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마16:21-27

nam씨 2018. 3. 24. 14:5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마16:21-27, 1:24-27

 

짐 엘리엇(Jim Elliot) 선교사의 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이 쓸모없는 나무개피에 불을 붙여 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나의 삶을 소멸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당신과 같이, 주 예수님이시여".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과 동료 4명은 식인종 아우카 족의 선교를 위해 떠났습니다. 아우카 족이 사는 해변에 도착한 지 5일 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왜 이런 낭비가 있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 주세요. 낭비라니요. 남편의 죽음은 절대로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온 생애를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책임을 다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죽은 선교사들의 아내들은 아우카 부족을 찾아가 여러 해 동안 헌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지금도 아우카 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타올랐던 불은 식인종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불이 되었습니다.

벤지(Geoff Benge)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짐과 피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 창을 든 아우카 전사들이 너에트와 에드와 로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짐은 주머니에 든 권총에 손을 갖다 대었다. 저들을 쏘아야 할까? 그러나 짐은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전해야 할 저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숭고한 선교의 불을 당겼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은 자기의 목숨을 버림으로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몸으로 겪으며 십자가 지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복음서 본문 마16:25"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내가 믿음 안에서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영으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법적 관계에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제아무리 엄한 법이라도 법은 산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죽은 자를 가두어 놓는 감옥은 없습니다. 우리말에 지독한 욕이 하나 있습니다. ‘육시랄이 그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아주 못된 죄인에게는 죽은 송장에까지 매질, 칼질을 하는데, 이것이 육시(戮屍)’입니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때려봤댔자, 칼로 베어봤댔자 시체가 아픔을 느끼겠습니까?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만큼 큰 죄인이다, 죽음으로도 사함 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도 그 정도로 악한 죄인이었지만,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과 수치와 저주를 받아 죽으시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해서 제 삼일에 살아야 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본문 마16: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하시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믿음이 부족하여 십자가가 자신과 모든 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데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락을 위하여 간사한 계획을 하고 있는 인간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실패한 일 같고, 넘어진 것 같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은 넘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볼 때에 실패 같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없이는 죄 사함의 길도, 구원의 길도 없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늘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본문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겸손하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로마서 8:13에 보면"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내 육체를 근거로 하는 모든 죄악을 온전히 끊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희생을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 없이는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십자가란 희생의 짐이라고 말합니다. 메튜핸리는 십자가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고통과 의로 말미암는 핍박을 말한다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내적인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인 문제입니다. 고난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각 사람의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이 각자의 십자가도 모두 다릅니다. 사람은 어차피 고난을 겪으며 삽니다. 주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주님께서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남을 위한 희생,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참고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서신서 본문 골1:24-25"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앞으로도 기꺼이 고난을 감당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으며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복음이 선포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성장됨을 기뻐하였습니다.

교회의 일군이 받는 고난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교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어떤 고난이든 간에 달게 받아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상급도 그를 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핍박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도움이 되기보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교회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고난 받는 성도들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주는 영광을 알고 기쁨으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본문 마16:27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 후에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영광, 승천의 영광, 하늘 보좌 우편에 않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제 다시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심판 하러 오실 때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발자취를 따른 자들에게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초림의 주로 오셔서는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시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은 누구든지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함이요,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일을 위하여 싸우라는 것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요, 다시 오실 때는 끝까지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일한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려고 할 때 사단의 세력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대적하기 때문에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을 때 독일 교회에 유행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보들만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나치화 시키기 위해 내세운 정책은 게르만적 기독교입니다. 독일 목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게르만 민족을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섬기게 했고, 교회를 타락시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와 칼 바르트는 기독교 양심을 지켰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르치며, 나치와 대항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결국 비밀경찰에 의해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들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나 종교개혁 당시 역사를 살펴보아도 신자들은 십자가를 피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죽음의 지경까지도 나아간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의 수고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요, 누구든지 십자가를 진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세우신 법도요, 공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므로 왕권을 받는 동시에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었고,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한 자들에게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고,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장래의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주는 영광을 알고 기쁨으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