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복이 되는 선택 수24:14~18, 막2:13-17
영원히 복이 되는 선택 수24:14~18, 막2:13-17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키엘케고올은 겨울의 세찬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남쪽 끝으로 떠나가는 오리 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 그 오리 떼들은 어느 농장 마당에 기숙하면서, 곡식들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게 됩니다. 그 다음날 아침 오리 떼들은 날아갑니다. 그런데 그중 큰오리 한 마리는 "이 곡식알들이 참 좋다. 그러니 나는 여기 남아 좀 더 먹고 떠나야겠다."고 하면서 뒤쳐졌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오리는 하루만 더 있기로 하고, 그 다음 날도 여전히 그냥 남아 있으면서, 그 맛있는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오리는 하나의 습관처럼 뇌까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일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겠다."
그러는 동안 겨울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와서 더 이상 지체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오리는 이제 그의 날개를 펴서 농장마당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뿔사! 그 오리는 너무 살이 쪄 있어서 날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오리는 너무 지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바른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고, 그 결단을 미루거나 결단을 하지 않았을 때 오는 피해와 아픔, 후회와 뒤 늦은 탄식은 아무 소용도, 더 이상 소망도 없게 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영원히 복이 되는 결단”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영원히 복이 되는 결단은,
1.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결단입니다.
신약 본문 막2:13~14에 :“예수께서는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자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만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께서 레위에게 말씀하시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라는 사람을 만나셨고,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파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마치 민족의 반역자, 돈을 위해서라며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보시자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는 주님의 부름을 듣고 주저 없이 즉시 따랐고, 주님을 위해서 잔치까지 했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는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눅5:27-28) 레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메시야의 직접적인 부르심은 놀라운 영광입니다. 레위는 이 영광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에게는 이제 더 이 세상에서 바라볼 소망이 없었습니다. 레위는 그와 그의 온 가정을 위한 직장도 그리스도를 좇는 일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주님의 한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좇으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좇은 것입니다.
레위는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레위가 만약 이때 다른 핑계를 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늦췄더라면 그에게는 주님의 사도가 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받을만한 때를 잘 알아서 결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고후6:2)
예수께서는 레위의 현제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세리이고 돈과 권력을 좇아 산 사람이지만 그가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위대한 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도 현재의 그 실망스런 모습 보다 그들이 장차 주와 복음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충성을 하다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를 내다보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미래의 사역을 내다보시면서 ‘이는 이방인을 위해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 하시며 그가 장차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스런 장래의 모습을 보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는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추수할 일꾼들이 심히 적은 것입니다(눅10:2). 우리는 일꾼을 찾으시는 주님 앞에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해야 하고, 또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과 성령님의 감동을 받고 결단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장래의 영광이 따르게 됩니다. 레위는 주저 없이 주님의 부름에 결단하고 따랐을 때 그는 새 이름으로 주신 ‘마태’(여호와의 선물)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사랑받는 열두제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 마태"라고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직업을 숨기지 아니하고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온전한 변화를 자신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순절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후일에는 마태복음 서를 기록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다윗왕의 줄기를 따라 세상에 오신 만왕의 왕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지금도 일꾼을 찾으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따름으로 영광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전심으로 주님만을 경외하기로 다짐하는 결단입니다.
구약 본문 수24:15-16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이방 신 사이에 머뭇거리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든지, 세상 적으로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와 일들로 인하여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 발을 걸치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망설이며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이중생활을 할 것인가? 이제 전심으로 믿음 안에 살 것을 결단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을 가진 자들을 향하여 ‘차든지 덥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번은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눅9:62)고 단호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신앙의 성패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 선택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 편을 택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고,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요셉은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받아 들여 육체적인 쾌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야 되는가를 선택해야 했을 때 하나님 편을 택했습니다. 모세도 바로의 궁궐의 부귀와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 것인가, 아니면 상 주심을 바라보며 주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을 때 비록 고난이 따르지만 하나님 편을 택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고 다시 모압으로 돌어갈 것인가, 아무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갈 것인가의 기로에서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나도 섬기겠노라고 결단했을 때 보아스란 좋은 남편을 만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니엘도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더럽힐 것인가, 아니면 유익을 버리고 성결한 삶을 살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서, 또 사람들의 시기로 모함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의 위험을 받더라도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며 살았습니다. 신약 본문의 레위도 부와 안정 된 삶이냐, 주님을 따르느냐 하는 기로에서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귀히 보시고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기고 마침내 복을 받게 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을 것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단의 유혹을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사단의 유혹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과 저주를 그와 후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을 택하여 갔다가 소돔 백성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천사의 권고에 따라 오직 앞만 보고 갈 것인가, 뒤 돌아 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롯의 부인은 모든 것을 두고 나오면서 그것에 마음을 두고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발락의 물질과 권세의 유혹이 왔을 때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발락의 유혹을 선택하여 갔을 때 결국 자기도 망하고, 많은 사람을 망하게 했습니다. 사울 왕은 물욕과 권세욕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세상 물욕과 권세욕을 선택하여 살다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한 부자 관원이 주님을 따르고자 했을 때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근심하며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실패자들로 잠시 세상에서 잘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진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전심으로 주님만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기를 다짐하고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전심으로 주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구약 본문 수24:14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기되 성실과 진정으로 섬겼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은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를 고백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에게 말씀하면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단호하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진정과 정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거짓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으로 진정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받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요4:23-24) 기도드릴 때에도 전심으로 드려야 하며, 찬양을 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고, 말씀을 들을 때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여 듣는 성도가 되고, 물질을 드릴 때에도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정성을 다해 드릴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마지못해 종교의식으로 드리므로 기독교인을 흉내 내고 있는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아벨처럼 드리는지를 잘 아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아무리 드려도 기뻐하시거나 열납 하지 않으시지만 한 번의 예배를 드려도 믿음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단 한 번 바로 드린 아벨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배를 바로 드림으로 형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지만 그가 드린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드려야 한다고 죽어서도 지금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 가운데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 4:8-11에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세리였던 레위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주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며, 온전히 주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안요한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이기도 한 안요한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37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는데도 무신론자, 즉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항상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중도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자살을 몇 번씩 시도 했다가 실패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자살도 못할 정도로 심히 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지쳐 쓰러져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요한은 하나님을 떠났어도 하나님은 요한을 안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그는 37년 동안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았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눈이 뜨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되고 나서 수지맞았습니다. 눈으로 보았던 37년보다 앞을 못 보는 지금 이시간이 더 행복합니다.” 천하를 가져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감사가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다윗처럼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며 진심으로 주님만을 섬기기로 다짐하는 성도야 말로 가장 복된 성도입니다.
우리 모두 전심으로 주님만을 섬기기로 다짐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영원히 복이 되는 결단”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영원히 복이 되는 결단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결단입니다.
◆.전심으로 주님만을 경외하기로 다짐하는 결단입니다.
◆.전심으로 주님만을 섬기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