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아모스

갈망의 은혜 (암 8:11-14)

nam씨 2019. 10. 16. 16:30


갈망의 은혜 (암 8:11-14)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시간에 “갈망의 은혜”라는 제목입니다. 위대한 종교의 서사시라는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모든 자들은 소망이라는 것을 버려라." 소망이 어떤 소망이든 소망이라는 것은 다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소망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희망도 없고 희망의 메시지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말씀인데 이스라엘이 기근을 당하는데 육신의 기근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는 영적 기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살길이 있으면 살길이 있다고 누가 말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살길이 보이지 않으니 절망이고 심판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문자적으로 본 본문의 말씀이고요. 본문을 신령한 관점에서 이해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11절에 날이 “이를지라”, 13절에 “그 날에” 이런 낱말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했지만 여호와의 날에 될 일, 즉 성령 강림의 현상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먼저 전에는 갖지 못한 이런 갈급한 현상이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실재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자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행2:37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부르짖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믿고 세례를 받고 어떤 박해도 굴하지 않는 참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갈망이 있을까요?


1. 육신의 본능보다 더 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11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기 갈망을 육신의 식욕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식욕보다 더 강한 것이 무엇일까요? 과학자들이 쥐를 가지고 실험했는데 쥐를 격리시켜 며칠 굶기고 쥐를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보았는데 맨 먼저 먹이에게 달려가더라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사탄이 예수님을 먼저 떡으로 시험했겠어요? 음식의 음은 물이고 식은 밥입니다. 사람이 식에 대한 본능도 강하지만 음에 대한 본능은 더 강합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그 고통은 더욱 큽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을 육신의 음식보다 더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갈도 두 종류입니다. 은혜 받아서 오는 기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갈입니다. 좋은 기갈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멀리해서 오는 기갈이 있습니다. 심령이 팍팍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좋지 않는 기갈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전자든 후자든 축복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멀리하면 아무 기갈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아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갈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런 갈망함이 있습니다.


2. 갈망에 그치지 않고 간절히 찾아 나섭니다.


12-13절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식욕보다 더 강한 것은 생명 본능입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말씀을 구하려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달려 왕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동서남북이 어디 있습니까? 북과 동은 나타나지만 남과 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셔야 합니다. 대신에 남쪽과 서쪽을 말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입니다. "이 바다"는 가까운 데 있는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염해(鹽海), 지금의 사해를 가킵니다. "저 바다"는 멀리 있는 바다 대해(大海), 곧 지금의 지중해를 가리킵니다. 염해는 남쪽이고 대해는 서쪽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라는 말은 "동서남북의 사방으로"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갈망했으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다녔을까요?


그리고 사모하는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비틀거리며," "달려," "왕래하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허둥지둥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또 이 현상은 전국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젊은이들이 그렇다면 다른 국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온 나라가 총비상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무슨 사건이 생기면 전화회선이 불통됩니다. 네티즌의 접속이 많아 인터넷도 불통됩니다.


지금도 갈망하는 사람은 달려갑니다. 교회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찾아, 말씀을 찾아, 은혜를 찾아, 그러나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이단의 솔깃한 말에 꾀여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로 달려가고 성경으로 달려가고 역사 속에서 귀히 쓰신 하나님의 일군들의 저서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생활 잘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은 말씀은 물론 영적 지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3.  진실로 회개하며 경건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마지막 14절 “무릇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여기 맹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맹세란 아무 것에나 하는 것 아닙니다. 맹세는 최상의 존재에게 맹세를 합니다. 가장 믿을만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충성할만한 대상에게 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금송아지에게 맹세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배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우상에게 맹세하는 자는 소용도 없고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이런 선언을 한 것은 그만큼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철석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상에 대한 철저한 단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죄악을 단죄합니다.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인식하고 돌아섭니다. 세상 죄악에 대한 정죄가 필요합니다. 죄를 정죄하는 것과 나를 정죄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정죄 받지 않지만 죄는 죄라고 해야 합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나타난 것은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상은 죄다. 살인도 죄다. 미움도 살인죄다. 간음도 죄다. 마음의 죄도 죄다. 도적질도 죄다. 불신앙은 큰 죄다. 이단 죄는 더욱 큰 죄다. 교주가 되고 성령 훼방하는 죄는 다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다.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악하고 무섭고 어리석은 것인지,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이고 기쁨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은혜 받아야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시1:1∼2에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과 그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