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미가

누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가!

nam씨 2020. 1. 25. 14:06



미가서 강해 (11)

- 누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가!



미가서 7:8-20

미가서 6장 후반부와 7장 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큰 어려움에 빠진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7:7에서는 예언자가 나의 구원자 여호와를 기다리고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미가서 7장 후반부의 내용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찬양입니다. 먼저는 어둠과 같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것을 놓고서 원수들을 조롱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고(7:8-10), 이어서 이방인들도 시온으로 올라올 것(7:11-13), 예언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7:14-17), 그리고 누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가?’ 하면서 찬송하는 내용(7:18-20) 등이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 뿐 아니라 이방인도 심판하, 동시에 인자함을 사랑하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 후반부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1. 하나님의 의를 찬송함 (7:8-10)

1) 징계와 고백

 

8 나의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여호와께서 나에게 빛이 되신다.

9 내가 그분께 죄를 지었으니 그분이 나의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 나를 위하여 공의를 행하실 때까지 내가 여호와의 진노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분이 나를 빛으로 이끌어 내시리니 내가 그분의 의로움을 볼 것이다.

 

8-9절에서는 로 표현되는 사람이 말을 합니다. 7절에서는 그것이 예언자 미가였는데, 여기에서는 미가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특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가 다시 구원을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전에는 원수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는 원수를 조롱할 수 있는 위치에 놓 자들, 18절에서 말하는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후에, 자기들을 조롱하였던 원수들을 향하여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하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라는 단수로 표현하다가 17절부터는 우리라는 복수로 표현하기 때문에 를 어느 개인에게만 한정시켜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단수형이 복수형으로 바뀌면서 구원의 이미지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점에 주목하면 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을 때에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을 시켜서 그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성벽과 성전도 더 헐게 하시고 수풀처럼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위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하여야 마땅하지만,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이방 나라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놓고서 기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기뻐한다 것은 그들의 종교 의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예루살렘의 신보다 더 강하고 크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를 얻게 해주었다고 생각하고서 거대한 승전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큰 슬픔입니다.

그러한 때에 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바라보고서 위로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았어도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빛이 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앉았다라는 말은 첫째는 성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항상 하나님의 성전이 그들 가운데 있고 그 성전에는 쉐키나의 영광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동편 문을 통하여 성전에서 떠났습니다(10:18-19; 11:22-23). 따라서 둘째로, 그들이 어둠에 있다는 것은 포로 생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사야 9:2에서는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한 갈릴리 지역 사람들을 가리켜 흑암에 행하던 백성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참조. 42:7, 16; 49:9). 예언자 미가나 이사야가 포로 생활을 가리켜 흑암에 사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레위기 26:16이나 신명기 28:28-34과 같은 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어둠에 거하게 되고 소경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자신들이 비록 지금 넘어졌고 또한 흑암 속에 거하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그러한 징계 후에는 빛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소망하고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시기를 잘 이기고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사람은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그분께 지를 지었으니 그분이 나의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 나를 위하여 공의를 행하실 때까지 내가 여호와의 진노를 짊어져야 할 것이다하고 담담히 고백합니다. 자기가 여호와께 를 지은 것을 아무런 변명이 없이 고백하고, 그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대로 담당하겠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누르시면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조건 기다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시고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행하여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다 끝날 때에는 조롱하던 원수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그분의 의로움이고 그것이 곧 자기의 구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둠 가운데 있으면 걸려 넘어져도 왜 걸려 넘어졌는지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어둠 속에서도 이미 빛이 되신 하나님을 뵙고 그분께만 소망을 두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순하게 받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가인의 모습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여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하고 심판을 선언하셨을 때에조차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4:13-14) 하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순하게 받기보다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그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성을 쌓고 거기에서 스스로 안전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낮게 된 자리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때까지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려움은 하나님께만 호소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거나 동정을 얻으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10-13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가르치, 비록 그러한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2) 여호와의 의 : 심판과 구원 (10)

 

10 나의 원수가 그것을 보고 수치로 덮일 것이다. 그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있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던 자이다. 나의 두 눈이 그의 몰락을 보리니 이제 그는 길거리의 진흙처럼 밟힐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인내한 사람은 여호와의 의를 봅니다. 여호와의 의를 본다는 것은 개인적인 느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나타내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수치로 덮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수치로 덮인다는 것도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의 신들을 높였던 그들이 길거리 진흙처럼 밟히는 것이 바로 그들이 당할 수치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친 백성조차 언약을 어길 때에는 이방 나라를 사용하여 징계하시는데, 마치 도끼가 도끼를 든 사람에게 대하여 교만한 말을 하듯이 너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있느냐?’ 하고 교만하게 말한 이방 나라들은 반드시 몰락하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참조. 10:5-19).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이 같은 것을 면서도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보면서 찬송하지만, 원수는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보고 수치를 당합니다. 한 가지 사실을 보면서 두 가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의가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원수에게는 심판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곧 구원이 됩니다(참조. 46:13). 의로운 하나님에게서 징계를 받은 참 이스라엘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잠잠히 참아 기다렸고, 주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의 회복과 세상의 심판 (11-13)

 

11 너의 성벽을 쌓는 날, 그날은 너의 국경이 넓혀지는 때이다.

12 그날에 앗수르와 이집트의 성읍들에서부터,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 사람들이 너에게 나아올 것이다.

13 그 땅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의 행위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

 

1) 예루살렘의 재건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의를 뵙는 날에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그날에는 성벽도 다시 쌓고 국경도 넓혀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될 때에는 성벽이 모두 파괴되어 예루살렘은 그저 돌무더기처럼 되었고 수풀만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시온의 성을 다시 쌓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됨과 동시에 이스라엘 국경 넓혀집니다. 수르와 이집트의 성읍들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라고 하면, 서쪽의 지중해에서 동쪽의 페르시아 만까지, 이 산에서 저 산이라고 하면 남쪽의 시내 산에서 북쪽의 레바논 산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이 시온에 올라오는 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시온으로 몰려오고, 예루살렘의 국경이 모든 나라들을 포함할 정도로 넓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복을 온 세상에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 언약의 말씀대로 땅의 모든 족속들이 시온의 복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2) 성안과 성밖 : 생명과 사망 (13)

13절의 그 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행위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일 땅을 가리키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예루살렘도 회복되고 국경도 넓혀지기 때문에, 13절에서 말하는 땅이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시는 시온의 밖에 있는 땅, 곧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 안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빛과 생명이 있지만, 성 밖에는 어둠과 사망과 황폐함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시온 성 안에 있는 자들은 구원을 얻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동시에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읽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20:15)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것 또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21:2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와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다 성 밖에 있으리라. (22:15)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예루살렘 안에 들어오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행음하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성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 밖에 있는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영원한 지옥 불에서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가 예언자에게서 그렇게 예언된 것이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들에서 아주 생생하게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예언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7:14-17)

1) 예언자의 기도

 

14 주님의 백성 곧 수풀 속에 [갈멜에서] 홀로 거하는 주님의 소유인 양 떼를 주님의 막대기로 목양해 주십시오. 오랜 옛날처럼 그들을 바산과 길르앗에서 목양해 주십시오.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고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은 주께서 주님의 소유인 양 떼를 친히 목양하여 주시기를 구니다. 많은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에 들게 되는데, 그들을 모두 주님의 소유로 삼아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이지만, 그들은 이전의 표현을 사용하여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수풀 속에 홀로 거하는 주님의 소유인 양 떼라고 하였는데, 개역에서는 수풀을 지명인 갈멜로 옮겼습니다. 그 단어가 지명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12에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수풀’(갈멜)로 변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러한 수풀에 버려진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산과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고산 지역으로서 매우 비옥한 땅입니다. 이곳은 기원전 734년에 디그랏빌레셀 3세에게 빼앗긴 곳인데(왕하 15:29), 그들은 그곳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물과 풀이 넉넉한 그곳에서 주님의 백성을 다시 목양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회복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여러 번 가르친 내용입니다(2:12; 4:6-8; 5:4). 미가서 5:4에서는 장차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와서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러한 교훈을 놓고서 여호와께 목자로서 자기들을 목양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시면 그들에게는 생명과 안전함이 보장될 것입니다(23. 참조. 34:13, 23).

 

2) 하나님의 응답과 성도의 기도

 

15 “네가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내가 그에게 기이한 일을 보일 것이다.”

16 열방들이 보고서, 그들의 모든 힘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게 하십시오. 손으로 입을 막게 하시고 그들의 귀는 귀머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17 그들은 뱀처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처럼 티끌을 핥을 것이고, 떨면서 자기 굴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나아오고, 무서워하면서 주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실 때에 과거 출애굽의 구원을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도 바로의 세력을 꺾고 기이한 일곧 큰 구원을 베푸신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큰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한 약속에 힘입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주께서 열방을 완전히 멸망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자기 힘과 세력을 자랑하던 열방이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을 보고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손으로 입을 막고 귀가 막히게 되기를 구하였습니다. 너무 크고 두려운 소식을 듣고서 귀가 멍멍해지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고, 두려워 떨면서 자기의 굴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경외케 하기를 구하였습니다. 뱀처럼 티끌을 핥는다는 말은 티끌을 핥아서 티끌처럼 된다, 곧 죽어서 티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뱀이 흙을 먹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뱀이 죽음을 향하여 살다가 완전히 멸절될 것이라는 뜻으로 하신 것입니다(3:14). 따라서 이것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실 것에 대한 약속이 됩니다. 미가 예언자가 여기에서 창세기 3장의 그 복음을 인용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세력들을 완전히 멸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확신하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방 나라의 배후에 그 악한 자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권능으로 그러한 세력을 모두 멸절시키시고 온전한 평화를 가져오실 나라를 바라면서 그는 창세기의 약속을 인용하였습니다.

 

4. 영원한 찬송: 누가 우리 하나님과 같은가? (7:18-20)

 

18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자기 소유의 남은 자들,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 반역죄를 눈감아 주시고, 자기의 분노를 언제까지나 품지 않으니 그분은 인자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실 것입니다.

20 옛적에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고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1)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앞부분에서 우리는 이방 세력을 완전히 멸절시키시기를 구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8-19절에서는 그것보다 더 큰 원수인 죄악을 없애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말이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는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우선 이 말은 앞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세력을 완전히 멸절시키신 사실을 놓고서 하나님의 백성 찬송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의 세력을 멸절시키실 뿐 아니라 그들을 시온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시온은 모든 산들 위에 높이 솟아날 것이고, 그 안에 있는 자는 구원과 평안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는 수사적인 질문은 또한 그 다음에 나오는 말과도 연결이 됩니다.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일곱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죄악을 용서하시고, (2) 반역죄를 눈감아 주시, (3)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4) 인자함을 사랑하시, (5) 긍휼을 베푸시고, (6) 죄악을 발로 밟으시, (7) 우리의 죄를 바다에 던지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우리의 죄를 일곱 번이나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는 분을 생각하면서 누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겠습니까?” 하고 찬송합니다.

이 찬송은 모세가 출애굽 한 다음에 불렀던 찬송과 비슷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미가서 7:19에서는 그 표현을 받아서 우리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하고 말합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찬송에는 15:11에서 이러한 표현도 나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미가 예언자는 주와 같은 신이 누구니이까?” 하면서 출애굽의 구원을 놓고서 이 말을 사용하였지만, 미가서의 문맥에서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하면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가 예언자는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인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하면서 주님과 같은 분이 없다고 찬송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더 풍성해졌음을 이러한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일곱 번 용서하심

우리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둔감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남은 자들의 죄악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방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은 죄악을 없애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온으로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안에 죄가 있으면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언자가 씨름하는 문제, 포로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이 씨름하는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일곱 가지의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들어낸다’(나사)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53:12). 속죄일에 아사셀 염소가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무인지경에 보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16:22; 1:29).

둘째, 우리의 반역죄를 눈감아 주시고 그냥 지나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의의 원칙을 굽이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의 죗값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영원히 품지는 않으십니다. 그 진노를 사랑하시는 아드님에게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분은 인자함을 사랑하여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다섯째, 그분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품어 주듯이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103:13; 49:15).

여섯째, 죄를 발로 밟으십니다. , 완전히 정복하실 것입니다.

일곱째,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사실 세상의 신 가운데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바르게 용서하는 신은 없습니다. 세상의 신들은 대체로 사람의 행복을 위하거나 액운을 막아 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여 주십니다. 여기에서 미가 예언자는 출애굽의 본뜻이 더 잘 이루어질 것을 바라면서 세상에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여호와와 같으신 분입니까?” 이러한 찬송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3) 언약을 지키심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언약을 맺으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아브라함과도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이러한 구원을 베푸셨고, 또한 장차 땅의 모든 족속이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미가 예언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인애하심, 곧 언약을 지키시는 그 사랑에 자신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4. 우리의 찬송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 그는 식민지로 곧 잡혀갈 나라의 백성이고, 거기 예루살렘에 사는 중산층도 아니며 그저 모레셋이라는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다 듣고 따랐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가 예언자 시대에 힘을 자랑하던 앗수르나 바벨론은 다 하나님께 밟혀 이 세상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미가 예언자는 묻혀 있는 자였고 찾아볼 수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언대로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미가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의 세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힘과 권력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지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는 묻혀 있습니다. 미가 예언자 당시에 그의 존재감은 거의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세계에 가면 크게 보이는 것이 앗수르이고 바벨론이었으며 혹은 예루살렘의 세력가들이었지, 미가 예언자는 크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랑하고, 이 사회에 와서 보면 금방 눈에 띄는 것은 여러 가지 세력을 잡은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지켜 가는 교회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묻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가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분은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씨이고 그의 근원은 상고에까지 미치는 영원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자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루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미가 예언자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언약을 능력 있고 찬연하게 이루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때보다도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훨씬 거룩하고 신령하게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남아 있는 일이 있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밟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몸을 주셔서 의가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함께 살게 하실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취해서 웃는 자들은 그날에는 크게 통곡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고 가족과 교회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또한 하나님께 신원하는 자에게는 그날에 큰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시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바라보아야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친히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가서 마지막 부분에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남은 자인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일곱 번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확신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심판하는 일에 있어서도 누가 하나님과 같을까? 하나님과 같이 엄위로우신 분이 과연 누가 있을까이러한 찬송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죄를 밟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누가 여호와와 같을까?” 그러한 찬송을 우리는 주님께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첨부파일 미가서 강설- 김헌수-(11)-20190311 교정반영.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