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 솟아나는 믿음 (요한복음 4장7-14)
□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 (요한복음 4장7-14)
우리의 믿음 생활을 두 가지 큰 형태로 구분해 보게 됩니다.
하나는 물을 길러 오는 형태의 신앙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서 솟아나는 형태의 신앙생활입니다.
물을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항상 다시 갈증을 느끼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신앙생활은 항상 구원의 감격 속에서 충만한 생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에서 물을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피곤할 뿐입니다.
1. 수가성의 여인은 타성화 된 모든 신앙생활인의 모형입니다.
성서적 배경을 보면, 특히 유대인에게 우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을 짓기 전에 우물부터 파야 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생명 줄과 같았습니다.
구약을 보면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물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갈라서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여러 번 우물을 양보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수가성의 우물도 야곱이 판 우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여인은 남들과 어울릴 수 없는 여자이었습니다.
본시 우물가란 모든 동네의 여인들이 만나서 이런 저런 소문을 듣게되는 곳입니다. 결혼을 5번씩 한 이 여인은 항상 동네 사람들로부터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하고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던 이 날도 남의 시선을 피하여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어쩌면 그의 영혼 깊이 갈망하는 무엇이 컸던 여자였습니다.
주님과의 몇 마디 대화 중에 벌써 이 여자는 주님을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질문이 예배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영적 갈급함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현실에서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적 의미에서 오늘 감동 없이 믿는 우리들의 모습이요, 영적 만족을 찾지 못하고 있는 타성화 된 신앙인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2. 사람을 의식하며 물 길러 온 이 여인에게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께 향한 신앙심은 있었으나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길을 피하여 남들이 없는 사이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들어 날까 늘 불안 해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고 살아야 했으니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오늘도 이런 부류의 신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동도 없으면서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면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껏 믿음의 생활을 하느라고 하면서도 속에서부터 샘솟는 기쁨도 없이, 언제나 갈 한 심령으로 있는 상태가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동 없이 믿는 생활이기에 교회의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통 교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사도 신경은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교인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사람을 피해 버립니다.
그러니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됩니다.
몇 년씩 교회에 나와서도 자기를 들어내질 않습니다. 마지못해 직분을 감당합니다. 억지로 봉사하고, 기쁨 없이 찬송도 부릅니다
물 길러 오는 일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물을 길어 와야만 하였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 나오는 것이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와야 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은 힘만 듭니다.
물을 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주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갈 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런 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주어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렇게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지겹습니다. 우선 사람이 싫습니다. 교인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인들과는 교제를 멀리하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수가성의 여인 같은 존재가 아닌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3. 참된 신앙생활이란 속에서부터 샘솟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갈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속에서 샘솟는 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게 합니다.
다시 갈 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변화시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 힘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갈증을 느낍니다.
내 능력과 내 지식과 내 의지로 믿음생활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니 힘이 들고, 외롭고, 사람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매일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이 있는가 하면, 속에서 샘솟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내고 있습니까?
성령 없이 믿는 신앙생활과 성령 충만함으로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성령 없이 지식으로 믿는 신앙, 성령의 체험이 없이 귀로 듣고 믿는 신앙,
성령의 감화감동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저 오랫동안 믿고 있는 신앙,
그런 신앙생활에서는 변화란 없습니다. 획기적인 자기 혁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직 세미나를 하고, 청지기직 수련회를 해도 변화되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무리 수 십년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가정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물을 길러 와야 하듯이 감격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속에서 샘솟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으로 이끌림 받는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감화감동 하심이 모든 성도들 위에 임했을 때, 이제는 물을 길어 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샘물과 같은 성령의 힘으로 가만있지를 못했습니다.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저들은 이제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폭포수 같이 용 솟는 믿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내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들이 살아나듯이, 뼈들이 움직이듯이,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나듯이 성령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생활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대화에서 이 여인처럼 진실로 찔리는 무엇이 느껴져야 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였을 때 이 여자는 솔직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사실 네가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남편은 아니고 그저 사는 것뿐이라고 지적 받았을 때 이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 거꾸러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때때로 나의 죄악의 비밀을 지적해 줍니다.
<말씀>은 숨겨놓은 비밀을 들추어냅니다.
<말씀> 앞에 정직해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들으면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몇 십년, 아니 대를 이어 모태 신앙이라도 그것은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이지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은 아닙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선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주일을 기다립니다. 아-멘이 절로 나옵니다.
찬송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감격과 힘찬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우물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선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인들을 피합니다. 목사를 싫어합니다. 교역자들을 멀리합니다. 자기 주장만 내 세웁니다.
처음에 이 여자가 예수님께 향한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남자로서 어찌 사마리아인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구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요즘도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속으로 핀잔을 주는 심령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물 길러 오는 신앙생활입니다.
속에서 샘솟는 믿음이 되어야 전도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희생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이 속에서 샘솟는 믿음으로 전환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좀 노력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구도자(求道者)의 심령을 가지고 기도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와 수요 기도회에도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듯이 영혼을 위하여 정진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1세기는 과학첨단 기술이 어느 때보다 발전하리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생명공학 분야가 최첨단을 걷는 공학이 될 것이라고들 합니다.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체의 부속을 갈아 끼운다 해도 고물 차는 고물 차일 뿐, 새 것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려면 주안에서 성령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우리 모두 속에서 솟아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성령체험의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