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려야 할 죄 창4:1-15, 갈5:16-24
다스려야 할 죄 창4:1-15, 갈5:16-24
한 학자가 분노(忿怒)에 대한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얼굴표정, 이른바 안색이 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르몬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에게 분노가 일어나면, 질 하 액과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에서 분비되고, 동시에 동맥의 혈압이 오른다고 했습니다.
혈압이 오를 정도의 심한 충격의 힘은 소화기관에 몰려있던 피들이 간(肝)으로 몰려가서 간에서 당분을 가지고 모든 운동근육으로 가서 공급함으로 육체를 즉시 공격할 수 있는 공격 태세를 갖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혈액이 몰려가는 동안에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가, 목에 정맥이 부풀어 오르고 동맥의 피가 얼굴로 올라가면서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또 눈동자 동공이 확대가 되면서 문자 그대로 안색(顔色)이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화가 나면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의 안색이 변화됩니다. 그럴 때 자기를 컨트롤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될 뿐만 아니라 가인처럼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행동을 저지르는 불행한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다스려야 할 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죄에는 형벌과 저주가 따릅니다.
구약 본문 창4:7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거절하신 것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태도를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고 실망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달라는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자 분노한 것입니다. 신앙인 가운데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예배 보다 어떤 욕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보다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를 위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는 욕망, 자녀가 명문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욕망 등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믿는 자들을 비난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둘째는 자신은 거절당했는데 동생 아벨은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동생이 잘 된 데 대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가인이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졌다면 내 기도는 안 들어주셨지만 동생의 기도라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 겁니다. 가인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꼬인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은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면서 축하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마음입니다.
가인은 옛사람의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되어 죄에 메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 갈 5장에 “육체의 소욕”이란 말이 나오고 갈5:19-21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문자적으로 육체의 욕망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인 죄의 성품을 말합니다. 흔히 “죄 성”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죄의 성품은 육체가 좋아하는 육체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 죄의 성품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19-21절에 열거 된 내용입니다. 이런 죄의 열매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과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
범죄 한 가인에게 땅이 저주를 받아 땀 흘린 만큼 소출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쉴 곳이 없고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하는 떠돌이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당장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절망과 허탈과 비애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여기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상속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상속자는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을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평안, 기쁨, 감사, 사랑, 영적 생명, 행복, 소망, 영생 등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축복 대신 저주와 진노의 영원한 형벌이 다르게 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저주와 진노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해방 받아 영생에 이르는 복을 받길 소망합니다.
2.하나님은 죄에 대한 해결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문에 반항하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말을 계속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실 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불순종하여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때와 같습니다.
아담이 이 질문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감추고 변명하였었는데 가인 역시 하나님의 질문에 회개하기는커녕, 자기의 죄를 숨기면서 오만 방자하게도 반항적이고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회개할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이나 가롯 유다의 잘못은 모두 큰 실수요, 허물이요, 죄였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판 것도 큰 죄악이자만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한 것도 큰 죄악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큰 사도가 되었고 가롯 유다는 멸망의 길로 갔습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닭소리만 듣고도 통곡하면서 회개하였지만 가롯 유다는 주님께서 직접 세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악한 길에 들어섰을 때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거짓으로 감추고 반항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죄에서 해방 받는 길,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는 길을 만세 전부터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 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통해 속죄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교제를 나눕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범죄 한 후 그의 죄를 회개하면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서운 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내어 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 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벌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 예언 후에 7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가 임할 때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버리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가 긴밀해 지는 삶을 살다가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3.죄를 다스리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육적이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육적인 욕구를 인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힘으로도, 지혜로, 노력으로, 수양으로, 고행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신약 본문 갈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믿음 생활의 배후에는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창조의 사역에서와 같이 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외에도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사역 몇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거듭나게 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요3:5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거듭남이란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이 뜻은 다시, 두 번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해서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으며, 교회 생활에 익숙한 자라도 거듭나지 못한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종교인이요, 육에 속한자일 뿐입니다.
다음에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하는 사역입니다.
본문 갈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육적 소욕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 끓임 없이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 앞에 소리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4) 하고 탄식한 것입니다. 내 스스로 육체의 소욕을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육체의 소욕을 더욱 강해집니다. 마치 몸에 붙은 거머리를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강하게 달라붙듯이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므로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육체의 소욕 말고 또 다른 법이 임해야만이 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육체의 소욕보다 더 강한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임해야 합니다.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고 죄와 사망의 길로 데려가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 받아서 성령의 법 안에 거할 때 육체의 소욕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사역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육체의 소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미혹이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갈5:18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성도가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거나 사단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마음에 기쁨도, 평안도, 담대함도, 구원의 확신도 다 사라지게 되고 대신 불안 근심,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탄이 짐승에게 즉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13:7) 이 어둠의 세력들은 권세를 받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스리려고 할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자는 이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 겁 많던 예수님 제자들이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자 그들이 담대히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와 예수를 전했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그들의 사역은 오직 예수 한 분을 전하다가 예수를 외치고 순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 역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자 그들이 강력한 로마의 권세 앞에서도 비굴하지 아니했고 굶주림으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입을 보고도 예수를 찬양하며 예수 이름 부르고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많은 신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부터 성도들까지 모두 타락의 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18:4)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습니까? 우리 곁에 와 계신 예수의 영을 얼마나 사모하며 간절히 원해 보셨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마지막 때에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다스리심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창4:1-15, 갈5:16-24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다스려야 할 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죄에는 형벌과 저주가 따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해결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