, 봉사와 헌신을 통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행위는 자신의 신앙 성장은 물론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우리가 결단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일하시며 약속하신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므로 존귀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에게 필요한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주님 앞에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