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채우는 신앙 마12:43-45, 고전6:9-20
빈집을 채우는 신앙 마12:43-45, 고전6:9-20
김준곤 목사님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캄보디아 C.C.C.대표가 캄보디아에 공산군이 들어온 다음에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기서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보가 왔기에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5월에 미국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4년 만에 탈출을 했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가 기적이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엄청난 학살이 있었습니다. 대학 나온 사람 죽이고, 영어 하는 사람 죽이고, 부자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 죽이고, 처가 집이 부자라고 죽이고, 하여튼 이 사람은 그 전체에 해당합니다. 공산당은 안경 쓴 사람까지도 죽였는데, 안경 쓴 사람은 다 인텔리로 생각 되었는가 봅니다. 그렇게 4백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수용되어 있는 마을도 3백 명이었지만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30여 명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먹을 것이 없었으나 그는 '하나님 어떠한 경우든 거짓말을 말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 친구 목사님이 6·25때 거짓말 안 하기로 작정을 했었답니다. 피난을 가다가 공산당에게 붙들렸는데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목사라고 하면 틀림없이 죽일 것 같아서 할까 말까 그러다가 거짓말 안 하기로 했으니까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밤중에 그 인민군 대위가 와서 "목사님, 저도 기독교인입니다." 하면서 보내 주어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도 절대로 거짓말을 안 하기로 기도했고, 또 죽을 각오를 가지고 기쁘게 주를 위해서 죽을 것을 기도했고, 또 몇 가지 제목을 놓고 기도를 했다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느냐고 물어 보면 예수 믿는다고 하고 예수도 전하고 그래도 아무도 그것을 탓하고 잡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인 생각을 하고 자기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실 것을 믿고 방죽에 가서 낚시질을 했더니 커다란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에도 가보면 또 그만큼 잡히고, 8 개월가량을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신앙으로 무장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필요를 다 채워 주십니다. 또 믿음으로 무장하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어떠한 위기를 만나도 담대함과 평안을 주시고, 순교할 용기도 주십니다.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빈집을 채우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빈집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복음서 본문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12:22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여기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와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라고 비방하는 말을 합니다. 이 비방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31절 이하를 보면, 주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장난이라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참으로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하시는 사역을 귀신의 역사라고 매도하는 바리새인들의 이 죄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시기에 대단히 관대하십니다. 인간의 실수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참으로 인자하고 부드러우십니다. 중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자들, 사단의 하수인이 된 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단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에게도 성령님이 임하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고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충성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한 죄, 성령을 훼방한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고전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을 거역하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거듭나 새 사람이 될 수도,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모든 원동력이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는 근거가 성령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을 거역하고, 성령님을 부인하고, 모독한다면 그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모독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한 세대’라고 말씀 하시며 빈집 비유를 하십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는 이 빈집 비유를 바알세불 논쟁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더러운 귀신이 사람의 몸에 있다가 나갔습니다.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가서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찾으려 헤매다 마땅한 곳이 없음으로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옛날에 살던 집에 와봤더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는데 주인이 없었습니다. 문패도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살 집은 여기구나! 하며 “악하고 더러운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 집에 살리라" 하고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더 악한 귀신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더 타락하고, 더 음란하게 되고, 더 악독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유명한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거의 폐인처럼 된 청년이 길거리에 술에 취해 가지고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었을 때,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일 때 나를 고쳐주었는데 어떻게 사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살고 있소."
또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이여, 왜 이렇게 삽니까?"라고 물을 때,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때 귀신 들려 미쳐 살았는데 예수님이 나를 고처 주셨소. 그런데 나는 더 이상 고독하여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창녀 생활을 시작하였소."
그 후에 예수님이 또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불량자가 이웃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싸웁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원래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의 눈을 뜨게 해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투성이라 화가 나서 살 수가 없어서 결국 화풀이하느라 마구 싸우는 거요"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한 때 은혜 받고 고침 받았는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풍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쁜 과거를 청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시 또 악한 자가 되어 전보다 더 심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자들이 하나도 없기를 소망합니다.
2.빈집을 값진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서신서 본문 고전6:12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가령 음식물을 생각한다면 어떤 음식이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술, 담배 마약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몸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합니다. 이와 같이 빈집으로 비유된 내 마음에 여러 가지 것을 다 담고 품을 수 있습니다. 헛된 철학, 세상 풍습, 음란한 생각, 거짓, 헛된 자랑, 명예, 욕망, 교만, 시기, 악독, 분쟁, 방탕한 마음 등을 담고 있으면 육의 열매를 맺어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고전 6:9-10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성도는 내 마음의 빈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랑으로, 기쁨으로, 선행으로, 진실함으로, 감사로, 하늘 소망으로, 충성으로, 성령으로, 예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마귀가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나는 미약하고 힘이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 예수님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하는 죄가 들어와 있음을 알고 경계하는 말씀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 음행의 죄에 대한 극복의 처방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음행의 문제, 법정 송사의 문제, 우상 숭배의 문제를 같이 다루고 있습니다. 음행은 성적인 부도덕한 죄를 말하고 있는데, 우상 숭배도 성적인 죄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소위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고린도 도시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린도 도시, 옛 고린도 터전에 가면 지금도 산성 아주 높은 곳에 신전의 터가 아주 웅장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도시의 시민들을 바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바라보면서 그 아래 타운을 형성하고, 마을을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무려 천명의 공창 창기들이 고용되어서 종교적인 미명 아래서 불륜의 범죄들이 공식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던 모습들이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 음행의 죄를 피하고 극복해야 할 이유에 대해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가 유업으로 얻을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본문9절과 10절에 ‘불의한 자, 음행하는 자, 탐람하는 자 등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주인이신 왕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통치하는 완성된 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런 죄를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21:26-27에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고 의로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했습니다. 여기 중요한 동사 세 단어가 나오는데 ‘씻음’, ‘거룩함’, ‘의롭다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죄 씻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도덕적 개념보다도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행하신 이 일이 헛되게 되지 않기 위해 죄를 버리고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주님 영광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몸을 죄에 드려 죄를 짓는 불의의 도구로 씀임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려 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 모두 빈집을 값진 것으로 채우는 성도들이 되어 영원한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3.빈집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나의 삶과 가치와 장래가 달라집니다.
본문 고전6:19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했습니다. 그릇 안에 물이 들어 있으면 물그릇이 되고, 과일이 담겨 있으면 과일 그릇이 되고, 보물이 담겨 있으면 보물 그릇이 됩니다. 그릇 안에 오물이 담겨 있으면 오물 그릇이 되고, 더러운 것이 담겨 있으면 더러운 그릇이 되듯이 빈집인 내 마음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차 있으면 나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 되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 그분 안에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장차 거할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시고 맞아주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늘기업의 상속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몸을 죄의 도구로, 음란의 도구로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문 13절에 ‘몸은 음란을 위해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했습니다. 16절에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몸을 음란의 도구로 사용하면 창기와 다를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몸을 음란에 내어주게 됩니까? 너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를 도축장으로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돼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꼬리를 흔들면서 신나게 도축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비결을 물었습니다. "어째서 돼지가 도축장에 즐겁게 들어갑니까?"
그 사람은 그의 손에서 콩을 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집에서부터 도축장에 가는 동안 길에 콩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앞서가면 돼지는 그 콩을 먹는 맛에 도살장으로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나들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꼬리를 흔들며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의 눈앞에 콩 주워 먹는 맛에 죽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렴풋이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세와 쾌락과 명성이라는 달콤한 콩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콩을 주워 먹는 재미 때문에 심판을 향해,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콩의 유혹이란 너무나 달콤해 지옥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 타락과 인터넷과 위성TV에 돌아다니는 음란의 콩을 주워 먹으며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외도 때문에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롯의 사위들처럼 심판을 농담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늘을 손으로 가린다 해서 하늘이 없어지지 않듯이 심판이 없다고, 외면한다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해서 심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했습니다. 심판은 더뎌 보이지만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가치 있는 성도,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진 성결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빈집을 채우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빈집을 값진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빈집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나의 삶과 가치와 장래가 달라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