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믿음과 성령 충만 (행19:1-7)

nam씨 2018. 5. 19. 14:30


믿음과 성령 충만 (19:1-7)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성품이나 행실로는 천국에 갈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양심적으로 시인한다면,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티끌만큼도 죄가 없으신 분으로 어떤 죄인이든지 그 예수님만 믿으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됨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겨우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것은 내 힘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가 곧 믿는 자의 승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문제는 지금 내가 그와 같이 담대한 믿음과 승리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낱 이론일 뿐 우리의 현실은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고난이나 실패를 당하게 되면 위축되고, 두려워하기 잘합니다,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신자처럼 타협하기까지 하는 연약한 모습 속에서 과연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뜻이면

 

사도 바울이 우상이 극심하고 음란한 고린도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귀환함으로 험난한 2차 선교 여행을 마감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해안에 위치한 아시아의 최대의 도시로 고고학적 발굴과 복원을 통해서 얼마나 거대한 도시인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한 몇 가지는 도서관과, 240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거대한 극장과, 120년에 걸쳐 세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 일컫는 아데미 신전과 공공연한 집장촌의 유적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도 고린도 못지않게 죄악이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꼽아 보아도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무엇에 소망을 두며 살았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를 떠나 안디옥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 잠시 들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좀 더 에베소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붙잡지 않아도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에베소에서는 왠지 거절을 하고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18: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18: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현재 계속적으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열망하시는 작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 기준이 사람들이 얼마나 원하는 가가 아니며, 자기에게 얼마나 유리한가가 아니며, 항상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가에 최우선을 두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머물러 있기를 원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미련 없이 떠나고, 설령 에베소 사람들이 원치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투지와 용기와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강점이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2차 선교 여행 때 아시아 선교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뜻을 돌이켰으며, 그동안 거친 선교지마다 고난이 막심했으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역을 계속해온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리라고 하던 바울의 말이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것 같아도 세상에서 그 어느 약속보다 확실한 약속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붙잡을 때는 뿌리치고 떠났던 바울 사도가 3차 선교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고 다시 찾아간 이유가 바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에베소를 이처럼 바울이 뒤늦게 찾아가게 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쉽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를 다시 방문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여기서 윗 지방은 일차 선교 여행 코스가 대부분인 다소-더베-루스드라-이고이온-안디옥-라오디게아 등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마감하며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복음의 씨를 뿌리고 떠나간 사이에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에베소까지 와서 그들에게 물을 주어 제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러나 아볼로의 약점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므로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은 에베소의 제자들의 신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누군가 아볼로 보다 더 능한 사람의 가르침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에베소로 다시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내 생각대로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 없으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생의 시계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하고, 내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자만하지 말아야 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것만이 제일 좋은 믿음인 것입니다.

 

2. 믿음의 필수조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다시 돌아와서 아볼로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진 질문이 무엇입니까?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같은 질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많이 들었지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잘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기 자신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 교회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하였을까요?

 

에베소 교회 제자들이 바울이 씨를 뿌리고 아볼로 물을 준 복음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구원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에베소 교회 하나만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가 동서양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차점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의 거점으로 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물세례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만으로는 그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맨 나중에 사도 바울을 에베소에 다시 보내어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한 후 안수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소아시아의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가 되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로 이 열둘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에베소 교회의 G 12의 원형 셀이었습니다. 비록 평신도들이 모인 에베소 교회일지라도 마침내 성령 충만한 소아시의 오순절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느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또한 잘 믿는 사람이었으나, 고난이 닥쳐왔을 때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 약골들이 과연 어떻게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한데 모이게 하시고 성령 충만을 받게 하신 후에 비로소 그들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와 선교사로 쓰임을 받게 하신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좋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기가 더 쉽습니다.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필수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필수는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무능력하고, 기쁨이 없고,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고, 불신자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원인이 바로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모든 평신도들이 반드시 받아야 할 필수 학점인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

 

그렇다면 죄악이 가득한 에베소를 바울과 열두 명의 제자들이 과연 어떻게 변화를 시켰을까요? 과연 성령 충만한 에베소 교회 안에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요?

 

1) 핍박을 개의치 아니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도 바울의 강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와 같이 불순종과 비방과 도전의 세력들 때문에 부득불 회당에서 철수 하여 두란노 서원으로 이동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이전에 회당은 안식일 밖에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두란노 서원에서는 날마다 강론하므로 체계적인 제자훈련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자그만 치 이년간 하는 동안 그 소문을 듣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바울에게 찾아와서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등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탄생하는 명실공이 아시아의 복음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2)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동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서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시작한 제자훈련은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증하여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 중에 하나가 바울이 직접 안수를 하지 않고 다만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귀신 들린 자나 병자위에 얹으면 고침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희한하다는 말은 두드러지고 예외적인 이라는 뜻으로 초자연적인 기적이 말씀의 역사와 더불어 뒤따랐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3) 아데미를 이기고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래 동안 각종 우상과 아데미 신에 의해 짓눌려있던 에베소 지역에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여주는 희한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 결과 에베소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영적인 경외감과 더불어 주 예수를 계속적으로 높이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였습니다.

 

심지어 마술을 행하던 사람이 마술에 관한 책을 불사르고 그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은 더욱 부흥하여 힘을 얻는 영적 승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서 힘은 통치 세력과 권능을 가리키며, 흥왕은 점점 커진다는 미완료 동사이고, 세력을 얻는다는 말도 점점 강해져서 많은 일을 하게 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당시 에베소에 얼마나 말씀과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후일에 에베소에서 기독교의 승리를 증명하는 하나의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아데미 신상을 안치하는 토대였던 것을 후에 한 그리스도인이 아데미 신상 대신에 십자가를 세우고 이런 비문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데메아스(Demeas)는 마신 아데미의 거짓 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모든 우상을 추방하는 이 표적을 두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 승리에 찬 불후의 그리스도의 상징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바울 사도가 열두 명으로 시작한 에베소 선교에 삼년 동한 혼신을 쏟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에베소 교회를 영적으로 매우 수준 높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에베소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전반부에는 수준 높은 삼위일체와 예정론과 구속신학만이 아니라, 후반부에는 성령 충만한 성도의 구체적인 생활지침까지 신앙의 양면을 균형 있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와 같은 에베소서는 오늘에 이르도록 많은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올바른 신학과 성령 충만한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은혜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기나긴 아시아와 마게도냐 선교를 접고 그의 평생의 소원인 로마를 향해 나아가는 대장정의 비전을 에베소에서 구체화시켰습니다.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만 믿으면 다가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지라도 성령으로 거듭나고, 현재 내가 성령의 통치에 온전히 굴복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이 헛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겨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복음전파의 장애물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회개하고 사모하고 구하는 성도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일하고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오늘도 변함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만 잘 믿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조건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문제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성령 충만을 받았으면서 복음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겨우 구원은 받겠지만 성령 충만한 전도자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늘에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를 위해 열두 제자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믿고 겨우 주일만 지키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지 말고 아데미 신과 같은 우상과 죄악에 눌려 있는 영혼을 구하는 전도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