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

노래하고 기뻐하라/슥2:10-13

nam씨 2020. 6. 27. 10:29

노래하고 기뻐하라/2:10-13

 

오늘 본문말씀은 좌절과 절망가운데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를 잃고 낯선 이국 땅에 흩어진지 70년 만에 돌아왔지만 고국은 그동안 꿈꾸며 그리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져 흉직하게 폐허되어 있었고, 성전은 불타버리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잡초와 가시덤불이 뒤덮고 짐승의 거처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성전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재건에 함께 참예할 것을 요청하다 거절당한 사마리아 인들의 방해로 거의 14년 간 중단되었습니다.(4:1-24)

그 후 다리오가 바사 왕위에 올라 고래스 왕의 조서를 승인함으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방해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재건의 꿈을 포기하고 큰 실망과 좌절가운데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은 삭막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도 어려울 판국에 어떻게 흐트러진 민심과 분열된 국론을 하나되게 하고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건설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암담할 뿐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러한 자리에서 머리를 들어 희망의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천사가 전하여 주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희망의 환상을 보고 스가랴는 절망과 좌절가운데 빠져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신뢰는 불신으로 희망은 절망으로 감동은 원망으로 바꾸면서 사회가 더욱더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소망의 환상을 보고 소망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처럼 노래하고 기뻐하라 외치며 소망의 메시지를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스가랴 선지자가 절망과 좌절가운데서 어떠한 환상을 보았기에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외치는 것입니까?

 

1. 척량 줄 가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본문1절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라고 합니다.

척량 줄을 잡은 사람의 환상의 보았습니다. 척량 줄 잡은 자에게 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장과광을 보고자 한다고 대답합니다.

스가랴에게 말하던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 천사를 맞으며 이르기를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청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하는 환상과 메시지를 보고 들었습니다.

척량 줄 잡은 자의 환상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척량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됩니까?

첫째. 땅을 찾기 위해 척량합니다.

둘째. 건축을 하기 위해 척량합니다. 건축을 하기 전에 땅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은 건축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경우의 척량은 건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스가랴가 예루살렘을 척량하러 가는 환상을 본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빼앗겼던 예루살렘을 다시 찾아 하나님의 성전과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지로 스가랴는 자기에게 먼저 말하던 천사에게 다른 천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폐허된 예루살렘에 사람이 많아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되고 하나님이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영광이 되리라고 하는 메시지를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70년 때가 되면 돌아오리라고 하신 대로 이스라엘에게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리라고 언약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때에 절망과 좌절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서 척량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좌절하기도 하고 실망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약속과 언약을 결코 포기하거나 변개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나라에 두신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방초교회에 두신 소원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때가 비록 더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가운데 있는 자가 있습니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하나님이 보이시는 희망의 환상을 보시고 노래하고 기뻐하는 삶이 있기 원합니다.

 

 

2. 북방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 중에서 내가 너희를 바람과 같이 흩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북방 땅에서 도망하여 시온으로 피하라 어서 빠져나오라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천사를 통하여 들었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죄악의 세상에서 떠나라고 하는 것이며, 악한 세상의 영화를 벗어버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말은 세상중심에서 교회중심의 삶을 지향하라고 하는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도망하라 피하라(2:6-7)고 하는 것은 지금 절망과 좌절의 상태에서 탈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벨론과 같은 세상영화와 죄악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소망 없는 삶에서 소망있는 삶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어느 늙은 어미 오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놀던 연못에 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고 물이 바싹 말라 땅이 갈라졌습니다. 헤엄칠 물도 작아 먹을 물고기도 없습니다. 그래도 늙은 어미오리는 그 새끼들에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미오리는 그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곳 생활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도 다른 곳을 찾을 생각도 아니합니다. 그러나 새끼들은 다른 연못 제방으로부터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새끼오리는 그 물소리를 따라갔습니다. 더 크고 넓은 연못을 발견했습니다. 땅주인이 위에다가 다시 연못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새끼들이 어미 오리에게 왔을 때에 어미오리는 묵독한 부리로 딱딱한 땅을 헤치며 먹기를 찾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새끼 오리는 말했습니다.

어머니 세상이 바뀐 것 모르세요? 주인이 저 위에다 연못을 만들어 놓았어요. 헤엄을 치며 자유롭게 살려면 이곳에서는 안돼요. 이곳을 떠나 주인이 만들어 놓은 연못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어머니가 부리를 피가 나도록 마른 땅 뒤집고 파도 이곳은 연못이 될 수 없어요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학대와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곳에서 400여 년 간 살아가다 보니 그곳생활에 익숙해져서 약속의 땅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고통을 부르짖으면서도 그곳을 떠나 생각이나 탈출할 계획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도 이방나라에 70여 년 동안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사명과 책임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언약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니 현실에 길들어져서 살아가는 늙은 어미 오리같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축복의 연못에서 흘러내리는 축복과 복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습관화된 삶과 길들여진 삶이 우리의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축복의 연못에서 흘러내리는 신선한 물소리와 같은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하고, 뭉뚝한 부리로 마른땅을 뒤지는 어리석은 오리와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모두 머리를 들어 하늘의 신령한 연못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소리를 듣고 희망 없는 마른 땅을 뒤집고 사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창일한 언약의 연못으로 나아가 찬양하고 기뻐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3. 여호와께서 임하여 너희가운데 거하리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여 너희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Advent)이란 오심,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뜻하며 한때 성탄절에만 국한하여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는 주님의 탄생을 미리 기대하며 자신을 가다듬고 준비하는 절기로 성탄절 전 넷째 주일을 포함한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지칭합니다.

대강절의 또 다른 이름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해서 대림절 혹은 강림절이라고도 합니다. 대강절은 대강절 첫째주, 대강절 둘째주, 대강절 셋째주, 대강절 넷째주로 나뉘어 불리우고 있으며, 예전색깔은 보라색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내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이 기간에는 강대상에 촛불을 밝히고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대강절 첫째주일에는 한 개, 둘째 주일에는 두 개, 셋째주일에는 세 개, 넷째 주일에는 네 개의 촛불을 켜놓고 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심을 뜻하며, 죄악으로 어두워진 밤을 밝히고 희망이 없는 절망의 어두움을 쫓아내고 희망의 빛을 주시기 위해 오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은 대강절에 반드시 묵상하고 지나가야 할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어둠의 죄악의 밤에 절망의 밤에 고통 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친히 강림하시어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는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강림은 그리스도인의 축제만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생명과 소망을 주는 우주적 축제입니다. 폐허된 성전을 건축하고 국가를 재건하려다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사방에 흩어져 삶의 구심점을 상실하고 유린하는 유대인들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은 유다를 취하여 자기 소유로 삼고 예루살렘을 택하시고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그 앞에서 잠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2-13)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어두움과 절망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뻐하라 찬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맞이하여 어두운 현실에서 머리를 들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여 함께 하시리라고 하시는 희망찬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평강과 소망과 생명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동시에 심판 주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신앙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기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