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누가복음

살게 하는 눈물 렘8:18-9:1, 눅 19:41~44

nam씨 2020. 3. 27. 12:10


살게 하는 눈물 렘8:18-9:1, 19:41~44

 

인도의 한 청년의 간증입니다. 그는 신앙을 거부하던 불신 청년인데 눈병에 걸려 고생하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정밀 진찰을 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살인적인 병균에 감염되어 당장 다음 날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청년은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막막한 가운데 있는데, 그리스도인 친구가 찾아와서 권면합니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염치가 없었지만 별 수 없이 그러마고 약속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답답하고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문이 열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실컷 울고 또 울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 받는 순간이 닥쳤지만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못 보게 되었지만, 이제 영안이 열려 천국을 바라보니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 전에 다시 진찰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전날까지 심하게 번졌던 독한 병균이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그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원하고 치유한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살게 하는 눈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사랑의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눈물은 생리적 작용이지만 분명 인간의 감정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런 눈물을 흔히 감정 눈물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대개 나약한 이미지로 비쳐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사내자식은 울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약 본문 눅19: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신 것이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자 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울었습니다. 그 슬픔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도 비통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5:7)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인간적으로 고통스런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41절에 성을 보시고 우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 하리로다!” 외치며 환영합니다. 그런데 입성 행렬이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기슭에 당도하자 예수님이 갑자기 우신 겁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세 번이지만, 공생애 전체의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예수님은 수시로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왜 그렇게 우셨을까요? 무엇보다 사랑의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예루살렘 성민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본문 41절의 울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클라이오’(κλαιω)인데, ‘흐느껴 울다’, ‘울부짖다’, ‘ 통곡하다등 강한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weep’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가 통곡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이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당이 감람산 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그 이름이 눈물 교회’(Dominus Flevit “주님이 우셨다”)입니다. 꼭 눈물 모양으로 세워져 예수님이 통곡하신 그 사건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구약 본문 렘8:18-19"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라고 애통하고 있습니다. 여기 딸 내 백성이란 유다 백성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극한 민족애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심히 먼 땅이란 바로 유다 백성들이 사로잡혀 가게 될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대적으로 남방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사역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심히 마음이 괴롭고 아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슬픔과 눈물로 점철된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잘 우는 성격의 소유자'라서 얻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많이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족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눈물이 사람을 살리는 눈물입니다. 방탕한 자식을 위한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결국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와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인물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로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심판에 처하게 될 모습을 보며 흘리는 안타까운 눈물입니다.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모습이었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그 위용을 자랑하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 역시 겉으로는 열심 있고, 의롭고, 경건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침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도 예루살렘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북적거렸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 보이는 그들의 영적 상태는 거짓과 죄와 불법과 불의, 외식과 불신앙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13:34~35)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지금은 평화의 도성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죄와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그마저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 입니다.

 

본문 눅19:42-44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죄 가운데 장차 멸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예언하신 겁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은 포위되고, 110만 명이 전염병으로 혹은 굶어 죽거나 학살당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게 없어서 어미가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10만 명이 로마 제국 각지로 끌려가 경기장에서 맹수 밥이 되고,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자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파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의 눈물도 역시 백성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며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호소에도 돌이키지 않는 백성들에게 임할 몇 가지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남방 유다가 황폐케 될 것을 말합니다. 산들도 광야 목장도 모두 불에 탈 것이며, 그 곳에는 사람도 지나가는 자가 없을 것이고, 가축의 소리도. 공중의 새도 짐승도 살지 않는 황폐한 곳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산과 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은 늑대의 굴이 되겠고 성 안에는 백성들이 사라진 곳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0-11)

 

*다음에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의 일을 깨달아서 그 말씀을 선포할 자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12)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현실을 바로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이 많으면 좋을 턴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시 선지자들이나 제사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세상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에 눈이 어두워 거짓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거나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은 그야말로 말씀의 홍수 시대입니다. 문제는 설교가 하나님의 일을 깨달아서 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전하지 아니한 설교라면 인간의 가르침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는 메시지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13-16) 남방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버리는 것도 부족해서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는 행동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15절에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쑥과 독한 물은 고통과 환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에게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환난은 40년 후에 바벨론을 통해서 훗날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떠나 사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무서운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이제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성도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3.우리를 살리는 고귀한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나 주의 말씀을 대변하는 선지자와 주의 종들의 말씀을 듣고 마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하고 회개할 때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을 그치게 해드려야 합니다. 통곡 소리를 멈추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은,

 

*먼저 회개의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제1성으로 하신 말씀이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15 ) 천국은 죄인입장불가입니다. 오직 의인만이 입장이 가능합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은 자만이 의인이 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15: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는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결한 삶을 사는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다음에 감사의 눈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생명 주신 것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혼을 구원해서 영생을 주시어 하늘 후사가 되게 하신 것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것도, 험한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 등 등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감사가 깊어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116:12)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헌신의 눈물입니다. 우리 인간이 흘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눈물은 예수님을 닮은 눈물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눈물이요, 더 나아가 민족과 세계 만민을 위한 눈물입니다. 이것이 곧 헌신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과 세계 인류를 위해,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한 결 같이 이런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구약 본문의 예레미야는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 3:48 “ ...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넘어 헌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 ” 바울은 죄악에 빠진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런 헌신의 눈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 눈물이 있었기에 멸망할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도 그 눈물의 열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토머스 선교사(Robert Thomas, 1840~1866)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목사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24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 상해로 파송됩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내 캐롤라인 죽었습니다. 며칠간 타지로 출장 갔다 오니까 임신 중이었던 아내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숨져 있었고, 아이도 죽었습니다. 젊디젊은 선교사가 어떻게 그 극한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개인적인 슬픔의 눈물을 거두고 예수님의 눈물을 가지고 조선 땅으로 향합니다. 마침 제너럴 샤먼호가 조선으로 간다 하여 그 배를 타고 입국하려고 했지만 쇄국정책으로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어서 한문 성경을 전해주려고 배에서 내립니다. 결국 대동 강변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때 나이가 만 26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눈물과 피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목을 친 포졸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고 예수 믿고 평양 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눈물이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있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데올로기 우상을 섬기는 지도자들 때문에 서서히 우리자신들도 모르게 공산화 되어가고 있음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님처럼,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살리는 고귀한 눈물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살게 하는 눈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살게 하는 눈물은,

 

.사랑의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심판에 처하게 될 모습을 보며 흘리는 안타까운 눈물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고귀한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