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승패가 달린 선택 눅16:19-31 시73:23-28,
생의 승패가 달린 선택 시73:23-28, 눅16:19-31
한 부유한 사교계의 부인이 심한 병에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형편이 교회에 광고되고 특별한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의사도 자신이 없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남겼지만 놀랍게도 이 여인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 자신도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부인의 건강 회복을 축하하기 위한 축하 연회가 친구들에 의하여 베풀어졌습니다. 연회를 마련한 주인이 사람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이 오후를 즐겁게 지내기 위하여 마시는 일과 카드놀이로 여흥을 즐기겠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이런 일에 앞장을 서 왔던 그 부인이 연회를 주최한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영원이 무엇인가를 이번에 실감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이 짧은 것을 깊이 깨달았으며, 죽음의 문턱에도 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전에 즐기던 세상의 일을 다시 반복할 수가 없군요.” 이 부인은 병을 통해 인생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영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행했던 것처럼 세상 연락에 빠져서 사는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오늘은 새 해를 시작하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생의 승패가 달린 선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바른 선택은 후회 없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의 인물이 소개됩니다. 한사람은 부자라고 소개되고 한 사람은 걸인 나사로라고 소개됩니다. 이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고운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풍성한 잔치를 벌일 정도로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매일 사람들을 초청하여 호화로운 파티를 하면서 인생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모든 돈을 아낌없이 썼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찾았다거나, 감사했다거나,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다거나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 나사로는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가난한 거지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병까지 들어 그의 헌대를 개들이 와서 핥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보아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사람은 부유했지만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난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런 차이가 세상에서는 잘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세상에서 잘 되어 주신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는 복의 근원으로 사는 자들도 많이 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때문에 고난을 자초하기도 하고, 믿음 때문에 불신자들의 조롱과 박해를 받으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바른 믿음의 길을 선택하여 사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이런 자들은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늘과 땅의 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 사람에게 찾아왔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어디에 던져졌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는 음부의 불 못에 던져졌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고통 받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을 구할 수 없어서 그는 괴로워하는 곳입니다. 부자는 그런 고통 속에 들어가고 나서야 후회했습니다. 이 고통의 상황에서 부자가 소리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저 나사로를 보내서 물 한 방울을 묻혀서 내 입에 넣게 하소서. 이 부자는 물 한 방울을 갈급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아브라함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너에게 갈 수도 없고 올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한번 결정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천국과 지옥의 특징인 것입니다. 부자는 어리석게도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뒤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낙원을 의미합니다. 낙원은 바로 천국의 다른 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출세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부자처럼 마음껏 세상 연락을 누리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 하며,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사랑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나사로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 일입니다. 이 선택이 바른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 바른 선택으로 후회 없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을 가까이 하는 선택은 언제나 복이 됩니다.
구약 본문 시73:27-28에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성도라고 하면서도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했다가 멀어지는 사람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가까이하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망하는 믿음이요, 음녀 같이 주를 떠난다고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단의 말을 듣고 미혹을 받아 세상에 죄와 저주를 끌어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끌려갈 때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앞에 나타난 한 계집종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름은 주님의 제자인데 입술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멀리하는 것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본문에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라고 말하는데, 음녀는 돈으로 팔려 다니는 여인입니다. 음녀에게는 정조란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돈만 주면 모든 남자를 다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사람이 되면 그가 바로 음녀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다 보면 세상 것을 위해 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동창회, 계모임, 야유회, 결혼식에 가려다 보면 주일 예배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라 전도하며 같이 사역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음을 서운해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딤후4:10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사람을 떠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교회와 멀어집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 마음에는 교회가 안중에도 없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음녀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께서 다 멸하신다 했습니다.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루마니아의 한 목사가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어 16년 동안 고문을 당했습니다. 악랄한 세뇌도 받았지만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수년간 투옥 생활 후에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번은 죄수들에게 가족의 방문을 요청하는 엽서를 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수와 면도를 하고 죄수들마다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그 역시 면회실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엽서가 집에 도착되지 않았던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스피커에서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그들은 더 이상 네게 관심이 없다”는 소리가 울려나왔습니다. 심리전술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감옥에서 나온 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감옥생활이 그렇게 길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은 그곳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혹 사람들은 버리고 외면하고 배반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를 항상 변함없는 사랑으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때로 모함이 따르기도 하고,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편이 되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고,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요셉은 가는 곳마다 축복을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안겨다 줍니다. 창39:2-3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말은 곧 요셉이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합니다.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기회가 지나기 전에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음부의 고통가운데 들어가고 나서야 뒤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회가 지나갔습니다. 지옥은 더 이상 기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자비도 긍휼도 없는 곳입니다. 이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마지막 간청을 합니다. 지상에는 아직도 이 지옥을 알지 못하는 제 5형제가 살고 있는데 그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은 그것도 거절합니다. 지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 앞에 나올 뿐이지 죽었던 사람이 간다고 해서 그들이 믿겠느냐? 그것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절당하고 맙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많은 기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라면 죽었던 자가 살아나도 안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와 목회자들을 통해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무엇인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고 신앙생활 하다가 성령의 은혜로 바른 믿음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시골 어느 교회에 한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전도해도 믿지 않는 분이 갑자기 교회에 나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떻게 나오시게 됐느냐 연유를 물어봤더니 할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나이도 많이 들게 되고 종교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랍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가질까 고민하다가 며느리와 의논했다고 합니다. 예야! 내가 종교를 가져야겠는데 마음도 약해지고 어떤 종교를 가지면 좋을까? 그랬더니 며느리가 그럽니다. 어머니 이왕이면 메이커 있는 종교 가지세요. 메이커 있는 종교가 뭐냐고 했더니 그야 기독교죠 그러더랍니다. 교회도 안 나가던 며느린데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메이커 있는 종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종교인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진짜 신앙인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을 부인하던 무신론자들도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어령 전 문화공보부장관은 대표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분은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지성인 중에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몇 년 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분명히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써낸 책이 베스트셀러인데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에서 “나는 학자로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의문을 가지니까 지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믿음으로 영성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부장관을 지내신 정근모 장로님은 세계적인 석학이요, 과학자입니다. 그처럼 뛰어난 과학자는 역사 속에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중간에 나이가 50이 다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과학자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복음으로 설명할 수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지성인이라고, 유명한 과학자라고 자기를 들어내며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은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늦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기회가 지나기 전에 주님을 가까이 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욱 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먼저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요, 은혜 받는 날입니다. 요4:23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은 한 순간도 그대로 두면 우리의 심령은 나태해지고 병들며, 썩고 시험도 듭니다. 논, 밭을 돌보지 않으면 잡풀이 무성하게 나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 돌보지 않으면 잡풀이 무성하게 자랍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다 보면 믿음이 식어지고 연약해지며,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다음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시 145:18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신명기 4:7에 보면, “우리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고 가까울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기도 중에도 좋은 기도는 회개 기도입니다. 죄는 주님과 멀어지게 하지만 회개하여 성결한 마음을 가질 때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찬송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매일 육신의 양식을 먹는 것처럼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영혼이 강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수금으로 찬양할 때 사울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이 물러갔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 때 성가대를 앞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때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할 때 기적적으로 간수가 구원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할 때 찬송 부르며 담대히 순교했습니다. 우리 모두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힘쓰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새 해를 시작하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생의 승패가 달린 선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바른 선택은 후회 없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선택은 언제나 복이 됩니다.
◑.기회가 지나기 전에 주님과 가까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