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방 자료
101. 말씀이 주는 유익(시 119:98)
찬송 : 197장(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말씀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왜곡된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여깁니다. 우리 신앙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수많은 이단들이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말씀을 왜곡하다보니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집니다. 사실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믿음처럼 가장한 경우입니다. 지금도 그런 이단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해석하는 진짜 기준이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보아야 하는 것도 결국 이런 사람들의 횡포를 막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시편 119편 말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루시려는 은혜를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함께 하시려는 지도 압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봅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하게 표현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명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례, 규례, 법도, 계명, 율법, 증거, 교훈, 법 등으로 표현합니다. 약간의 다른 의미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말씀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폭이 좁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일부분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은 폭이 넓어서 어디까지인지 모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 인간관계, 업무, 사회생활, 자연, 환경, 교육, 문화, 정치, 경제, 조직, 미디어, 윤리 등 모든 영역에 말씀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임마누엘의 신앙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약간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의 계명이 항상 함께 있다는 표현을 무엇일까요? 주의 계명을 단순히 의인화시킨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계명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생활 전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일부러 생각해서 적용하려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말씀을 적용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요, 주님이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우면 지혜롭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것 같으나 사실은 말씀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지혜롭게 됩니다. 잔꾀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가장 탁월한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지혜는 세상의 그 어떤 지혜롭다고 칭찬하는 것들 위에 있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생명과 영의 유익을 제공하는 참 지혜입니다. 그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그 지혜를 주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생활에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지혜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생활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올 한 해 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02. 은혜로 살아가는 기쁨(시 119:132)
찬송 : 382장(너 근심 걱정 말아라)
은혜라는 말은 친절, 호의, 감사, 기쁨, 즐겁게 하는 것 등의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은혜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특별한 호의, 총애, 사랑스러움입니다. 은혜는 윗사람으로부터 값없이 은택을 입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값없이 베푸는 호의와 사랑, 그리고 내게 주시는 도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중 은혜는 “나를 구속하신 십자가의 은혜요” 또는 “주의 성령의 임재성”이고, 그 임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만 가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은혜를 받고 그것을 깨닫고 은혜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은혜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망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그 크신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로 살게 하시고자 하심을 깨달아 알고 2011년은 은혜로 살아가는 기쁨이 넘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은혜로 사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보면 놀랍게 변화되고, 성장하여 성숙케 되어 사는 이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큰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기념하며 살 때 그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나를 더욱 복되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은혜 받은 기념으로 자기의 몸을 주께 바침으로 기념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은혜 받은 기념으로 주의 성전에 성물을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 생활로 기념된 삶을 이루기도 합니다. 받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도록 기념비를 세우는 삶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기를 자신이 베개했던 돌을 세워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고 서원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축복을 기념하여 성전을 세우겠다는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 받은 사랑과 축복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는 날마다 그의 은혜를 기념하여 사는 기념신앙이 되게 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은혜로 사는 사람은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받았어도 깨닫지 못할 때 불평, 원망, 불화의 삶을 살아가지만 내가 진실로 주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는 주를 감사하여 살게 됩니다. 모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사역을 위하여 일할 때 바울 같이 고난당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평생을 안질이라고 하는 질고에 시달린 삶을 살면서도 모든 사람을 향하여 범사에 감사하여 살라고 교훈했음을 봅니다. 환경이 좋을 때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감사생활을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감사생활은 늘 마음으로 감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늘 입술로 감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늘 그에게 보답함으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은혜로 사는 사람은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내가 은혜 받고 내가 그의 은혜를 깨닫고, 내가 알게 된 하나님의 능하신 일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삶이 은혜 받은 성도들의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의 전능하심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주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고 믿는 이들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나의 입을 열어 말하여야 합니다. 내가 만난 주 하나님을 이웃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은혜로 사는 사람이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만난 예수를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입을 열어 내가 만난 선지자 예수를 나와서 보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증거하고 자랑하여 말하는 자가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소유해야 함을 입을 열어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로 사는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기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하시는 일을 내 입을 열어 전파하는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2011년 주의 은혜로 사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103. 기도 응답의 사이클(시 119:145-146)
찬송 : 546장(주님 약속하신 말씀위에서)
사이클이라는 운동 경기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자전거 경주입니다. 자전거의 바퀴가 동그랗습니다. 동그라미를 의미하는 영어 서클(Circle)과 사이클(Cycle)이 비슷한 의미입니다. 동그라미의 끝이 없습니다. 한 참 가다보면 그 자리에 와 있습니다. 순환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순환만 있다면 재미가 없습니다. 순환하지만 동시에 발전해야 합니다. 역사는 순환하면서 발전됩니다. 나쁘게 발전된다면 악순환이며, 아름답게 발전된다면 선순환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순환하면서 발전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힘을 얻고 주중에 말씀을 따라 생활합니다. 그리고 주중의 생활에 대한 반성을 예배시간에 하며 또 힘을 얻습니다. 예배와 생활, 교회와 가정, 교회와 직장을 순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편기자가 기도 응답의 순환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기도응답의 순환을 봅시다. 첫째는, 부르짖고 응답받음으로 지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주님의 교훈을 열심히 지킵니다. 즉 부르짖고 응답받고 지키는 순환구조입니다. 여기에 부르짖는 사람, 응답받는 사람, 지키는 사람은 시편 기자 곧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르짖음의 대상, 응답하시는 분, 지킬만한 교훈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순환구조가 형성됩니다. 사람이 순환구조의 한 쪽에 있기 때문에 순환구조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축복의 순환구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며, 우리들에게 제공하신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은혜의 순환구조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말씀입니까?
둘째는, 부르짖고, 구원받고, 지키는 구조입니다. 여기 앞의 내용과 비슷한 구조이긴 하지만 중간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앞의 구조는 부르짖고 응답받고 지킵니다. 여기에서는 부르짖고 구원받고 지킵니다. 중간에 응답받는 것과 구원받는다는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은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이 같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방법이 곧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순환구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심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순환구조의 선에 있지 않으시고 중심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혜의 순환구조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충만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르짖을 마음, 지킬 마음을 주셨습니다. 위기에 닥쳤을 때 부르짖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지난 이후에 말씀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려울 때는 도와달라고 부탁하다가도 막상 도움을 받고 나면 그 이후에 모른 척 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구해 달라고 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이후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을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은혜의 순환구조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조건을 걸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 조건을 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내가 지키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면 내가 지키겠다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면 지키지도 않겠다는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처럼 조건을 거는 믿음을 갖습니다. 내 사업에 성공하기만 하면 무엇을 내놓겠다고 약속합니다. 성공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이 먼저이며, 부르짖는 내용 중에 하나님의 응답와 구원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힘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지킬 힘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 간구하고 하나님의 응답하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은혜의 순환구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가 올 한 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04. 나를 건져 소생케 하오소서(시 119:153-154)
찬송 : 429장(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지푸라기를 잡아본들 건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지푸라기가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은 건져주신 분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주셨으며, 모든 악한 일에서도 건져내주실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딤후 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그가 뜨겁게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건져주시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죄악과 사망, 환난과 곤고와 박해, 기근과 적신, 위험과 칼 등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뿐만 아니라 건짐을 받은 바울의 인생을 놀랍게 변화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바울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 우리들도 건져주시는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건짐을 받은 바울이 크게 변화되었듯이 우리들도 건짐을 받은 인생의 변화를 체험케 될 줄 믿습니다. 건져주시는 은혜는 곧 소생을 의미합니다. 소생은 이라는 말은 "시들시들 시들었던 것이 다시 싱싱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믿음을 회복하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꾸 자기감정대로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날마다 마귀와 싸우고, 죄와 싸우기 때문에 약해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소성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증거할 때에 내 영혼이 더 싱싱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영혼도 건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1.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다윗에게도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고난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이 없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2.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윗의 원한이 뭘까요? 악한 자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말씀을 폐하고, 말씀을 조롱할 때 그것이 마음에 원한이 된 것입니다. "야,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저렇게 욕할 수 있나!"해서 마음이 심히도 상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전쟁할 때 왜 거인 골리앗 앞에 나아갔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저주하는 골리앗을 보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덩치를 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명히 붙여주실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믿음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의로운 원한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짐은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사 나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구원이 '악인들에게서는 멀다'고 했습니다. 왜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지겠습니까? 그 이유를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어떤 고난 중에서도 주의 법을 잊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습니까?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의를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전부 무효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씀의 약속대로 나를 소성케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여기서 강령은 요점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키포인트가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올 해도 고난과 죄악에서 건짐 받은 기쁨을 감사하고 헌신과 봉사로 보답하는 한 해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05. 보시고 살리소서(시 119:159).
찬송 : 436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사람이 살아가는 재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이 자기 삶의 취미이고 살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술이 자신의 취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과 소통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포츠가 자기 삶의 의미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동을 즐겨하고 보는 것이 재미있고 참여하는 것이 즐거운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마나 다양한 취미, 다양한 재미, 다양한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그것들이 모여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서로 통합하며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의 취미와 재미가 취미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고, 그것으로 생업을 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커다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열정이라고 합니다. 열정이란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을 만큼 일하는 에너지입니다. 그 일을 할 때는 에너지가 솟아 나와서 피곤했던 몸이 어느 샌가 힘을 얻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에너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힘을 얻고 의미를 얻습니까?
신앙인들은 신앙이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쁨입니다. 신앙인들도 각각의 은사에 따라 재미있는 것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전도가 즐겁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가 즐겁습니다. 어떤 이는 찬양이 좋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 공부가 좋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 봉사가 즐겁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즐겁습니까? 오늘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이 재미입니다. 그 재미 때문에 그에게 힘이 솟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보다 자세히 말씀에 관한 재미와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 주님은 주님의 법도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사모하며 숨이 차기까지 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했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많지만 그것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말씀부터 사모함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말씀 사랑함과 사모함을 보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열정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목적이 어떤지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당연함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인자함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당연함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며 말씀 속에서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능력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려고 하는 뜻이 놀랍고 위대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참으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수를 감사주시고 또 다시 말씀을 사모하고 지키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항상 나타납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많이 느껴보십시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우리를 살리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심으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살아있는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이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06.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시 121:1-2)
찬송 : 486장(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인간은 한 평생 살아갈 때 예기치 않은 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산 앞에서 대부분은 좌절하고,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도리어 그 산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생을 좋은 방향으로 개척해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자기 앞에 가로막힌 산이 없었던들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에게서 역경 자체는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더 높고 깊은 삶의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면, 역경의 선용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보면 대부분이 모두 역경을 통해서 그런 인물이 되었음 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위스의 교육자였던 페스타롯치(J. H. Pestalozzi 1746-1827)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내 일생의 고난은 내 풍족한 생활이 가져올 것 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왔다. 만일 내가 행복했더라면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나를, 고난은 내 안에서 나를 성숙케 했다. 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예지에 이끌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애 중에 고난이 있었기에 도리어 더 노력했고, 인생을 성숙케 했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고난과 역경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2011년을 사는 지혜를 얻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사람이 역경 중에서는 누구나 도움을 찾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난관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하고 찾습니다. 난관에 부딪힐 때 흔히들 세상 권세에서 도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적 배경을 찾아 나섭니다. 얼른 보면 그것이 제일 해결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인 듯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해외여행을 마음만 먹으면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권을 가지려면 반드시 신원조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신원조회가 떨어져야 여권 수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신원조회를 담당했던 부서가 중앙정보부 이었습니다. 중정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신원조회가 나오지 않아 난관에 부딪혀 있을 때, 거기서 한번 전화만 한 통화 해 주면 당장에 해결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인 권세를 의지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처럼 무상한 것도 없습니다. 권좌에 있던 사람들의 물러난 후에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줄은 썩은 동아줄 같이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측은하게 느껴집니까! 또 사람들은 힘들 때 때로는 재물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물론 재물의 힘은 놀라운 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인생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인생의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돈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2. 우리 도움의 진원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의지하는 줄은 끊어질 줄들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튼튼한 것 같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 니다. 그러기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나의 도움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깊은 영적 교훈을 찾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산(山)을 바라볼 때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산만 쳐다보고 있으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산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산을 지으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떤 현실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사건 자체만 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그 사건 배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장 여기 있던 산이 없어져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산을 바라보면서 도움이 하나님께로 옴을 확신할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산만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산은 우리 앞에 놓여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산을 바라보면서 나의 도움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할 때, 역경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앞에 가로막힌 산이 어떤 산입니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 하도록 운동장에서 함께 뛰고 있습니다. 마지막 삶의 연장전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낙심치 말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07.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시 121:5-6)
찬송 : 263장(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유명인들에게는 경호원이 있습니다. 유명인의 생명이 보호받으면 그의 능력과 재주가 유지됩니다. 어떤 경우는 유명인이 속한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유명인일수록 시기하는 사람이나 대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죽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 보호해 주어야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경호원 고용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경호원입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경호원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를 지키시는 경호원이 되어 주신다면 이거야말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만큼 귀한 존재로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지켜주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늘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광야라는 곳이 있습니다. 햇볕이 내리 쬐는 곳이고 그늘이 없는 곳입니다. 농사도 잘 되지 않는 곳입니다. 사람도 별로 살지 않습니다. 짐승들만 사는 위험한 땅입니다. 사실은 고난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광야의 고난을 체험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광야를 지나 왔습니다. 광야에서 살아도 그늘이 있다면 안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그늘을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을 그늘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는 낮에 구름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었고, 구름이 떠오를 때 움직였습니다(민 9:17). 하나님이 그들의 오른편에서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햇볕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강한 햇볕에 오래 노출되면 피부가 화상을 입습니다. 광야가 곧 이런 땅입니다. 강렬한 햇볕을 차단하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인공적인 차광막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자외선 차단제가 있었겠습니까? 대책이 없으면 일사병, 피부병이 만연할 것입니다. 겨우 겉옷으로 온 몸을 가립니다.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이런 위험을 막아 주십니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하나님의 지키심은 완벽합니다. 환경적 어려움마저도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해결할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조차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지금도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그 다스리심의 혜택을 입고 살아갑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해칠 것이 없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밤이 더 위험합니다. 들짐승들은 밤에 더 날뜁니다. 게다가 기온이 급강하하고 체온도 떨어집니다. 낮은 체온으로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낮에 햇볕을 가리던 겉옷을 밤에는 이불로 삼아야 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밤에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백성들에게 밤에는 불기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낮에는 불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게 하셨습니다(출 13:22). 우리 역시 밤낮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도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신앙인들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지키실까요?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데 무엇이 염려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 됩니다. 우리의 목표와 계획 모두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지키겠다고 마음을 확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키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상하게 하지 많으십니다. 낮의 뜨거움도 우리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에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됩니다. 우리는 믿고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가 우리 가정에 올 한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08. 지켜주심의 영성을 가진 성도(시 121:7-8)
찬송 : 408장(나 어느 곳에 있든지)
양을 치는 목자들은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캄캄한 밤에는 추위를 느낀다고 합니다. 추울 때는 불을 피우든지, 서로 몸을 감사거나 함께 웅크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냥 웅크리고 있으면 주변에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기 어렵습니다. 맹수가 양을 약탈할 때 고스란히 빼앗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목자는 양을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목자의 감각은 언제나 양의 상태에 느끼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목자의 능력은 양을 어떻게 지키며, 양의 안위를 어떻게 보호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의 소리만 들어도 양의 상태를 압니다. 양을 훔치려는 짐승들이 호시탐탐 양을 노리고 있기에 목자들은 경계를 죄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마음을 놓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공동체에는 이끄는 지도자들이 있고,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목자는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의 상징이고, 양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상징합니다. 즉 공동체는 구성원을 사랑하고 구성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민족의 아픔, 역사의 아픔,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의 이유는 공동체 안에 목자의 심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된 사람은 구성원을 통해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지도자들이 구성원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어떤 방법으로 지킬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약탈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습득해야 합니다. 그래도 약탈자들이 쳐들어온 뒤에 대비하면 일부 양의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목자들은 약탈자들이 쳐들어오기 이전에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약탈자들이 오는 것을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양들이 있는 곳에 울타리를 칠 수 있습니다. 혹은 양들의 주변에 횃불을 켜서 약탈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횃불을 켜면 약탈자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재빠르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약탈자들에게 공격당한 뒤 대비하는 것보다는 경계를 잘 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목자가 피곤하고 지쳤을 때가 약탈 짐승들에게는 양을 훔쳐갈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목자라도 몇일동안 잠도 자지 않고 양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을 효과적으로 지키려면 둘 이상의 목자들이 힘을 합하여 서로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잠을 잘 때면 다른 한 사람이 경계를 섭니다. 좋은 지도자는 자기가 피곤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하도록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만족할 수 있도록 일의 한계를 분명히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효율성을 생각합니다. 효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서로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도록 일을 분담하고 함께 동의하며 자기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로서 적절한 시스템이 생깁니다. 좋은 지도자는 환경과 상황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시스템 자체가 최고는 아닙니다. 미련한 지도자는 기존의 시스템만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지도자는 시스템에 변화를 주며 일합니다. 시스템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시스템의 목적이 무엇인 줄 압니다. 시스템은 효과적으로 일하게 하며 공동체에 유익을 가져다주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며,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혼자 지키는 것보다 시스템을 갖추어 지키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효과적인 시스템을 세우면 목자의 수가 적어도 더 많은 양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양같은 우리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돌보심, 그리고 도우심이 없다면 한시도 살기 힘든 존재입니다. 오직 자기가 사는 길은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목자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양은 안심이 됩니다.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됩니다. 여호와 목자는 한두 번 지키는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양을 영원토록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절). 여호와 목자가 양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면 그 관심의 끈이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2011년에는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키심의 영성을 각진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09. 눈물을 흘리며(시 126:5-6)
찬송 : 452장(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수렵과 채취로만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농사기술도 없었던 시절 먹을 것을 얻는 방법은 산과 들에 있는 과일 열매와 짐승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가면 농사를 짓지 않고 수렵과 채취로만 사는 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여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농사의 원리를 알게 된 다음에 사람들은 식량의 풍족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풍족함을 위해 더 열심히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사실 겨울이 없는 지역에서는 별로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있는 지역에서는 겨울 뿐만 아니라 일년내내 먹을 것을 비축해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농사를 짓는 기본 목적이기도 합니다.
농사를 짓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기는 하지만 햇볕과 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봄철의 햇빛을 받으며 땀흘려 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을철에 거두는 것도 어렵습니다. 얼굴이 그을리고, 손이 거칠어지며 허리도 아픕니다. 그렇지만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식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농기계가 생겨났습니다. 넓은 땅에서 한 번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이나 미국, 캐나다 등 땅이 넓은 곳에서는 농사짓는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비록 기계로 농사를 지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손이 필요한 곳에는 손을 대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완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원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며 겨울에 즐기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어린 시절에는 배우고, 성인이 되어서는 일하고 중년이 되어서는 결과를 맺으며 노년이 되어서 편안하게 쉽니다. 반대로 어린 시절에 편안하게 쉬면 일할 것도 거둘 것도 없습니다. 편안하게 쉽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지고 거두는 것이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농사의 비유를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에 의해서 자라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자세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믿음 생활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씨를 뿌릴 때는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씨를 뿌릴 때의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시작할 때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작할 때는 대부분 어렵습니다. 쉬운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언제 결과를 보게 될지 불확실하기도 하고, 추수 때가 언제 올지 까마득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씨를 뿌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돌들이 있고, 씨가 바람에 날립니다. 새들이 와서 씨를 쪼아 먹기도 합니다. 열심히 씨를 뿌렸는데, 싹이 제대로 나지 않아서 허탈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힘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확실히 씨를 뿌릴 때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도 울면서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씨라도 뿌려놓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거둘 희망조차도 품을 수 없습니다. 시작할 때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도 시작해야 합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조차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째, 기쁨으로 거둘 날이 옵니다. 본문에는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 합니다. 시작이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며 어느 정도 진행됩니다. 어렵게 진행된 일일수록 그 결과를 얻는 기쁨이 큽니다. 쉽게 되는 일은 기쁘기는 하지만 감격적이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나라 대표 선수들이 올림픽 경기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면 메달 수상식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쁨과 감격이 북받쳐 오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이고 고생 끝에 낙이 옵니다. 하나님은 고생 끝에 낙이 오게 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이지만 씨를 뿌리도록 생각과 마음을 주시고 행동에 옮기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쁨으로 결실을 거두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으로 결실을 거두는 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어렵게 시작하였지만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하고, 하나님이 꾸준히 진행하도록 힘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결실을 거두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가정에 올 한해에 하나님이 주시는 감사와 은혜와 결실을 거두게 하심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0.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시 128:1-2)
찬송 : 314장(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기대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 욕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건강에 좋다면 못 먹는 것이 없고, 행복을 위한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의 태도와 가치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쓰고, 잘 입고, 잘 사는 것만으로 그의 삶이 형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서 복을 누리면서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셨을까요?
1. 물질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일을 해도 수고한 대가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참한 생활입니다.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재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므로 육신적으로도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고 성실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재물의 복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3:11) 도적맞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그냥 간곳없이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을 막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계산으로 될 듯하나 실제로는 안 되는 것, 금방 성취될 듯하나 안 되는 것을 막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통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종살이를 할 때도, 감옥살이를 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정 총무가 되었고 주인은 그에게 집의 열쇠를 주고 책임자가 되게 했습니다. 감옥에서도 감옥 업무 책임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꿈을 해석하는 신령한 힘을 받았고 이집트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그는 일생을 성공하고 부귀와 영화, 재물과 권세를 얻고 만사형통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형통케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축복이 임합니다.
2. 화평한 가정이 되는 복을 받습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 아내가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복을 주십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정은 아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므로 복을 받고, 그 결과 남편을 기쁘게 합니다. 최고로 행복한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말씀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편의 내실에 있는 아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남편은 아내가 이런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복을 받습니다. “효자 집에 효자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보는 대로 아이들은 행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먼저 효자가 돼야 합니다. 효도하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당당하게 효를 요구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도록 합니다. 부모님이 먼저 하나님께 효도하는 좋은 신앙인은 부모와 웃어른께도 효자가 됩니다. 그리고 가문을 빛냅니다.
3. 만사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영혼이 잘된다고 성경을 말합니다.(요삼 1:2) 그런 사람에게는 형통하고 건강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자손손 번성하고 건강하고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자손이 번성했습니다.(창 22:17) 영적으로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하늘나라 가족사진을 보면 가운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고 전도합시다.
“평강”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이 땅에 평화가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창, 활, 칼로 했지만 지금은 다이너마이트가 생겨난 이후에 수천, 수만 명이 죽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노벨 평화상을 만들었지만 평화가 없습니다. 어디서 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법괘가 머무는 곳입니다. 복의 근원이 제단에서 나간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라고 나와 있는데, 존 캘빈이라는 신학자는 예루살렘의 복이 교회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모든 축복을 주십니다. 교회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십니다. 교회를 잘 섬기는 사람은 형통케 하십니다. 교회를 내 교회로 섬기는 사람은 내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재물의 복, 가정의 복, 평강의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 가정에 이 축복이 다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111. 파수꾼의 기다림보다(시 130:5-6)
찬송 : 405장(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무엇인가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아시나요?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평생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북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 아들을 잊지 못해 눈을 감지 못하고 결국 병든 몸으로라도 아들을 만나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평생 아들을 만나고자 하는 기다림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동구 밖에서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해질녘쯤 되면 어김없이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까요? 그 심정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행동을 보아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을 목욕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지를 빼서 주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재산보다 훨씬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여기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늘에서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자녀됨이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더 많은 자녀를 삼고 싶으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늘의 잔치가 열리도록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믿어집니까? 믿어지는 것이 당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이 아닌 집을 나간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집을 나간 아들은 초기에는 가진 돈으로 흥청만청 쓰면서 잘 살았습니다. 돈이 떨어진 이후에는 돼지를 치며 거지생활을 하였습니다. 고생이 심한 아들은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많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일어섭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사모하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그리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때는 거의 힘들고 지치고 어려움의 시기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지치고 어려워지면 어린 시절 믿던 하나님의 기억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로 나옵니다. 이렇게라도 나오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라도 잘 될 일입니다.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보람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시인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모해야 당연합니다. 당연한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보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떤지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과 대화해야 하며,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양식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은 양식의 공급자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만나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었습니다. 고기가 없을 때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양식을 공급하셔서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만나 곧 하나님의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게 됩니다. 그것이 삶을 유지하는 방법, 은혜를 받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파수꾼의 마음보다 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말씀을 바라는 마음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강합니다. 밤새 보초를 서는 사람은 아침이 기다려집니다. 쉴 수 있는 시간, 긴장을 푸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살리시는 은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12. 환난을 기회로 삼는 믿음(시 138:7)
찬송 : 310장(아 하나님의 은혜로)
독일에서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거리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라고 세 번 되풀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소망을 먹지 않으면 절망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환난은 'trouble'입니다. 이 말은 '문제들 속에 있다할지라도, 고생한다 할지라도, 고난의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끝나면 우리 인생은 비참합니다. 고난만 받다가 끝난다면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소생시키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소생'은 '부흥'의 뜻입니다. 환난 중에 처한 다윗이 하나님을 만난 기회로 삼은 비결을 알고 우리도 다윗처럼 승리하는 2011년을 사는 비결을 아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환난을 믿음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새들이 지저귀고 꽃이 피는 봄동산에서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있고 물이 끊어졌고 벼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우신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의 때에 하는 감사는 진짜감사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감사가 나옵니다. 신앙은 둘 중에 선택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현재 어려워서 누리지 못한다면 이 어려움을 주께서 풀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8에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풀릴 때만이 아니라 내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때라도 감사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더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다윗은 이런 경지에 올라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환경은 변하나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환난을 감사회복과 믿음 회복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2. 환난을 기도 응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울부짖어 기도할 때 주께서 응답하시고 그 응답의 열매가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십니다. 환난의 때가 기도를 배우는 기회가 됩니다. 환난은 기도학교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도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환난 중에는 급하니까 진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전혀 없는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기도할 수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고 미래가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보배를 주셨습니다. 바로 기도의 특권 입니다. 이 기도의 특권이 환난 날을 깨우는 영적인 은혜와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환난이 우리의 기도의 무릎을 강하게 만듭니다. 기도의 비탈길을 올라가본 사람만이 기도의 무릎이 강해집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기도를 통하여 가장 큰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로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을 만나는 기도의 현장, 기도학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환난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한자는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고 하는 자입니다. 다윗은 환난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이켜 보고 교만의 거품을 빼고, 자랑의 거품도 빼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잔인한 마음도 제거합니다. 환난은 인격적인 면을 새롭게 다듬어 줍니다. 쌀쌀맞은 마음의 거품을 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번씩 환난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위해 용광로 속에 넣어 담금질하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어려움도 믿음으로 잘 받아들일 때 내 인생 전체는 더욱 축복된 삶이 되는 기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믿음의 자세로 이 환경을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고 하늘 복을 받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3.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시 139:1-2).
찬송 : 569장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부모님이 나를 잘 아십니다. 어릴 적 내 친구가 나를 잘 압니다. 동창생이 나를 잘 알기도 합니다. 혹은 선생님이 나를 잘 압니다. 직장의 동료가 나를 잘 압니다. 배우자가 나를 잘 압니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심리 상담을 하는 분들이 나를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심층심리까지 공부하여 사람의 무의식적인 습관까지도 집어내기도 합니다. 혹은 목사님이 나를 잘 알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나의 영적 상태를 나보다 더 잘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 말한 모든 분들보다 더 많이 더 정확히 나를 알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시편 139편서 다윗은 다섯 번에 걸쳐서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알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존재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 자세히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바른 믿음으로 서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나를 살펴보십니다. 여기 살펴본다는 말은 자세히 본다는 것입니다. 특히 살펴본다는 말은 흠이나 트집을 집어내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도와줄 것이 무엇인지, 후원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나 단점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약점과 단점을 흠잡기보다는 채워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려고 살펴보십니다. 우리의 어려움, 고통, 슬픔, 괴로움, 고난, 환란 등을 하나님이 살펴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우리가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미리 나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펴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나의 앉고 일어선다는 말은 나의 생활 모습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나의 생활 모습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부지런한지, 게으른지 혹은 바쁜지 한가한지를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지 남에게만 의지하려고 하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내 일만 잘 하고 남의 일에 무관심한지도 알고 계십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지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살고 있는지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미래를 위해 사는지, 현재에만 충실한지,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사는지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작은 일에만 신경을 쓰는지, 작은 일과 큰일을 동시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도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밝히 하십니다. 나는 나의 생각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철학자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나의 생각을 모를 수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욕심이 있는지, 고약한 생각을 하는지, 선한 생각을 하는지 등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 어두운 곳에서 남 몰래 생각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본문 이후로 보면 하나님은 눕고 서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행위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말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의 계획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도 알고 계십니다. 나의 은사와 재능을 알고 계시며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삶 모두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상의 방법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의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필요한 축복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와 축복이 이 가정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올 한해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알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4. 내가 어디로 가든지(시 139:7-10)
찬송 : 482장(참 즐거운 노래를)
옛날 사람들은 천둥이 치면 하나님이 노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병이 들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결혼한 부부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아도 하나님이 안 주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의 원인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정면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조금 기다렸다 대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도망갑니다. 어떤 이는 먼저 피한 이후 사태가 진정되면 해결하려 합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붙듭니다. 반대로 어떤 이는 위기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합니다. 엘리야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든 함께 가십니다. 사람은 따라가지 못해도 하나님은 함께 가십니다. 왜 따라 가실까요? 붙드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피하기보다는 인정하면 자비의 손길로 우리는 인도하시는 하나님 섭리의 사람이 될 줄롤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야반도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들이 남의 눈을 피해 몰래 도망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남들이 곤한 잠에 빠져 든 밤에 도망하면 들키지 않을뿐더러 잡히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도 통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움직이면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입니다. 그럴 바에야 도망하기 위한 새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려는 새벽을 만들어 보십시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새벽에 만난 하나님이 나를 붙드심을 체험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공간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 해외 도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잡히지 않으면 처벌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피해서 멀리 도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서는 어디로든지 도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멀리 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도 땅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시 139:7~8).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공간의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피해 숨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고자 하시는 데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다른 곳보다 먼저 주님의 품으로 가십시오. 지금도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감추시면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 우리와 다른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주고 싶으십니다. 붙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그 손은 은혜의 손입니다.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의 손입니다.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 도망한 사람을 향해서도 오라고 부르시는 손입니다. 엄마가 갓난아기를 붙드는 손과 같습니다. 그 손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 권능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이 온전히 주님을 위해 말하고 일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복된 특권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표시이며, 하나님 자녀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완전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새 그리스도인들이 가슴 속 깊이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생생한 느낌을 충만하게 갖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성령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면 우리 자신이 성령의 전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115. 나를 지으심이...(시 139:14)
찬송 : 391장(오 놀라운 구세주)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한 신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태어난 것이 기적입니다. 지구 상 60억 인구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이 기적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데, 그 중 나 하나가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는 것이 기적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 기적입니다. 나 하나가 생길 확률이 아무리 따져도 0의 확률인데, 그 확률에서 내가 생겼으니 기적이 나이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셨으며 나를 인도하심이 기적입니다. 가족을 이루고 교회를 이르게 된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보이는 이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일입니다. 내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섭리이고 경륜입니다. 내게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필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시며 필요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섭리와 경륜을 시편 기자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 그 섭리를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누가 지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우주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명체가 생기고, 생명체가 진화하다가 맨 마지막에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진화가설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진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진화가설은 그야말로 가설이고 허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지으셨습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심이 기묘합니다. 개역한글판에는 신묘막측하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나는 지으심이 너무나도 놀랍고 신기하여서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설명한다고 하지만 그리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설명과 이해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깨달은 대로 말할 뿐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심이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다 파헤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우리는 믿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이 사실이고, 우리에게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이 하시는 일이 신기합니다. 우리의 힘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여 가면서 사람이 여러 가지 발명을 하지만 사실은 그 발명이 기존에 있는 것에서 조금씩 더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람의 몸을 흙으로 집었다고 하지만 그 흙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그 생기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생기가 있었기에 사람은 비로소 생령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생각을 가진 사람, 마음을 가진 사람,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만든 것이 모두 신비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장성하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처럼 신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은 일이 너무 신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기 인생과 살아가는 모습을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만 있습니다. 자기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의 지으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이 우리를 신비롭게 이끌어 가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6.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시 140:12-13)
찬송 : 482장(참 즐거운 노래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을 위하여, 악을 사랑하는 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기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이 의와 의인을 보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12절). 하나님은 의인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며 의인을 보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감정이 생겨날까요? 하나님이 의를 영원히 보전하시고, 의인의 삶을 보전하실 때 그 대상이 바로 우리라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보전가치가 바로 의인된 나라면 그 감격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동행하는 생활을 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13절). 하나님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의와 의인, 정직과 신앙을 보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이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하며 세상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속에 의인으로 보전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 앞에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2011년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은 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고 전쟁을 도모하며(2절), 내 걸음을 밀치고(4절) 올무와 줄을 놓아 넘어지게 하고 ‘죄’라는 함정을 두어 빠지게 합니다(5절). 그래서 예수님도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눅 1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특징은 그 난폭성(4, 11절)에 있다. 숲속의 맹수보다 포악한 인간은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이 같은 악인의 공격을 경각심이나 인간의 도움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나를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기만성(5절)입니다. 마귀, 사탄은 거짓을 무기로 삼습니다(5절). 마귀, 사탄은 뱀같이 독사의 독이 있는 혀로 거짓과 유언비어를 만들어 사람을 죽입니다(3절).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거짓말하는 악인의 속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2. 위험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성도는 다윗이 한 것처럼 하나님을 찾는 일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그가 주신 구원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믿음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오늘 다윗처럼 우리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난폭하고 속이는 악한 자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 때마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긍휼)하심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구원하신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에도 보존해주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지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를 보호하신 하나님이 현재에도 보호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셔야 하고 성도는 악인의 손에서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하는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행악 자와 악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보호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미래에 대해서도 만족했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의인들은 그의 이름에 감사(찬양)하고”(13절)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멸하시고 억압받는 성도를 구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침묵해도 구원받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악인의 손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청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승리하여, 하나님 보좌 앞에서 감사와 찬송하는 삶을 사시는 우리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117.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시 143:5-6)
찬송 : 391장(오 놀라운 구세주)
사람들에게는 기억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단기기억, 장기기억, 감각기억 등이 어우러져서 사람의 기억력을 만듭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주로 지식을 습득하는 데 많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감각기억으로 인지하다가 단기기억으로 옮겨지고, 똑같은 단기기억을 자주 하다보면 장기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이 됩니다. 장기기억의 창고 속에 있는 것을 가끔 끄집어내면 평생 잊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외웠던 성경말씀이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이 이러한 이치입니다. 성경말씀도 읽지 않고 듣지 않으면 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자주 듣고 읽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 기억을 지배합니다. 동시에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지식뿐만이 아닙니다. 경험도 기억됩니다. 지식의 기억보다 경험의 기억이 훨씬 빨리 기억되고 훨씬 오래 남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쓰라린 상처를 받았다면 그 기억이 평생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쓰라린 기억을 오래 할수록 사람에게 좋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의 기능을 저하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쓰라린 기억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생각을 넣어주심으로 쓰라린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하십니다. 비록 쓰라린 것이었지만 성숙과 성장의 기회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기회였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도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억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억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쓰라린 기억의 자리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억이 대신 자리를 잡게 하십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핍박과 환란의 고통에 있는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옛날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경험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쓰라림 대신 은혜의 기억을 남게 하신 일들이 많았음을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픔을 싸매어 주셨습니다. 아픔을 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크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행하셨습니다. 대충 생각해도 이 정도인데 하나님의 나의 삶에서 행한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한히 많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향하여 펼쳐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크신 손과 편 팔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크신 손과 편 팔로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어할 때는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적군을 만났을 때는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허락하셔서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했지만 신발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혹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이처럼 행하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셋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옛날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일을 기억하며 노래합니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시편 기자가 손을 펴고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심정을 하나님께 보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등을 갖고 있어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일, 크신 손과 편 팔로 인도하신 일이 우리에게 기억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억으로 가득하여 올 한 해 이 가정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양지적(시 143:8)
찬송 : 539장(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도 남과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다. 겉모양으로 본다면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생활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레나에게는 그녀를 인간으로 보아주며, 그녀를 키우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양육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레나는 밝은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남다른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신체 건강한 남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성악을 공부하고,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의 오토다께 히로다까는 하반신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활달한 성격을 가져서 학교의 분위기를 돋우는 일을 했습니다. 스포츠 팀 응원을 하고, 사회봉사에 앞장을 섰습니다. 휠체어가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 친구가 휠체어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반신 장애인이 그렇게 밝고 열심이니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활동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었습니다. 장애는 분명 약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장점이 장애라는 약점조차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장점과 자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을 생각하지 않고 단점만 생각합니다. 남이 가진 것은 커 보이고, 자기가 가진 것은 작아 보인다고 합니다. 남과 비교하여 자기에게 있는 것이 보이지 않고, 없는 것만 보입니다. 95%의 장점을 가진 사람이라도 5%의 약점만 생각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비록 5%의 장점을 가졌고 95%의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도 5%의 장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장점에 집중하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인생 역전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이 대부분 그런 사람입니다. 좋은 환경보다 나쁜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나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계발하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의 장점도 계발해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것이 성공의 우선 요소라면, 다른 사람의 장점을 계발하는 것은 성공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이론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장점을 잘 보고 잘 사용하면서도 남의 장점에 대해서는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단점만 보려고 하고,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는 불한당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장점을 사용하는 것 같으나 속은 장점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약점을 메우려고 남의 장점을 뺏으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긍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맡겨지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신의 장점을 사용하여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집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이 밝고 목소리가 씩씩합니다. 긍정적인 대화를 하며 만나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의 자세가 밝고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장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할 줄 압니다.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에 대해 가치를 부여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해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신감이라면 얼마든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만한 사람, 하나님께 겸손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모양이 어떨까요? 그들은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 업적을 자랑하지만 속내는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겸양지덕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보여 드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겸양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시고 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자녀들을 통해 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아름답게 성장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그러니까 자녀를 아름답게 키우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겸손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 사람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자녀들이 볼 수 있는 삶을 사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9.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시 143:10-11)
찬송 : 324장(예수 나를 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 하고 다 되는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연인이 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에게 어떤 것을 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기업가들은 어린이들에게 맛난 초콜릿을 먹이려고 공장을 세우고 초콜릿을 유통시킵니다. 명분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부모에게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코코아 생산농장에는 7살 된 아이가 하루에 1불도 안 되는 품값을 받으면서 노동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는 일에는 이면에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신 사람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의 평안과 안녕을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은혜를 베풀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착한 초콜릿이라는 상품이 생겼습니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코코아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고 만든 것입니다. 많은 임금을 지급받으면 아이들이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여 하신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옳은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의 뜻대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삶에 정리정돈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지침과 기준과 원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선한 영으로 공평한 땅에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선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심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심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이 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니 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니 선입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의와 공의가 편만한 곳, 사랑과 인자와 은혜가 있는 삶의 터전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충만한 삶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천국의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의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환란에서 건져내십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면 하나님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이 환란을 당할 때 건져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도 건져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우너하시고 구출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은혜가 충만하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고, 환란에서 건져내셨으므로 이제 우리 모두 올 한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0. 하나님, 감사뿐입니다(시 144:2)
찬송 : 341장(십자가를 내가 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던 1346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크레시라는 곳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한 적이 있었습니다.이 때 왕은 자기의 왕자 에드워드가 한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게 되면 그가 필요시 언제든지 자신이 친히 지휘하는 용맹한 군대를 투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전투가 시작되자 왕자는 자기가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부왕에게 사람을 보내 지원군의 도움을 청했습니다.그러나 부왕은 오지 않았습니다.젊은 왕자는 다시 전령을 보내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습니다.그러자 부왕은 전령에게 말했습니다.“자네는 가서 내 아들에게 전하라.나는 도움이 언제 필요한지 판단할 줄 모르는 경험없는 사령관이 아니요, 필요할 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정도의 어리석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우리 하나님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언제든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도움의 오른손을 펴실 것입니다.우리는 그를 신뢰하고 인생의 전쟁을 힘껏 싸워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요세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며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2011년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믿음 주셨음을 감사하는 한 해를 살아야 합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오늘날 내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여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인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로 통해 보내 주시기 까닭에 예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영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아버지처럼 믿어지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철석같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 놓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믿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 결과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받아서 믿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 주심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로를 세우고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전부요,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예수 잃고 하나님 떠나면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믿음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승리 주셨음을 감사하는 한 해를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에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쪽에서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은 키가 9척 같고 베틀채 같은 창을 들고 나와서 "누구든지 일대 일로 싸워서 이 싸움을 끝내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소년으로서 형들 셋이 전쟁에 나가 있었기 까닭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안부를 알려고 싸움터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며 하나님의 모욕하고 능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냥 보고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다윗은 격분하여 물매돌 다섯 개를 들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싸우러 나갈 그 때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골리앗과 싸움을 싸워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기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인정해 주심을 감사하는 한 해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달은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이 되시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이 더욱 확실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정을 맏는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궁극적으로 결로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지키시는 요새가 되시며, 인자하게 다가가시며 산성과 방패가 되십니다. 오직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형편속에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항상 그늘처럼 따라다닐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21. 날마다 믿음 체험(시 145:17-18)
찬송 : 301장(지금까지 지내온 것)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십니까? 많이 가진 사람,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혹은 직업이나 지식으로 좋아하십니까?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없고, 못생기고, 험한 일을 하고, 덜 배운 사람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건강한 사회는 좋아하는 사람의 기준이 다릅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을 좋아해 보십시오. 그것은 내 마음이 넉넉하다는 증거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참신한 발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해 보십시오. 나도 덩달아 참신해 집니다. 넉넉하고 참신함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지혜를 가지셨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그런 노래를 부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적인 민감성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의 노래를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의 행사가 내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모두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넉넉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넉넉한 은혜가 나옵니다. 넉넉한 사랑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스스로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사랑을 풍부하게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사람의 그것과 다릅니다. 사람의 의로움은 선과 악을 판단하여 선을 장려하고 악을 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움은 악한 자를 회개시키고 용서하시고자 하는 차원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셨습니다.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내게 은혜입니다.
둘째, 주의 행사가 모두에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선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가까이 함의 여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넉넉한 마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움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하나님은 중심을 바로 보인 사람, 마음을 숨기지 않고, 진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감싸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많아도 물리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셋째, 주의 오심이 내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의 무리에 속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 축에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움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셨고, 내게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셨습니다. 나의 진실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 곁에 두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품어 두셨습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있습니다(시 115:12).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나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행하셨습니다.
넷째, 주님이 간구하는 사람에게 가까이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할 특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권에 따라 우리는 기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가까이 하십니다. 그래서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의 사람, 간구의 사람, 축복의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올 한해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2. 젊은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잠 3:1-2)
찬송 : 573장(말씀에 순종하여)
부모들은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려고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어도 그것이 참다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현대인들은 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영혼을 개발하지 아니하고는 참다운 인격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교육하는 부보들과 자녀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알고 장수와 평강의 복을 무리는 2011년이 되는 비결을 아는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1. 사랑하는 자녀들은 먼저 지혜학교에 다니게 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다닌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다닌 학교가 바로 지혜학교입니다. 영적인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영성을 개발시켜 주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명철학교는 바로 교회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부모보다 먼저 사랑해야 할 분임을 어려서부터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을 일깨우는 교육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바로 영혼이 눈을 뜸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시기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다른 어떤 관념과 지식이 자리잡기 이전에 영성을 일깨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순수할 때 영성은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육은 정말로 조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머니가 잉태함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때를 놓치면 두꺼운 세상적인 지식과 관습의 껍데기가 생기면서 영혼은 좀처럼 그것을 뚫고 나오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가 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하나님의 집으로 그들을 늘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영적 교육은 가정에서 부모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기에 부모의 확고한 신앙적 지도와 끊임없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자녀들은 먼저 명철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명철학교는 바로 가정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도덕적 교육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라나시면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셨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셨다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도덕 교육이란 인간관계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인 교육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육이라면 도덕 교육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학교 교육이 도덕적 인간 형성을 위한 교육으로 바뀌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덕목들을 어려서부터 가르쳐 아이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한 생활을 힘쓰게 하며,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희생적이며 봉사적인 사람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하며, 불의와는 결코 손을 잡거나 타협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자녀들은 먼저 지식학교에 다녀야 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식은 대단히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타락하기 쉽고 그릇되기 쉽기 때문에 그 삶이 전체적으로 악하여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교육은 이 지식을 가르치는데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유대 격언에 "배고픈 자에게 생선 한 마리를 주는 대신에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지혜입니다. 삶의 원리를 살필 줄 아는 머리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결국 삶의 원리를 추구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귀착(歸着)되게 마련입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어떻게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가를 살피는 머리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지혜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근본으로 한 삶의 지혜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자녀가 되도록 양육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게 하며, 지혜를 가르쳐 인생의 길을 바르게 판단하여 가도록 하고, 그들의 모든 삶이 바르고 정직하게 살도록 하여 하나님께 사랑 받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도록 키워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부모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항상 기도하며 힘써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자녀들 위에 항상 같이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3.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법(잠언 3:3-4)
찬송 : 551장(오늘까지 복과 은혜)
어린 시절 부모님의 교훈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교훈을 끝까지 지킵니다. 인생살이의 어려운 시절에도 부모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부모님 말씀에 의해 자신을 지킵니다. 성공한 이후에 자신의 성공 원인을 부모님에게 돌립니다. 사람들은 부모님과 자녀를 모두 칭찬합니다. 혹은 어떤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한 뒤에 자신의 성공 요인은 선생님의 말씀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선생님과 제자를 모두 칭찬합니다.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면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혼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돈의 도움은 나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 선생님의 가르침, 선배의 인도 등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평생 지키면 성공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고 지켜야 할까요? 여기 그 지침이 있습니다. 우리 잠언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성공 지침을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떠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삶의 지침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생각의 기준이고 내용이고 범위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행동의 지침입니다. 말의 내용입니다. 이런 사람의 별명은 인자와 진리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손목에 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신 6:8). 그들은 축제 때에 이 명령을 지킵니다. 작은 두루마리 모형을 끈으로 묶어 손목에 매답니다. 성경이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사실은 성경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떠납니다. 교훈이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교훈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자와 진리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종이와 서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 판에도 쓰여져야 합니다. 종이에 새겨진 것은 지워질 수 있습니다. 서판에 새겨진 것도 파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판에 새기면 지워지거나 파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판에 새겨져야 합니다. 잠언은 특히 마음판에 새기라는 권고를 합니다(잠 3:3). 단순히 성경책 자체를 휴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담겨져야 합니다. 마음에 담겨지면 항상 휴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판에 새겨진 말씀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우리 마음을 바르게 움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 줍니다.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십시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귀중히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복되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은총과 존귀함을 받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합당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도 은총을 받습니다. 사람들로부터도 귀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귀중히 여김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사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를 삶의 지침과 친구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새기고 그 뜻대로 행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리 안에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지혜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은총과 존중을 받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표하고 계획하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형통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4.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자(잠언 3:5-6)
찬송 : 529장(온유한 주님의 음성)
거창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직업선택의 10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라.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바르고 아름답게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살아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진리는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자녀들의 가슴에 떨어지면 반드시 결실을 맺습니다. 진리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2011년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가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은 인간의 생각이나 고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암 9:3)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칙과 법칙 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사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2. 성령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롬 8:6에 보면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 나옵니다.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차는 좋은 엔진과 함께 좋은 브레이크도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인생일수록 그 인생을 컨트롤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면 과속하거나 큰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은혜와 사랑의 길로 인도함을 살게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사람의 달콤한 말보다 성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혼란한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사랑과 소망의 삶으로 전진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고 인도함을 받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 모든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절대로 필요한 믿음입니다. 우리 인생 길, 내가 걷는 것 같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지킴이 다 허사로다”(시 127:1)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인도함을 받아야 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멘.
125. 여호와를 공경하라(잠언 3:9-10)
찬송 : 338장(내 주를 가까이)
우리 신앙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열정과 사명과 비전과 은사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되는 일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대한 당연한 응답입니다.
오늘 잠언은 형식적으로는 솔로몬이 자기 아들에게 하는 지혜의 말입니다. 이 지혜의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지혜로운 행동과 말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잠언을 읽고 깨달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지혜롭게 하십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헤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자체가 곧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조 더 자세히 살펴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받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먹고 입고 거주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노력 이상으로 하나님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땅에 심겨진 식물,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 땅에서 뛰는 동물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필요한 것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스리며 그것들과 더불어서, 그것들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심을 깨닫게 하는 지혜, 그것들을 이용하며 더불어 사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처음 익은 열매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를 받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거둔 처음 열매를 우리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첫 직장에 들어가서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선물을 사 드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에게 빨간 내복을 사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다 못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첫 급여를 받으면 부모님께 선물을 사 드립니다. 왜 처음 급여를 갖고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첫 번째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처음 것을 드려야 합니다. 토지의 소산물 중 처음 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잠언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첫 월급을 받은 젊은이가 월급 전체를 하나님께 감사예물로 드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처음 것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것으로 공경하는 일을 우리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을 우리가 처음 거두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실 우리가 드리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다리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음에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본문에는 창고가 가득히 차고, 포도즙 틀에 포도주가 넘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가정에 더욱 더 이처럼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첫 열매로 공경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갚아주시며 풍성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6. 여호와의 지혜를 품으라(잠언 4:6-8).
찬송 : 204장(주의 말씀 듣고서)
성도는 지혜의 가치를 알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의 가치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미련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지혜의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거나 지혜의 가치를 모른다면 예수를 잘못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 지혜의 근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12:13)라고 하였고,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하였고,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도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주신다)"(고전12:8)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지 아닌지 살펴보려면 먼저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무엇에 역점을 두고 가정교육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돈을 버려서라도 지혜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는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만 많이 벌고 돈만 많이 벌어 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부모의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5:1)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라고 했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고 했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잠언서를 읽으면 수도 없이 쏟아지는 격언들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 인식의 출발이라는 점이며, 그리고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도 하나님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경외는 지혜와 지식의 출발이요, 전제요, 그리고 근본입니다.
2.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지혜는 판단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판단에는 절대적으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판단의 기준이 없는 사람이 있고, 가졌어도 잘못된 기준을 가진 자가 있고, 또는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각기 다른 두 개 또는 세 개의 기준을 가진 자가 있고, 그리고 바른 기준을 가진 자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은 자는 절대적 기준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바르게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옳은 것입니다. 지혜자는 사랑과 공의의 조화가 있고, 진리 문제를 동정 때문에 그르치지도 않고, 또한 진리 문제 때문에 사랑을 잃지도 않습니다. 원칙 없이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융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상관이 없이 너 좋고 나 좋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좋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너도 나도 좋게 하지 못하며 마지막에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하고 맙니다.
3. 지혜는 악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은 악은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교만, 뇌물, 방탕, 미혹, 무지, 우상숭배, 속이는 저울, 무고하게 재판하는 것, 이웃을 멸시하는 것, 사특한 마음과 입술, 불화, 불충성, 가난 자를 멸시하는 것, 다툼, 게으름, 돈을 사랑하는 것, 미움, 시기, 질투, 끝없는 복수심, 변덕, 일구이언, 정욕적인 삶 등은 모두 지혜가 아니라 미련입니다. 악을 위하여 사용되는 머리는 지혜가 아니라 꾀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도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착하다가 손해를 보면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부모들은 착한 일을 하다가 손해를 보는 자식에게 "그렇게 살면 세상을 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보가 된다"고 말합니다. 착한 일하다가 손해를 보면 칭찬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살수록 미련이 쌓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원망, 미움, 좌절, 후회를 남기면 미련한 삶을 산 것입니다. 살면서 지혜를 남겨야 합니다. 은혜, 충성, 찬송과 감사를 남기면 지혜로운 삶을 산 것입니다. 지혜를 남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27. 내게 찾아오는 지혜(잠 8:34-35)
찬송 : 438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춘추전국시대 때 공자(孔子)는 자기를 알아주는 군왕(郡王)을 찾아서 전국을 유람하였습니다. 한편 지혜를 배우려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자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각 나라에서 관리를 한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자는 당시에 정치가로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지혜는 수 천 년을 내려옵니다. 지금도 공자만을 생각하는 이가 있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며 썩은 전통을 개선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지혜가 수 천 년을 흘러 수많은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부분적인 진리라는 말입니다. 여기 완전한 진리가 있습니다.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완전합니다. 그 말씀은 이전에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었고, 오고 오는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그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혜를 찾고 받는 사람을 향해 복을 주십니다. 오늘 잠언의 본문에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을 사모함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를 함께 봅시다.
첫째, 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복됩니다. 완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지혜도 완전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왜곡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지혜를 찾으십시오. 지혜를 얻기 원하고 구하십시오. 지혜를 가지기를 기대하고 기다리십시오. 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복됩니다. 기다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문 앞에 서서 기다립니다. 오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환영하는 모양입니다.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 앞에 나가 서서 기다립니다. 문 앞에 선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먼저 보았듯이, 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먼저 얻습니다.
둘째, 지혜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지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도 가르쳐 줍니다. 생명을 얻도록 독려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근원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지혜와 생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오는 사람이 지혜를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생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막 10:17). 먼저 예수님께 와야 지혜도, 생명도 얻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듣는 것으로 지혜가 시작됩니다. 순종으로 지혜가 자랍니다. 생명을 얻음으로 지혜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지혜와 생명의 비밀이 있습니다.
셋째, 지혜를 얻는 사람은 은총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지혜를 찾는 사람, 지혜를 얻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가지기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으십니까? 지혜를 얻으십시오. 지혜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지혜를 가짐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얻으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얻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얻는 것이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지혜의 신입니다(신 34:9).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혜의 샘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지혜를 받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면 우리 인간은 교만가운데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그리고 그 아래 복종하고 순종하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올 한 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가정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로 인하여 복된 삶, 생명의 삶 그리고 은총의 삶이 충만히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8. 지혜와 명철의 근본(잠언 9:10-11)
찬송 : 366장(어두운 눈을 밝히사)
초대교회의 신앙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자랐고 한국교회 역시 가시밭길을 걸으며 성숙하게 되었습니다.바다의 풍랑은 바다에 산소를 공급하고 땅 위의 바람은 나무뿌리를 깊게 만듭니다. 고난을 헤쳐 나가는 용기,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는 것은 지혜로운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 33:16∼18은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서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는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우리가 운전을 할 때는 조심스럽게 운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운전한다고 해도, 나 자신이나 다른 운전자들의 어리석은 실수로부터 나를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보호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믿는 믿음은 여러 모로 복된 일이 많습니다. 주님이 평안을 주시니 복입니다. 평안의 길을 가게 하시니 복입니다. 지혜를 받으니 복입니다. 지혜의 길을 가게 하시니 복입니다. 평안과 지혜가 먼저 믿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 옆의 사람에게 전파되니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니 복입니다. 복을 복으로 아는 사람이 더 복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복,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을 발견하는 순간, 감격과 희열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확인하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넘칩니다. 이런 감격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은혜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 안에서 그 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1. 지혜의 근본이란 무엇입니까?
근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엽적인 문제만 안다면 적게 아는 것입니다. 편파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어떻게 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근원을 알면 전체를 아는 눈이 열립니다 전체를 아는 길이 보입니다. 믿음의 근원을 아십시오. 의사 누가도 믿음의 근원을 알려고 하다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근원은 믿음의 근원이요, 지혜의 근원입니다. 무엇입니까? 사물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입니까? 사람 위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지혜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의 샘을 주십니다. 믿음을 지혜의 근본으로 만드십니다.
2. 명철이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똑똑하고 싶습니다. 더 똑똑해지고 싶어합니다.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신비한 것도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사람의 지적 욕구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려고 한다고 다 알아지지 않습니다. 아는 것마다 다 유익이 되지도 않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피로한 일입니다(전 12:10).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근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근원으로부터 흐르는 길이 내게로 옵니다.
영적 원리이며, 영적 통로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통로이신 예수님을 알고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명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3. 복 받은 사람은 어떤 입니까?
지혜는 두루 두루 복이 됩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되다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복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적, 육적인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생명을 길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영원한 생명을 아울러 주십니다. 믿음은 생명의 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이 땅의 삶이 항상 고난이 아닙니다. 즐거움도 경험합니다. 믿음이 생명과 즐거움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와 명철이 있습니다. 그를 경외하는 삶, 그를 믿고 따르는 삶이 지혜자입니다. 복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자입니다. 하늘지혜로 승리하며 사는 축복의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9. 나눌수록 풍요로운 삶(잠 11:24-25)
찬송 : 303장(날 위하여 십자가의)
신앙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도우심의 은혜, 지혜의 은혜 등 셀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눕니다. 이것이 전도와 구제와 봉사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과 은혜와지헤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나눌 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튼 은혜를 주고 싶으셔서 은혜를 나누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잠언의 말씀을 통해 풍족하고 윤택하게 되는 축복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신 방법은 흩어 구제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축복의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초대교회 사람들은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자기들도 살기 어려운데 열심히 구제했습니다. 그 결과 전도의 열매도 많이 맺혀졌습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이었습니다. 봉사와 헌신의 삶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올 해 우리 가정에 이렇게 구제하고도 더 많이 축복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구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풍족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부자일수록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미덕으로 여긴답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과 나누면 그 소문이 사회에 퍼지고 사람들이 부자를 존경합니다. 부자가 이끄는 회사를 사랑해줍니다. 부자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소비합니다. 그러다보니 부자는 더 부자가 됩니다. 나누는데 부자가 되는 원리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나누는 부자는 하나님의 주신 말씀을 지킵니다. 말씀을 지키는 데 그것도 부자가 되고 싶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키고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더욱 풍족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나눔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원리입니다.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믿음의 사람들이 이처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나누고, 믿음의 사람들이 나누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나눔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한 사람이 윤택해집니다. 자기만을 위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습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씁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한편 어떤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 투자하기도 합니다. 직원들이 가정에 더 충실하고 지식과 지혜를 개발하도록 지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일을 더 잘합니다. 직원들에게 하는 내부 서비스를 통해 직원들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남은 윤택하게 하면 자기도 유택해지는 일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주면 자기도 지혜로워집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면 자기에게 은혜가 돌아옵니다. 남의 복지를 위해 힘쓰면 자신에게도 복지혜택이 돌아옵니다. 남을 더 소중히 여기지만 자기도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아들에게 지혜로운 삶을 가르칩니다. 남에게 베푸는 일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남에게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알고 계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람들의 사회도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베푸는 사람들을 알아주고 그들을 존중합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몇 십 년 동안 생선장수를 하면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모은 돈은 대학에 장학금으로 쾌척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할머니 때문에 젊은이들이 공부하여 나라를 위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도 윤택합니다. 외적으로 윤택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윤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풍족하고 윤택하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복은 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풍족하게 하시고 윤택하게 하시는 은혜가 올 한 해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0. 근심의 장애물을 넘어서(잠 14:26-27)
찬송 : 344장(믿음으로 가거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그림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해 코펜하겐은 늘 붐비게 되었습니다. 한 유명한 화가도 그 초상화를 보기 위해 코펜하겐을 방문했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그는 그림을 면밀히 조사해 보았으나 그림의 기법이나 색채감이 별로 특별하지도 않아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함께 온 친구에게 느낀 소감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여보게,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걸세. 그 그림은 마주 서서 보는 것이 아닐세, 어떻게 우리가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겠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시 보게. 그러면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될 걸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그 그림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동된 화가는 언제까지나 그 그림을 황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공통된 생각일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각기 자기의 갈 길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길을 바로 알아 택해야 합니다. 사람은 명철할 수도 있고, 슬기로울 수도 있고, 유식하고 빈틈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의 가고 있는 길을 잘못 알아서 생명을 잃어버리고 파멸될 수도 있습니다. 명철이나 능력을 진실로 가치있게 만들며, 미덕을 이루는 명철한 자의 지혜는, 생의 실제적인 지식이며, 사람으로 바른 길을 택하게 하고, 그것을 따르게 하는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참된 성공의 길을 택하는 지혜를 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잇습니다. 이 장애물을 넘어 성공하는 2011년이 비결은 무엇일까요?
1. 근심의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적, 기도의 원수는 근심입니다. 두 번째는 낙심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에 보면 낙심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로 의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욕심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장애물들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근심이 있겠습니까? 감사는 주 안에서의 만족입니다.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만족이 있으므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데 왜 낙심이 있겠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에게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내려왔다고 믿는 사람인데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사라지면 마귀의 시험이 끊이지 않습니다.
2. 믿음의 눈으로 현재를 넘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낙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고통은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어두운 밤이 다 가고 난 후의 새벽처럼 행복은 모든 고통을 이긴 사람에게만 찾아옵니다. 우리 인간은 실상을 보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현상은 터무니없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든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 지금 내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현상이 전혀 엉뚱한 것 같아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서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어 두었던 것이 뒤늦게 현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할 것입니다. 오늘 당장 엄청난 고난과 위기에 처해 있더라도 더 큰 고통과 불행함을 겪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3. 소망의 근심의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즐거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세상의 모든 고난은 기대 밖의 결과를 가져옴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근심하는 마음은 절대로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 가야하며,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하는지는 명철한 자의 지혜가 할 일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안전한 길이, 저 사람에게는 멸망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애가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바른 길, 참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안전한 참 길이십니다. 이런 소망의 눈으로 오늘의 고난을 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감동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아멘.
131. 뼈를 윤택케 하는 소리(잠 15:30-31)
찬송 : 311장(내 너를 위하여)
독일 격언에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이 잃어버리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건강은 신체와 정신과 영혼이 질병 없는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즉 건강은 몸과 마음과 생각과 영이 모두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건강은 전체적이어야 하고, 전인적이어야 합니다.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정서적 건강 그리고 영적 건강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건강의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인적 건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인적 건강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전인적으로 건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누가복음 2:52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므로 정신적으로 건강했습니다. 키가 자라므로 신체적으로 건강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시므로 사회적으로 건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므로 영적으로 건강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전인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는 여러 가지 건강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잠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건강의 모습들을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첫째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은 마음이 즐거워야 즐겁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아픈 것도 쉽게 낫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어려운 일도 잘 됩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즐거울까요? 그것은 눈이 밝아야 합니다. 눈이 밝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시력이 좋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남보다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보는 눈입니다. 남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아름답고 선한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흠과 치를 보기보다는 장점과 강점과 칭찬거리를 보는 눈입니다.
둘째, 신체적 건강입니다.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뼈가 윤택하다는 것은 신체적 건강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뼈가 약해집니다. 골다공증에 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작은 사고에도 쉽게 뼈가 부러지거나 뼈에 금이 갑니다. 그것 때문에 뼈에 좋은 철분 약을 먹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뼈가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좋은 기별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기별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가져오는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뼈가 건강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소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실제로 이 소식이 우리를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힘이 되고 에너지가 넘치게 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하십니까? 기쁜 소식을 들으십시오. 다른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기쁘고 복된 소식을 전하십시오.
셋째, 정신적 건강입니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보다 더 좋은 판단, 어려운 상황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판단입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자기 혼자 내리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들은 이후에 숙고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싶습니까? 우선 들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싶습니까?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잘못을 일깨우는 생명의 경계를 듣고 그에 따라 변화되는 삶이 있다면 그 지혜에 대하여 많이 창찬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니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믿음의 성도들과 교회에 전인적이고 균형잡힌 건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건강하고 영적으로도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고 선한 것을 볼 수 있는 눈, 아름다운 소식을 듣는 귀와 말하는 입,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복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에 올 해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2. 맡기면 됩니다(잠 16:1-3).
찬송 :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나의 살림과 하나님의 살림이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살림임을 알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나만의 삶을 가지고 내가 혼자 씨름을 하였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맡기기를 잘하면 평안과 행복이 찾아 오지지만 잘못 맡김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보기도 하고 큰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2011년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을 믿고 만사가 형통하는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무엇을 맡겨야 할까요?
우리 가운데 짐이 없으신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짐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맡기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성도가 있다면 오늘 주님 앞에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맡겨야 하는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평안도 빼앗아 가고 행복도 빼앗아 가고 생명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죄를 인간은 벗어버리려고 수없이 노력하였으나 인간 스스로는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처럼 죄는 끊임없이 인간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으므로 여호와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문제도 주님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직장도, 농사일도 사업도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결실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어떻게 맡겨야 할까요?
맡길 때에 바로 맡겨야지 잘못 맡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두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를 도와 줄 수 없는 것에게 맡기면 안 되고 능력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느 곳에도 인간의 모든 일을 맡 길만 한곳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모든 것을 맡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마 약속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맡길 수도 없지만 맡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 하시여 모든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맡기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못 하실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떠한 것도 감당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능력의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 할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맡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길을 만드신 하나님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맡겨야 합니다.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 감사하므로 맡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맡긴다는 말은 우리 하나님께 맡겨드린 것을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도 끝까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이 병이 들어 죽어갑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예수님 내 외동딸이 다 죽어가니 가셔서 딸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시고 그 집으로 가는데 집에서 기별이 오기를 예수님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딸이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겼으면 끝까지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겼음에도 오히려 야이로 처럼 상황이 더 어려워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자에게는 하늘 축복이 임합니다. 맡기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후회함이 없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맡기는 자에게 경영하는 일이 이루게 됨으로 주어진 것은 참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했을 때에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워했으나 주님께 맡기고 나니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이 찾아오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는 자에게 모든 문제가 해결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반듯이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우리가 맡겨드린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게 유익 되게 해결하여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133.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잠 16:9)
찬송 : 456장(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우리는 대부분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들의 성공과 성취를 보면 오랫동안 꾸준히 한 가지 일에 열정을 갖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일을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일을 성취합니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 뒤 단계별로 점검하고 한 단계씩 성장하다보니 어느 시점에서 급성장을 이루고 그 결과로 크고 놀라운 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막상 자기들을 놀라운 일을 성취하려는 데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열정을 갖고 꾸준히 하는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못한다고 생각하면 못합니다. 사실은 안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안 하려는 사람에게는 사실 뾰족한 처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계기,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힘을 얻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복음의 성취를 이루고 신학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할 수 있었던 것, 엄청난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잠언 본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성취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마음에 맞게 계획하는 일입니다. 모든 계획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에 빠지는 사람은 인생을 망칩니다. 땀이 없는 계획, 수고가 없는 계획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에도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에 맞는 계획입니다. 이는 내 생각보다 하나님 생각, 내 이익보다 하나님 이익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약 4:3).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 마음에 맞는 계획이라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 사람들에게 영적, 육적 유익을 주는 계획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는, 그 뜻에 맞게 실천하는 일입니다. 마음에 계획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머리속에만 담겨 있다면 청사진에 불과합니다. 청사진은 건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입 속에만 있으면 조감도에 불과합니다. 조감도는 건물이 아닙니다. 청사진과 조감도는 건물을 짓기 위한 계획입니다. 청사진과 조감도에 따라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짓는 일이 곧 실천입니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할 것인지, 일의 규모는 어떻게 늘려 가야 하는지 계획에 따른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도의 땀이 들어갑니다. 사람들과 공존하는 사랑의 땀도 들어갑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희생의 땀도 필요합니다. 더 큰 일을 이루기 위해 실수를 용납하는 용서의 땀도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성취하십니다. 우리의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졌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랑만 늘어놓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선교사역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구원과 사역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5:10). 우리의 일을 하나님이 성취하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계획하십시오. 하나님 뜻에 맞게 실천하십시오. 이는 내가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행 13:22). 최종적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다윗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그를 높이셨습니다. 그와 같은 영광이 오늘 우리의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성취와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 마음에 맞게 계획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실천하며, 하나님께 맡김으로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은혜가 올 한 해 이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4. 마음을 다스리는 자(잠 16:23-24)
찬송 : 492장(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도둑들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가면, 제일 먼저 그 집의 신발이 잘 정돈되었나, 그렇지 않은가를 살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발이 잘 정돈된 집은 내부의 질서가 잘 잡힌 집이라 훔칠 것도 없고 잡힐 우려도 많지만, 신발이 십중팔구 집안의 질서가 문란해서 물건을 훔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이 혼란하면, 자신의 마음을 악한 세력에게 도둑질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잘 정돈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리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어디서나 맡겨진 임무를 성실하게 잘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행복할 수 있고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 하나님의 걸작품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속이는 말에 틈을 내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십니다. 너는 존귀한 자라고. 그러므로 부디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며, 복과 즐거움이시라" 고백하는 존귀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존귀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 형통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본능을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본능을 지녔고, 그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며, 본능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본능이든 근본을 통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능을 인간 스스로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능은 넓게 주시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선택해서 좁은 길로, 내 본 능을 다스려 나가도록 했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믿음으로 성령의 감화로 우리의 본능을 다스려야 합니다.
본능을 잘 조절하고 바로 다스리면 그 다스리는 것만큼 그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본능을 잘 다스리고 선용해야 합니다.
2.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천성을 낳고, 천성 은 운명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되어지고 맙니다.
건강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환자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착실한 사람이 됩니다. 부자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거지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거지가 됩니다. 신사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탕자가 됩니다. 영웅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영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면 크리스천이 됩니다. 생각, 감정, 행동이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우리는 생각에 따라서 어떤 조건하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좋은 생각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3.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 4: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 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오늘 인간들은 물질을 잃어버릴까 피흘리며 지킵니다. 그러나 죽음이 오면, 천하에 얻은 것 다 버리고 갑니다. 권세도 빼앗아갑니다. 찬란한 명예도 빼앗깁니다. 모아둔 재산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명예와 물질, 권세 지위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생명은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생명이 마음에서 나오니 마음은 곧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그러면 어떻게 본능을 지키고, 생각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양심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다스리려면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려면,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복종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의 마음을 품 어서 여러분의 본능을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려가는 믿음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5. 다시 한번 말하노니...(전 12:13)
찬송 : 473장(괴로움과 고통을)
가끔 설교나 연설을 하시는 분들의 마지막 부분을 들어보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자면’, ‘결론을 맺자면...’,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씀은 전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모든 일의 결론은 하나님만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계시는지 솔로몬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그 결론처럼 2011년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이 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구름위에는 너무나도 고요한 모습으로 마치 솜 같은 모습의 구름들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전도서에서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물질 그리고 쾌락 성취욕 등과 같은 사람들과 관련된 일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그 이후에는 헛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도서 1장부터 10장까지를 요약한다면 전1:2 의 말씀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말하노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이 말씀은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일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다 진리가 아니며 바른 길이 아니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가 헛된 인생을 살기에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인생은 너무나 짧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내가 먼저 복음의 감격을 살아가는 보습을 보는 가족이 기쁘고 그 기쁨이 주변 사람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권력과 명예와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처럼 살아야 정상적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백성, 그런 백성에게 항상 크고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은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순종의 사람으로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26:5)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한 해를 살아야 할까를 말씀하신 후에.... "내 말을 명하심고, 잘 따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순종이요, 따르지 않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순종에는 상이 있고, 불순종에는 벌이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삼상15:22)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본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중요한 모든 것을 잠언과 전도서를 통해서 그렇게 자상하게 쓴 솔로몬이 이렇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였겠습니까?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하는 말씀처럼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어 사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축복도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떤 복이 약속되어 있을까요?
- 우리의 하루의 삶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이 있습니다.
- 수확하는 기간이 늘어나는 복이 있습니다. 열매를 따고 또 따는 복입니다.
- 배불리 먹는 복입니다. 먹을 걱정이 없다는 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 다시는 종살이하지 않는 복입니다. 고된 종살이, 혹독한 노역, 헐벗고 굶주림에서의 해방입니다.
- 평화를 누리는 복입니다.
- 창대해지는 복입니다.
이런 복이 2011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6. 열매 없는 포도원(사 5:1)
찬송 : 529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
하나님이 관리하는 포도원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농부로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포도원을 관리하였습니다. 심히 기름진 땅에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고 그 뿌리가 잘 착근 되도록 땅을 파고 돌을 제했으며 높은 망대를 세워 도둑의 침입을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가 열릴 줄 생각하고 술틀을 만들었고 들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튼튼한 울타리로 주위를 둘렀습니다. 이렇게 농부는 포도원을 위해서 관심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농부의 세심한 관리 속에 커 나가는 포도나무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매일 같이 행복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농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포도나무가 곧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도 만나와 생수를 주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몸을 입게 하시고 그 존귀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마치 큰 죄인처럼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2011년의 삶이 포도원 같아서 우리가 산 올 1년의 결실을 보시는 하나님께 미소와 기쁨을 드리는 한 해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포도원은 어떻게 세웠습니까?
포도원이 기름진 산에 세워졌습니다(1절).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세우실 때 아무데나 세우지 아니하시고 심히 기름진 땅 가나안에 세웠습니다. 포도원을 개간하고 극상품 포도를 심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를 심었도다.” 고 하였습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였다는 말은 개간을 했다는 말입니다. 유다 나라를 세울 때 하나님의 종들의 헌신적인 수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땅을 판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말입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생명나무인 진리를 심어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에도 말씀을 그렇게 심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포도원을 세운 목적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랬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고 했습니다. “돌을 제하고” 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을 제거하셨다는 의미이고 “그 중에 망대를 세웠다” 함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구현된 구약의 종교제도를 가리킵니다. “그 안에 술틀을 팠다” 는 것은 교회를 제정했다는 의미의 기도로써, 제단을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라는 문구에 뒤이어 “또한”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온 목적은 그 포도원이 건설되기까지 공력이 많이든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3. 포도원을 세운 결과
“들포도를 맺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좌절된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전 혀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열매가 없느니 만도 못한 나쁜 열매 곧 소돔의 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1) 들포도는 변질된 성질의 열매요, 접목된 가지에서 난 열매가 아 니라 들가지에 의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에서 나온 열매입니다.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곳에는 타락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2) 들포도는 신앙을 가장한 위선적인 관습입니다. 그것은 포도같이 보이지만 시거나 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커녕 진노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양육하시는데 많은 공력을 들이셨습니다(시 80:8-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기대에 어긋나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이는 들도를 맺은 것과 같습니다. 여기 이른 바 “들포도를 맺었다” 는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참포도나무가 들포도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은혜 입은 자들이 열매 맺지 못한 것을 책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좋은 포도만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이 좋은 포도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었는데 그만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3년이나 열매 맺기를 기다렸으나 열매가 없어서 찍어버리자고 하신 주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나라 교회를 책망하실까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7. 힘과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사 12:2-3)
찬송 :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일들이 생겨 좌절과 낙심과 절망에 부딪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나는 완전 파멸이다. 빨리 자살해서 깨끗이 세상을 떠나자" 라고 판단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때에 절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 모든 절망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201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우리의 힘이 되시고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시는 말씀 안으로 함께 영성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떠나 볼까 합니다.
1. 우리는 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실패와 역경에 부딪혀도 그 문제보다 그 절망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12장 2절에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로다"고 하신 말씀같이 어떤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든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도 연약하지만 하나님만을 굳세게 의지만 어떤 난관이나 절망적인 환경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위에서 홍수가 빙글빙글 돌며 무섭게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거기에 빠져들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소리치면서 "이봐, 위를 쳐다봐"(look up)하고 소리쳤습니다. 곧 위를 쳐다보고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문제만을 바라보지 말고 얼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지하고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2. 우리는 늘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축복하는 자에게 극심한 연단과 시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견디는 믿음이 없이는 좌절과 절망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얼마나 참고 견디나 보자.’하고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없이는 절망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다 끝장난 것 같아도 숨이 금방 넘어갈 것 같아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야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림과 인내하는 믿음이 없이는 절망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에머슨씨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은 남보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10분 더 참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인내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간절히 기도해야 절망의 벽을 뛰어 넘을 수가 있습니다. 참 믿음을 소유한 자는 열심히 기도하는 법입니다. 뜨겁게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부딪힐 때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하게 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네가 죽고 살지 못할 터이니 집을 정리하라"고 선포했을 했을 때 목숨 걸고 기도한 결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하면 그의 수한에 15년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면 기도에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의 기도를 하지 못하는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장대를 이용하면 넘지 못할 절망의 벽이 없습니다. 절망의 위기를 당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인내하며 사력을 다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과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우물가에서 날마다 성공의 생수, 지혜의 생수, 능력의 생수를 마실 수 있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물은 동네 여론의 집합소입니다. 우물에 둘러앉은 아낙네들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속상한 얘기며 축하할만한 소식들을 주고받는 곳이 우물입니다. 우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날마다 우물물은 퍼내야 맑고 깨끗합니다. 물을 퍼 쓰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이끼가 끼고 썩게 됩니다. 물은 흔들고 흘러야 생수가 되는 법입니다. 이 솟아나듯 기쁨이 샘솟게 되는 한 해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보다 더 큰 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고 능력자 되시어서 날마다 퍼내어도 새로운 생수가 샘솟는 샘처럼 우리에게 하늘 능력과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승리하는 한 해를 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38.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사 26:3-4)
찬송 : 294장(하나님은 외아들을)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환경이 어려워도, 실망하지 않고 자기 일을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반대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고 결국은 성공한 사람을 말합니다. 불신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대단한 정신력과 의지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자들은 어떠합니까? 신자의 의지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망을 삼는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지키신다는 약속을 믿고 믿음을 굳게 지키는 의지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내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흔들림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되지를 못해서 이럴까 저럴까, 내가 뭔가 잘못 산 거 같고, 난 아무래도 뭐,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부터 불안합니다. 내가 안정되고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내 가정도 내 이웃도 내 나라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도 마음을 평안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평안함 가운데서 창의적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사람으로 살아서 하나님만이 영원한 우리의 반석이심을 고백하는 2011년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복으로 응답하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아무 걱정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반대자의 위협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안은 언제나 가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가질 수 있는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평화의 근원입니다.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삿 6:25).
심지가 굳은 사람은 낙담할 상황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기드온이 낙담의 환경에서 하나님이 평화였음을 알았습니다. 미디안의 약탈과 위협이 난무하여도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키심 곧 평화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보다 더 차원이 높은 평화로 지키십니다.
2. 하나님은 의뢰하는 사람을 지켜 주십니다.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뿌리가 믿음에 든든히 내려져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내려져 있는데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질수록 믿음의 뿌리가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합니다. 사람을 믿으면 배신당할 수 있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는 결코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치유하실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3. 여호와는 반석이 되어 지켜 주십니다.
믿음의 심지가 깊다는 것은 믿음이 반석 위에 선 집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의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순종합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 흔들리지 않습니다.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습니다(마 7:25). ‘의지의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평안의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때가 있고,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세상의 것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으나 하나님께는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평강의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보십시오. 하나님을 반석으로 의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는 나 자신도 믿을 바가 못 되고 너도 믿을 바가 못 되나 내가 진정으로 믿을 바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죽으나 사나 "오직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뜻에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도 변함없이 심지가 견고한 자가 되어야 평강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139. 겸손한 연혼이 되렵니다(사 29:19).
찬송 : 552장(아침 해가 돋을 때)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 1859∼1941)은 『시간과 자유』라는 책에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비교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닫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열린 사람입니다. 닫힌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교제 없이 혼자 고독에 빠져 삽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힘만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늘 절망감과 두려움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응답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축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받습니다(대하 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시고(시 10:17), 겸손한 사람을 붙들어 주십니다(시 147:6).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잠 3:34), 지혜를 주십니다(잠 11:2).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존귀하게 됩니다(잠 15:33).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 납니다(사 29:19).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겸손한 영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겸손한 영혼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겸손하다’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낮아져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을 받습니다. 재물의 축복을 받습니다. 소유가 점점 많아집니다. 풍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영혼에게 하늘 복으로 갚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겸손한 영혼에게 존귀와 명예를 주십니다.
“겸손(謙遜)과 여호와를 경외(敬畏)함의 보응(報應)은 재물(財物)과 영광(榮光)과 생명(生命)이니라”(잠 22:4b) ‘영광’은 ‘명예의 축복’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게 됩니다.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축복하시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기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기 때문에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항상 배우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습니다. 늘 자신을 성장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영광과 존귀를 얻지만, 교만한 사람은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워서 한 민족의 지도자도 되게 만들어 주십니다. 모세는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출 4:10). 기드온도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삿 6:15). 다윗도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겸손한 영혼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광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겸손한 영혼에게 생명과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겸손(謙遜)과 여호와를 경외(敬畏)함의 보응(報應)은 재물(財物)과 영광(榮光)과 생명(生命)이니라”(잠 22:4c) 서 ‘생명’은 ‘건강의 축복’을 말합니다. 오래 사는 것, ‘장수의 축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병들어도 건강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번영하게 되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넓힐 수 있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개 병은 교만한 사람이 잘 걸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건강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병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고 치료하시고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 불신앙에 빠진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생명을 잃고 비참하게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잘난 사람도 건강하고 잘나야지 병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천하 미인도 병들면 겸손하게 됩니다. 잘났다고 큰 소리 치던 대장부도 중풍에 걸리면 겸손하게 됩니다. 질병 앞에서는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들지 않았어도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들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올 2011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겸손하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교만하게 사시겠습니까? 날마다 “주님, 오늘도 겸손한 영혼이 되렵니다.”라는 고백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40.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힘(사 40:31)
찬송 : 289장(주 예수님 내 맘에)
누군가를 앙망을 하려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움직여서, 그쪽으로 열심히 향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때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가 떠민다고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협박을 해도 억지로 앙망하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가 받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새 힘을 준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혹은 ‘재충전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힘은 무엇일까요? 2011년 우리는 그 힘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해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힘입니다.
한번 독수리가 올라가는 그 비상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독수리의 힘은 양 날개에 있습니다. 양 날개를 쫙 편 채 기류를 이용해서 유유히 날아가고, 때로는 날개 짓을 하며 힘차게 창공을 향해 솟아올라갑니다. 바람의 힘이 없으면 날아갈 수 없지만, 양 날개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양 날개를 쫙 펴고 기류를 타며 날아갑니다. 때로는 양 날개로 날갯짓을 하며 힘차게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 말씀과 기도는 양 날개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은 말씀의 날개mf 얻는 것입니다. 히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나니 ...”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성령의 능력이 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서 독수리 날개치는 힘을 얻어 누리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기도의 날개 짓을 해야 새 힘이 생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영적인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1세기 초대교회 시대는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때는 대박해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유대인의 박해, 로마 당국의 박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상황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말입니다. 외적으로는 힘들었지만 그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행1:13-14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직전에 기도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합니다. “더불어 마음이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바로 그때 성령이 강림했고 그들은 성령 충만해져서 밖으로 나가 복음을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러다가 체포당합니다. 그러나 풀려난 후 어떻게 합니까? 사실 붙잡혀 들어가서 혼나고 나면 더 무서운 법이데 행4:31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 이것이 바로 새 힘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기도함으로 능력 받고 또 나아가 복음을 증거 합니다.
3. 곤비치 않는 새 힘을 얻어야 승리합니다.
우리가 영혼 가운데 새 힘, 영적인 능력이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전혀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승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펼쳐집니다. 그 모습을 31절(하)에서 뭐라고 묘사합니까? “ ...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승리하다 말다 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걷는 것을 멈추는 순간 죽게 됩니다. 인생을 완주할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신앙생활이 날아다니거나 달음질할 수만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걸어 다니는 삶이 더 많을 것입니다. 솟구치던 삶이 한 순간 골짜기를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속도가 조금 느린 것 같고, 어쩌면 박진감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걸어갑니다. 신앙의 첫사랑으로 날아오르는 경험도 소중하고, 뒤이어 달리는 경험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계속해서 걷는 것입니다.
새 힘을 받으면 현실의 어려움을 넉넉히 극복하고 승리합니다. 환란을 이깁니다. 위로받고 인내하고 견뎌냅니다. 극복합니다. 문제를 해결합니다.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기적을 창출합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141. 두렵지 않습니다(사 41:10).
찬송 : 344장(믿음으로 가리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당장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하는데도 혼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게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도와주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고난이 와도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현대인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속임수입니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단은 계속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은 성공을 막는 적입니다. 오늘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안, 그리고 승리를 맛보는 비결을 아는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능력으로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 예수를 믿는 자, 하나님 약속을 믿는 자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다 두려워합니다. 사단이 주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큰 믿음, 강한 믿음, 굳건한 믿음,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로 두려움을 물리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얼마나 신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습니까? 예배가 산 예배가 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그랬습니다. 또 우리가 전도할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언제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사로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문제에 얽매여서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택한 백성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원수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쫓겨나가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우리를 굳세게 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굳세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시험도 주십니다. 환란도 통과하게 하십니다. 정금처럼 나오게 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바울이 말을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특징은 담대함입니다.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굳건한 믿음, 그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한해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42. 도우시는 하나님(사 41:13)
찬송 : 510장(하나님의 진리 등대)
인간은 창조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인생을 살아가기 힘이 듭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함 받은 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60억이라는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선택 된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 곧 찬란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늘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 되었기에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2011년에는 도우시는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는 어떻게 도우실까요?
1.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심으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백성들에게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항상 좋은 것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며,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사람들의 필요를 최상의 방법으로 공급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공급하고 예비하시기 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호하심으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곁에서 돕는 분이시며 보호자이시며 대변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희생시켜서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것도 멀리서 지켜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가까운 곳에서 우리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검은 머리 흰머리 만들 수 없으며, 흰머리 검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손길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들을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시지도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들을 보호할 뿐입니다.
3. 기적과 이적을 베풀tu서 도와주십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받으면서 홍해를 건너야 하는 기로에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힘든 상황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홍해 바다가 있고, 뒤로는 애굽의 군대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작은 것 하나라고 잃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성경에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적이나 이적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면 그것을 보기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병도 치료받고 문제도 해결 받으며, 먹을 것도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나 기적과 이적을 다른 이방인들보다 더욱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사람들은 기적과 이적을 원하지만, 기적 중에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기적 중에 기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아름답고 좋은 것을 주기 위한 하나의 계획입니다. 또한 섭리입니다. 우리들의 필요와 궁핍을 미리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143.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사 43:1)
찬송 : 354장(주를 앙모하는 자)
어떤 소년이 길에서 5천원짜리 돈을 주웠습니다. 그 소년은 너무나 기뻐 그 주은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날마다 길기에 덜어진 돈을 줍기 위해서 땅만 쳐다보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것이 생활이 되어 수많은 동전, 단추, 머리핀 그 외 자질구레한 것을 많이 주웠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아름다운 꽃이나 새와 나비를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 일생이 결국 쓰레기 줍는 일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보며 사는 사람은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기대와 꿈과 소망 가운데 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지명당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딸을 가슴에 품고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다. 너희는 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 딸이다, 내 자녀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각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랑을 더 이상 배반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우리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이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거하는 축복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쌓은 공적으로 구속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은혜로 구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당신의 백성삼아 주시고 구속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처럼 살아서 예비된 하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소유로 지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주님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우리를 지명했습니다. 지명했다는 것은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특별한 사랑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것과 같이, 우리들도 특별한 사랑과 목적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사랑과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것은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명하여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늘 우리가 찾아야 될 곳은 천국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면 부요함도, 건강도, 기쁨도 다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순서를 바꾸어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우리가 못 받고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하나님의 보화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도 있고 축복도 있습니다. 예수 안에 영광도 있고 부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예수 능력으로 공하는 인생을 살라고 지명하여 부름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존귀하고 보배로운 소유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속량물로 주고 이스라엘을 구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본래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는 죄 많은 인간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죄에서 구속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 낮고 천하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해주십니다. 영원토록 지켜주고 높여주고 그리고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것은 새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여기에서 '새 일'이란 여호와께서 바사왕 고레스를 통하여 B.C.539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선민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될 희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지명되어 불리움 받은 우리도 큰일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크게 쓰실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도 쓰셨지만 여러분과 저를 더 크게 쓰실 줄 믿고 지명된 감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44. 구원자 하나님(사 43:2-3)
찬송 : 216장(성자의 귀한 몸)
타이거 우즈는 세 살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 살 때부터 “골프를 잘 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부모는 한결같이 “연습”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우즈를 훈련시켰습니다. 골프 연습을 하는 우즈 옆에서 아버지는 온갖 방해를 합니다. 부스럭거리고, 움직이고, 걸어 다니고, 쿵쾅거리고.... 공을 치려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들립니다. “공을 치려거든 벼락이 쳐도 이쪽으로 눈을 돌리지 말아야지... " 골프가방을 넘어뜨려도, 곁에서 기침을 해도 아버지의 훈련방법을 안 우즈는 공만 바라보고 공을 쳤습니다. 훗날 우즈는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어떤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끓어오르는 화를 견뎌냈던 훈련이 나로 하여금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갖게 해 주었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이스라엘을 40년간 거친 광야에서 연단하시고 훈련하신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실패도 겪게 하시고, 고통도 겪게 하시고, 좌절도 맛보게 하시고, 슬픔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구원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고 구원받은 것 자체가 사랑과 은혜를 받는 증거입니다. 이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 은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고 삽니다.
1. 물에서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을 앞에 세우고 백성들이 뒤 따라 건넜습니다. 제사장이 강에 발을 내딛을 때 강물이 말랐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리고 강 한 가운데, 제사장이 섰던 곳에 돌 열두 개를 세워 기념물로 삼았습니다(수 3:5~4:8).
사람은 치수(治水)라는 명분으로 물의 세력을 막고 이용하려 하지만, 갑작스런 태풍과 홍수에는 속수무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물을 다스리십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넘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도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물 가운데서 구원받았습니다.
2. 불에서 구원하십니다.
물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불도 무섭습니다. 사람은 불도 다스리려다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용광로 불은 피우는 것은 사람이지만 용광로 안에서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불이 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상 선지자를 통해 불 가운데서도 구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불도 다스리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신앙을 지키려다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을 던지는 병사들이 불의 열기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불 가운데서 다치지 않았습니다. 세 명의 젊은이가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았고, 불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단 4:22~28). 하나님은 불에서도 구원하십니다.
3.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물에서 구원받은 것, 불에서 구원받은 것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런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구원의 사건은 과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그 구원을 위해 온 힘을 집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45. 노년의 축복(사 46:4)
찬송 : 585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인천 상륙작전을 이끈 미군 장군으로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남긴 존 맥아더 장군은 78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늙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노쇠하는 이유는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린 자는 마음의 주름살이 생길 것이다." 비록 나이는 늙었지만, 아름다운 노년기를 보내기 위해서 젊었을 때의 강건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4가지 요소를 “노년사고”(老年四苦)라고 합니다.
첫째가 병고(病苦)입니다. 노년이 되었다는 것은 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시기라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가 기력을 잃어가고 있고 온 몸이 예전 같지 않게 약해져 가는 시기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질병까지 찾아들면 그 고통은 견디기 힘듭니다. 병과 싸워 이기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강건함을 쉽게 잃어버립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는 건강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몸을 잘 관리해서 청지기로서 몸을 잘 돌봐야 노년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둘째가 빈고(貧苦)입니다. 나이 들어 빈손만 쥐고 살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집니다. 같은 가난이라도 노년의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갈 곳이 없는 노인들이 공원에 모여 앉아 있다가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마음의 부를 누리고 살아야 노년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셋째가 고독고(孤獨苦)입니다. 나이 들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자녀들이 떠납니다. 친구들도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외롭고 쓸쓸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그렇대 일수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영적인 교재를 나누면서 고독을 플어 가는 노년을 살아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넷째가 무위고(無爲苦)입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기나긴 시간을 아무 할 일이 없이 지낸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노년을 맞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특히 주를 위해 오늘도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꾸준히 그 일을 감당해가면서 살아가는 노년을 살아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리버풀 항구에 어떤 노인이 배를 타려고 부둣가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배가 떠나려 할 때 그 노인은 갑자기 다시 배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더니 부둣가에서 놀던 소년 하나에게 동전을 쥐어주면서 "애야 배가 떠날 때 날 위해서 손을 좀 흔들어줄 수 있겠니?" 그 노인의 고독감이 얼마나 깊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인생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고독한 길입니다. 그 고독한 길에서 우리를 아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따라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이런 놀라운 복을 예비하신 하나님 곁에만 머물면 우리는 비록 육체는 점점 젊음을 잃어간다 할지라도 마음은 “이팔청춘”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년기가 절망감과 실패감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행복을 창조하는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노년기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80세에 자기 민족을 이끄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안나는 84세에 기도를 통해서 삶의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약속했던 땅을 달라고 정복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사도요한은 90세에 환상을 받아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안고 복의 근원자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을 여는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모두가 우리 곁을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이 믿음만은 처음 사랑, 그래도 간직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위기 19: 32).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 31)
146.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은혜(사 48:9-10)
찬송 :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우리는 누구나 무슨 일을 하거나 계획하는 일들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부담한 노력을 하지만, 어떤 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고난의 풀무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풀무는 바로 바벨론의 포로생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48:4)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백설들의 완악한 마음을 녹이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은 고난의 풀무에 넣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이스라엘 성전은 다 무너지고 백성들은 70년 민족의 연단을 받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못된 고집을 꺽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교만과 못된 고집을 꺽기 위하여 때로는 우리들을 고난의 풀무 속으로 던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고난의 풀무에서 건지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2011년 비록 우리에게 고난의 풀무같은 어려움이 와도 말씀 안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배워 승리하는 한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고난의 풀무같은 어려움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인내로 견디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고통과 환란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맡겨진 일을 계속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잘 하다가도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던 일도 다 포기해 버리고 낙심하며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실 때 까지 굳건히 나아가야 합니다.
2. 요동치 않는 믿음으로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고통 속에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일군 디모데를 굳게 붙잡으라(살전 3:3)고 말합니다. 미국 타임지에서 근세기 미국 사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진 100명을 뽑았는데 그 중에 방송 토크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선택되었습니다. 그의 미국 사회에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그가 방송 토크쇼에서 책 한권을 소개하면 그 책은 즉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광우병 때문에 햄버거를 먹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을 하니까 바로 축산업계가 휘청거립니다. 이런 여성이지만 그의 과거는 1954년 미혼모에게서 출생해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조금 기르다가 아버지가 기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어린생활은 온통 상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았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기하고 묵상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남보다 더 아픈 고통은 나에게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3.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위해 인생들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test)하시기 위해,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는 ‘연단’을 위한 ‘도가니’, ‘풀무’, 즉 금을 걸러내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은 첫째, ‘낮추는 것’, 즉 겸손이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아래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또한 밤에는 추위로 말미암아 불기운이 없이는 몇 시간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시고,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할 것이요”(약5: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꺽으시기 위하여 고난의 풀무에 던짐을 믿고 기도로 승리하고 은혜를 받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47. 그 엄청난 것을...(사 49:8)
찬송 : 391장(오 놀라운 구세주)
이 세상에 ‘빈곤의 세상(The world of scarcity)’과 ‘풍요한 세상(The world of abundance)’이 공존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빈곤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풍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하나님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삶은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삶이고 대조적인 믿음과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상반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의 결과 역시 매우 다른 모양의 삶을 낳는다고 합니다. 곧 우리의 삶의 결과는 우리가 빈곤한 생을 사느냐, 부요한 생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빈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신앙과 태도에 늘 사랑이 없고 신뢰가 없으며 그들에게는 늘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세계는 안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가능한 것은 별로 없으며 인생은 고달픈 것이라고 여깁니다.
거기에 반하여 부요를 누리면서 풍요롭게 사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넘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때문입니다. 빈곤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의 삶은 공포와 걱정, 불안과 분노, 절망적인 생각 그리고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폭력, 죄책감과 수치감, 자기 연민과 질병에 의해서 지배됩니다. 이에 반하여, 풍요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의 삶은 발견, 모험, 놀라움, 흥분, 정열, 감사, 완성, 기쁨 등으로 가득찬 순례와 여정, 또는 모험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모든 순간을 풍요로 응답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고 성취하고 이룬 후에는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요로운 선물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다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은혜의 때가 이르렀다는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 구원의 날에 우리를 돕겠다는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 장차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 황무한 땅이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십니다.
- 이룬 엄청난 기업을 자자손손 기업으로 상속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엄청난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올 해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엄청난 것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런 엄청난 복을 주실까요?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한 저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존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 하에서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의 초대 교회의 최초의 목사님 중에 길선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병이 들어 누워 계실 때 사람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 문병간 사람들 앞에서 길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손해볼 걸 ···” - 하나님 보실 때 존귀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지만, 영국의 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Livingston이 아프리카에서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답니다. 이 때 Livingston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는 인식을 늘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귀찮다”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하기 싫다”라는 의미로 쓰지만 사실 이 말은 이보다 좀 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이 “귀찮다”라는 말은 “귀하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하나님께 귀챦은 존재로 추락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귀찮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한 자로 여기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복을 받은 우리도 존귀한 자존심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48.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사 49:15)
찬송 : 563장(예수 사랑하심은)
어떤 사람이 마술사로부터 지우개 하나를 받았습니다. 마술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이 지우개로는 딱 한 가지만 빼고는 어떠한 것도 다 지울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우개를 가지고 세계의 높은 사람들의 얼굴과 말씀이 가득실린 신문을 지워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 말끔히 지워졌습니다. 그는 신이 났습니다. 그림책도 지우고, 사진첩도 지웠습니다. 시도 지우고, 소설 도 지웠습니다. 그는 아예 사전을 지워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다른 것은 다 지워지는데 한 단어만이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문지르고 문지르다 마침내 지우개가 다 닳아 지고 말았습니다. 그와 그 지우개가 끝내 지우지 못한 단어는 바로 "사랑" 이었습니다.
이 지우개는 시간을 뜻합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 세상 의 모든 것은 낡아지는데 오직 사랑만이 낡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성자라고 불렸던 슈바이쳐가 말하기를 "사랑은 인간이 지금 여기서 그 참된 본질을 소유할 수 있는 영원한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12절 가운데서 열쇠가 되는 말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입니다. 사랑은 결단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낡아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떨어지는데 사랑은 그렇게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으며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은 오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에 사랑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그 사랑에 의해 이 세상이 움직여지며,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구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삶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바로 모든 삶의 원리요,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경륜의 핵심 축입니다. 이 사랑이 빠져 버리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모 든 삶과 이 세계는 끝장이 나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변덕이 심한 분이라고 한다면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은사에 매어달려 그것만을 추구하고 자랑할 때 그런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이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에 은사보다는 사랑을 추구할 것을 요청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때입니다. 따라서 예언도 필요하고 지식도 있어야 하고 방언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면 이런 것들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어 버리는 것들 입니다. 온전한 계시가 오면 그것을 준비하던 단계에서 필요했던 예언이나 지식이나 방언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것"이란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완성된 계시 즉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입니다. 더 이상의 다른 계시나 묵시나 환상이나 예언이나 꿈이 필요치 않습니다. 더더욱 방언은 필요치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성된 말씀 인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계시가 더 필요치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 아이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성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옛날 거울로 보는 것처럼 계시가 희미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맛대로 보는 것처럼 분명한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지만 그를 만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 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보살피듯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죄악은 하나님은 잊게하는 망각제입니다. 속히 회개하여 잊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품에서 승리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49. 내 어찌 너를 잊으랴(사 49:16-17)
찬송 : 271장(나와 같은 죄인 위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알아주면 기분이 좋고 신바람이 나지만, 아무도 내 이름을 알아주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자기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구는 자기가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간 특유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뿐만이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때 서운해 합니다. 자식들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의 생일에 가지는 못할지언정 전화 한 통화 하지 않고 지나치면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순간마다 기억하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억하신다면 우리도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간다면 하늘 능력이 의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만사형통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늘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가 그 자식의 이름을 손바닥에 문신으로 새기는 고대의 관습을 인용한 묘사입니다. 즉 고대 중동사회에서 행해진 관습의 하나로서, 어머니들이 멀리 떠난 아들을 늘 기억하기 위해서 자기 손바닥에 아들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놓고 아들의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이름을 쳐다보는 풍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몸에다 문신을 새긴다는 것은 아주 큰 고통입니다. 생살에 바늘로 한번만 찔러도 아플텐데, 수없이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는 고통을 참아낼 때 마침내 문신은 새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 아들을 잊을 수가 없기에 그 고통을 참아가며 손바닥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넣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손을 가지신 분은 아닙니다만,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두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요 10:28-29에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 영생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우리들의 구원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버리지 않습니다.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하여 시선을 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무관심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너를 지키는 성벽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불러올리신 하나님께서 올 한 해를 살아가는 우리도 모진 고난과 병마와 실패의 늪에서 구하여 거룩한 땅, 곧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행복한 가정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나봐, 하나님이 나를 버렸나봐”라고 생각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고난과 시련과 역경의 세월이 우리를 괴롭혀도 우리에게 더 많은 기도와 겸손으로 이겨내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기회라고 믿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경우도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잊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않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장중에, 그 크신 사랑과 권능손바닥에 새겨진 그가 바로 나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믿음만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를 영원히 사랑하시고, 피곤한 세상길을 인도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한해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50. 깨우치시는 하나님(사 50:4)
찬송 : 251장(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여러 가지를 주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기다리시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과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영광과 기쁨들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는 축복된 시간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문제는 기도하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기도를 끝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씀하실 시간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으로 정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깨우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잘 붙들면 비젼이 보입니다. 2011년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형통의 은혜를 받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일을 깨우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의 눈이 닫혀 있고, 영적 귀가 막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마 13:14). 신앙인은 불신자보다 영적 감각이 앞서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 감각이 앞서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리고 기대하십시오.
1. 하나님이 나의 혀를 사용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잘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질문하면 됩니다. 대답을 요구하면 됩니다. 또박또박 정확히 대답하면 잘 알아들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듣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혀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혀를 학자의 혀처럼 사용하여 괴로운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학자란 먼저 깨닫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역시 먼저 깨닫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백성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알고 싶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시면(눅 12:12) 그렇게 됩니다. 학자의 혀를 가지고, 염려하는 백성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2. 귀를 통해 깨우쳐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깨우치려면 자신이 먼저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귀로 들어야 합니다. 듣지 못한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귀로 듣지 못한 것도 마음의 귀로 들으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를 깨우치십니다. 어느 날 단 한번 깨우치는 것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매일 깨우치십니다. 선지자는 아침마다 깨우치기를 원합니다. 한 번도 아닌 매일 아침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아침에 주님을 만난다면 아침마다 깨우칠 수 있습니다(시 88:13). 매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에 머문다면 곧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과 성품을 배우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것은 영적 지식입니다. 영적 지식은 우리의 영성을 형성합니다. 영적 성품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사역을 결정합니다. 인생이 결정됩니다.
3. 깨우침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보고나 듣거나 읽고 다 깨우칠 때 해당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루하루의 그리스도인의 삶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운명은, 아니 더 나아가 이 우주의 운명은 누가 쥐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을 받는 사람은 깨우침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합니까?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십시오. 여러분의 명석한 머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새벽마다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른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전에 나갔던 그 때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렇게 고백했던, 이사야처럼 우리도 말씀을 깨우쳐 행하는 복을 주시기를 간구하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