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동행 창5:21-24
주님과의 동행 창5:21-24,
강원도 원주에 문막이란 곳이 있습니다. 문막 인터체인지 가까이에 쌍 느티나무가 유명한데 그 나무는 두 나무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한 나무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두 나무가 한 나무같이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보러온다고 합니다. 특히 이 나무에는 금슬 좋은 부부에 대한 전설이 있어서 갈등하는 부부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나무였지만 두 나무가 천년이나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까요? 처음부터 한 나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무에는 피톤치드라는 물질이 있어서 이 물질을 서로 풍겨 상대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견제합니다. 한 뼘이나 두 뼘 정도 떨어져서 서로 견제하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다 보니 아무리 견제해도 서로 맞대게 되고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두 나무는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쳐 가지가 꺾이고 몸통이 긁혀 상처 나고 껍질이 벗겨지는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자기 한 편을 포기하고 다른 한 편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무가 주는 교훈은 나무도 한 편을 포기할 때 하나가 되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내 뜻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니까 안 됩니다. 암3:3에 보면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랬습니다. 서로 의합하려면 자기 뜻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뜻이 다르면 같이 동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도 당을 만들었다가도 뜻이 다르면 갈라집니다. 이건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뜻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 되어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동행 하려면 내 뜻 버리고 선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값지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은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동행”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1.내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듭니다.
내 인생에 주님이 개입하시면 그 때부터 내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가 시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것에 대해 돌 감람나무인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되어 참 감람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보잘 것 없는 내게 보배 이신 예수님을 담게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약 본문에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우리와 사귐을 같고,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만들고, 우리를 존귀한 하늘 백성 삼아 영원한 하늘 기업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 역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존귀한 인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 또는 '바친다.', '가르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며(유1:14), 아버지 야렛이 162세에 낳았습니다.(창5:18) 그리고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인간으로서 가장 장수한 사람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볼 때, 에녹은 65세에 가서야 철저한 중생의 체험과 은혜의 체험을 하고, 그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경계선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내가 언제부터 교회 다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언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났느냐가 중요합니다.(요3:5) 그런데 어떤 신자는 예수 믿기 전과, 믿고 난 후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신앙의 경계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이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삽니다.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교회 나오기 전이나 나올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모습만 신자이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 이 세대를 본받아 살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에녹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환경을 지배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에녹의 때에도 홍수심판 직전이기 때문에 시대가 혼란하고 죄악이 관영한 때였습니다. 공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육의 일에 심취하여 첩을 두는 일과, 살인하는 일과, 만사를 정욕대로 사는 죄악 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에녹은 시대에 속화되지 아니하고 시대의 사조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훌륭한 신앙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하되 1년도 아니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였다 함이요,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다 함이요,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혜 받고 은혜생활을 지속하기가 힘이 들고 어려울 것인데, 에녹은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했다니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모든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동행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젊은 육상 선수가 올림픽에서 명성을 얻은 뒤 성공을 거둔 소감을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나와 함께 달려주셨기 때문에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해설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이 이기도록 도우셨다는 말은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훈련하는 데 필요한 준비도 못했을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달려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매일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지금껏 살아온 하루하루 삶의 기적,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과 이 세상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이 동행 하실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 되고 그 때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에녹은 300년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다가(히11:5),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최후의 심판을 예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예언자적 시각을 가진 선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유1:14-15) 그가 낳은 아들 므드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란 이름의 뜻은 ‘대확장’ ‘창던지는 자’ ‘그가 죽으면 보낸다.’ 등의 뜻입니다. 무엇을 보낸단 말인가? 즉 “홍수의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홍수 심판은 므두셀라가 죽자마자 바로 그 해에 일어났습니다. 심판 직전에 그를 이 땅에서 데려가시고 나서 심판하셨습니다. 에녹이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비결은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경성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아는 자는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구약 본문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동행하는 에녹을 너무 기뻐하셔서 죽음조차도 면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함을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사람이라 할 때 오직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분은 노아요, 한 분은 에녹이었습니다. 창6:9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완전한 의인이라고 한 노아와 더불어 에녹은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육신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오직 두 사람뿐으로, 엘리야와 에녹이었습니다. 그러나 3백년이라는 긴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받은 자는 오직 에녹뿐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렇듯 의롭게, 경건하게, 온전하게 산사람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을까?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그의 행적(行跡)을 밝힌 곳이 별로 없습니다. 유다서 1:14에 잠깐 그가 심판을 예언하였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성경에 그에 대한 기록은 간단합니다.
그의 업적이란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직 자녀를 낳았다는 말뿐입니다. 이로 보건대 3백 년 동안 그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장성하게 되매 장가들어 하나의 평범한 남편이요, 가장(家長)으로서 자녀를 낳아 저들을 기르며 저들을 먹여 살리기에 골몰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경건한 수도사들처럼 집을 떠나 홀로 수도에만 전념한 그런 사람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자녀를 거느린 모든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고와 그 시험을 같이 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밤과 낮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수고로이 일해야 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중에 믿음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경건하고도 엄숙한 형식이 필요하지만 그 어떤 의식(儀式)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에녹의 모범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작은 일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결코 자녀들만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것을 받아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린 소자(小子)에게도 냉수 한 그릇을 나누어 주는 그 작은 일속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또한 에녹의 생활은 이처럼 평범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미미했음을 봅니다.
창세기4:16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아들인 동명이인인 에녹은 큰 성(城)을 쌓아서 그것을 에녹성이라 하여 자기 이름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도 안았고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녹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을 쌓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같이 많은 우물을 남기지도 못했고, 야곱처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처럼 대국의 총리가 되고, 흉년의 때에 동족까지 먹여 살리는 공적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에녹의 일생이란 보잘것없는 미미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가장 큰 칭찬과 더불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큰 업적을 남길 수만 있다면야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큰 업적을 남긴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에녹처럼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더 귀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마치는 깨끗한 생애를 남길 수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성공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신앙의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가 심히 악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세상이 악하다고 그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악한 세상에 살면서 세상 풍조를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러한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하고 완전한 믿음의 교제와 헌신의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에녹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나의 가는 길을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헤치고, 넘어뜨리고, 두렵게 하겠습니까?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의 이름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복되게 합니다.
요즘은 브랜드 전쟁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브랜드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브랜드를 비슷하게 도용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삼성’ ‘현대’ ‘LG’ 이런 기업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입니까? ‘NIKE’라는 상표 이름 하나의 값어치가 70억 달러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COCA COLA’라는 상표 이름은 ‘NIKE’의 10배 정도가 되는 700억 달러나 된다고 하니, 이름의 힘은 대단 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그 사람이나 기업의 자체입니다. 그 만큼 애쓰고 노력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아무나 잘 되는 기업이나 사람의 이름을 본 딴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그들의 별명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슈바이쩌는 “밀림의 성자”라고 부릅니다. 에디슨은 “발명 왕”이라고 부릅니다. 카네기는 “강철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중에 최고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닉네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둘 다 “구원할 자”, “구세주”란 의미를 갖고 습니다. 또 다른 이름 중에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신약 본문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자기 백성인 우리가 죄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약해지고 사단에게 끌려 다니며 무서워 떨고, 죄의 종노릇하고, 죽음에 메어 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빙점’의 주인공 미우라 아야코 간증에 보면 어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는 불교와 같은 염불이 없습니까? 뭐 나무아미타불 같은 것 말입니다. 있습니다.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는 달라도 우리는 임마누엘! 아멘! 이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뜻이지요. 나는 이 기도를 통하여 늘 평안을 얻습니다. 내가 병으로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힘들고 외로울 때면 ‘임마누엘’ ‘아멘’을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힘이 솟아납니다. 나는 ‘임마누엘’ ‘아멘’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면 나쁜 생각도 사라지고 기쁨이생기고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그 이름에 큰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위대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죄를 이기게 됩니다. 귀신이 물러갑니다. 병마도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 권세 있는 이름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습니다. 구원 얻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행2:21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했고,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에서 해방 되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85년 6월, TWA 847기의 기장 존 테스트레익은 자신이 운행하는 비행기가 테러범에게 피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항에 착륙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가 비행기를 베이루트 공항 쪽으로 접근시키자 테러범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면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으려고 했습니다.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던 그는 한동안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죽은 뒤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안이 넘쳤습니다. 이후 17일 동안 전 세계가 847기의 피랍 때문에 경악했지만 정작 그는 승객들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만 염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테러범이 나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수류탄이 터지지 않고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죽도록 허용하셨다면 그것은 곧 나를 위해 마련하신 더할 수 없이 좋은 그분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몇 차례의 어려움 후에 승객과 승무원은 물론 자신까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진실로 하나님은 기내에 함께 임마누엘로 임재하시면서 평강으로 나를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참 평안을 주시고, 마침내는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가장 복된 인생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받는 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런 복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동행”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내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