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고난 중에도 행복한 사람들 마5:10-12, 벧전4:12-19

nam씨 2019. 3. 30. 15:47


고난 중에도 행복한 사람들 5:10-12, 벧전4:12-19

영국의 유명한 찰스 웨슬리는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 찬송을 짓게 된 동기가 감동을 줍니다.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살 길을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깃들였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밖으로 놓아 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를 읊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곧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입니다. 그가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서 처참한 곤경을 넘긴 일이 있는데, 그때 위기 중에서 전심으로 주께 맡기고 고난을 돌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황야 같은 세상을 사는 인생들이 참 생명의 주를 신뢰하도록 하는 데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풍랑을 만날 때는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입니다. 질병, 고통, 전쟁, 가정적 풍파, 개인적 풍파, 교회와 사회와 국가적 풍파는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신호라는 것을 믿고 주님 제단 앞에 나아가는 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 중에도 행복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고난 중에도 행복한 것은,

 

1.주와 복음을 위해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한 결과로 어려움이나 곤경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벌인 것입니다. 어느 설교자는 핍박과 처벌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흥미 있게 대조해서 말했습니다. "핍박이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나쁜 사람에게 받는 것이요,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 처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난이나 핍박으로 간주하려 합니다.

우리의 잘못과 실수로 인한 처벌은 주와 복음을 인한 고난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20)라고 했으며, 계속해서 본문 벧전 4:15 이하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믿음에서 떠난 무지한 처신, 광신적인 태도 때문에 받는 곤경도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복음서 본문 마5:10-11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하셨습니다. 여기'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은 까닭 없이 핍박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핍박을 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핍박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와 복음 선포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믿음은 더욱 순수해지고 견고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핍박이 있을 때 성도와 교회는 더욱 깨어서 기도하였고 영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반면 핍박이 없을 때에는 기도를 쉬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교회 안에서 싸우고 분열하였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교회 안에서 다 소모하였습니다. 핍박은 괴롭고, 쉽지는 않지만 믿음과 기도의 도구와 촉진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좋은 믿음을 만들고, 좋은 믿음은 핍박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려고 할 때 박해를 받고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살기를 힘씁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제자를 뽑은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제자 후보생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잎과 줄기가 밑으로 가고 뿌리가 위로 가도록 거꾸로 심으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소리", "잘못 말했을 거야", "새겨들어야지"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중 유독 한 사람만이 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바로 그가 프란체스코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은 머리가 좋아야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제자란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 중 머리 좋은 가롯 유다는 믿음의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길을 가다 박해를 당하고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예배한다." 소리치며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를 부르다 죽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 살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우리도 기뿐 마음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믿음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고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본문 벧전4:13-14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했습니다. 성도가 주와 복음을 위해 박해를 당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요,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분부를 따라 살면서 고난당할 때 주님도 같이 고난을 당하시면서 위로해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사역을 감당하면서 주님과 성령께서 함께하시므로 그를 통해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고, 죽은 자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가 전한 말씀을 통해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갈 때 마태복음 본문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하시며,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인 선지자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주님의 이름과 그 일로 인해 핍박당하는 것은, 사단과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인식한다는 의미요, 하나님께서 천국 시민과 그 사역자로 합당히 여기신다는 확인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자신이 천국 백성으로 보장받았다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예수께서 요 15:18-19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이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 하면서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또 손해까지도 보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하늘의 복을 영원토록 받으시는 분이신 줄 아시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롬5:3-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그 소망이 부끄럽게 되지 않음은 성령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5:5). 그러한 믿음을 가진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를 잃고 종들을 잃고 재산을 잃고 집을 잃었고 몸은 병들어 잿더미에 앉아 기왓장으로 긁어야 했고 아내와 친구들은 정죄한 상황에서도 욥기23:10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감동으로 느끼고 한 고백이 아닙니다. 스데반처럼 돌 세례를 받는 중에도 하늘이 열리고 서서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나는 은혜 체험을 해서 그런 고백을 한 것 아닙니다. 바로 앞 절인 욥23:8-9에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고 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난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고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 하다가 고난이 올 때 욥이나 베드로처럼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장래에 소망이 있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 나고 그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님을 위한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자와 심판의 부활에 참여할 자로, 알곡과 가라지로, 양과 염소로, 오른편과 왼편으로, 천국에 갈자와 지옥에 갈 자로 나뉘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모욕과 박해와 비방과 증오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은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되기 때문이요,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보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상이 있기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소망을 가지고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벅찬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죽어갔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하늘의 상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와 복음을 위한 고난과 핍박은 무의미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허무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주와 복음을 위한 고난과 핍박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고, 지혜 있는 일이며, 복 있는 일이고, 흠모할 일이고, 영광스런 일입니다. 세상은 잠시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큰 상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미국에 '쓰레기 메리'(Garbage Mary)라고 불리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후, 더러운 그녀의 아파트에서 찾아낸 것은 주식 증서와 수백만 달러가 예금된 통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그녀는 상당한 재산가이면서도 쓰레기를 뒤져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도 쓰레기를 뒤지며 사는 '쓰레기 메리'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욕심의 노예로, 정욕의 노예로, 명예와 권세욕에 사로잡혀 살고, 증오, 시기, 미움, 질투, 교만, 조급함, 거짓, 사기, 원망, 불평에 사로잡혀 불의의 도구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장례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시대를 풍자한 유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목이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입니다. "10,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 성형수술 했는데 티 안 나고 예쁜 여자. 30, 결혼하기 전에 실컷 놀았는데 시집가서 잘 사는 여자. 40, 밤낮 쇼핑하고 노는데 자식이 대학도 잘 들어가는 여자. 50, 먹어도 살 안 찌는 여자. 60, 타고난 건강에 돈까지 많은 여자. 70, 자녀들이 효도하고 게다가 남편도 멀쩡한 여자. 80, 아직도 살아 있는 여자." 세상에 얄팍한 지혜로,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부럽게 사는 모습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주신 참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삶이 부러움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고진감래라고 "고생 끝에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신서 본문 16절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다 받는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하며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갔었지만 나중에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과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하기를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하였습니다(5:41).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에게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본인에게는 고난에 동참하는 즐거움과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떳떳한 일이요, 행복한 일로 여겨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하였습니다(벧전 1:6-7). 이는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참된 신앙이 온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고 죽음 앞에서도 주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하늘 아버지께 부탁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과 핍박이 장래 소망이 있는 고난임을 알고 기뿐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 중에도 행복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행복한 것은,

.주와 복음을 위해 믿음으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장래에 소망이 있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