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 높이며 삽시다. 단5:13-29
주님만 높이며 삽시다. 단5:13-29, 요3:22-30
에든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경은 진통제를 발견해서 고통 없이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의학계의 노벨상 감이고 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노교수 심프슨 경에게 "선생님의 생애에 가장 뜻 깊은 소중한 발견 한 가지를 들라고 하면 무엇을 들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한참 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네."
천국 보화는 낮은 곳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발명도 독창은 없습니다. 전 인류의 공동 발명인 것입니다. 인류가 발견하고 발명하고 경험한 모든 것의 그 위에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조그마한 발견 하나를 더하는 것이 발명입니다. 노예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왕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왕을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노예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강도나 살인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성자도 없습니다. 성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살인자나 강도도 없습니다. 거지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부자도 없고, 부자를 조상으로 가지지 않은 거지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죄 투성이 이고,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새 해 첫 주일을 맞아 신년 예배를 드리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만 높이며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교만한 자는 자기를 높이며 살다가 패망합니다.
암은 아직도 제일 무서운 병입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아마 두 가지 일 것입니다. 그 하나는 자각 증세가 너무 늦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암이 감기처럼 걸리는 그날부터 증세가 나타난다면 치료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자각 증세가 없기 때문에 발견하고 나면 때가 너무 늦어 치료시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암세포는 주변의 영양분을 다 빼앗아 먹으면서 자기 혼자만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전체의 건강을 무너뜨리고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 교만은 사랑이나 자족하는 마음, 심지어 상식까지 갉아먹어 버린다. 가장 핵심적인 악, 가장 궁극적인 악은 교만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이다. 그래서 교만을 영혼의 암이라 말한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영혼의 암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교만한 줄 모릅니다. 교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금방 아는데 자신은 모릅니다. 자신은 힘들지 않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교만한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단4-5장에 두 왕이 등장합니다. 느부갓네살 왕과 손자인 벨사살 왕입니다. 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하여 무너졌다가 겸손해져서 다시 회복된 왕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몇 번이나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했던 사람으로 꿈을 통하여 계속 교만하면 하나님이 나무를 베어버리듯이 무너뜨리시겠다고 하는 경고를 받았지만 여전히 교만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단4:30) 하나님은 교만한 느부갓네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정신 이상자가 되어 자기가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들에서 살면서 풀을 뜯어먹으며 7년 동안이나 짐승처럼 살면서 겸손해진 후에야 교만이 치료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시리라.” (단4:37)
다니엘서 5장 본문에 나오는 벨사살 왕 역시 교만하여 무너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벨사살 왕이 귀족 천명을 불러서 호화스런 잔치를 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그릇에 술을 부어서 모인 무리들에게 마시면서 각종 우상들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을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왕궁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썼습니다. 그 순간에 벨사살은 두려움과 공포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교만에 대해서 22-24절에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셨나이다.”
다니엘은 그 글을 읽고 해석해 줍니다. 25-28절에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에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우바르신(우는 접속사)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인생을 끝 장 내시겠다 하시며, 교만한 자의 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알고 꿈에라도 교만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겸손한 성도는 주님만 높이며 삽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 평가 받았던 사람입니다.(마11:11, 눅7:28) 무엇보다 요한은 구약 성경에 그의 삶과 사역이 예언되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사40:3-4) 말라기 선지자는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주를 위해 세운 백성을 준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말4:5) 또한 세례 요한의 출생은 특별할 것이었습니다.(눅1:3-25, 57-80) 자식이 없이 나이가 많았던 사가랴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가 그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믿지 못했던 사가랴는 이후 말을 하지 못하다가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한 후 해산하여 사가랴가 그 이름을 서판에 요한이라 기록했을 때 그의 입이 다시 열렸습니다. 사가랴는 성령 충만함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펼쳐질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예언합니다. 주의 손이 이 아이와 함께 하였고 이 사실에 대해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1:66)하며 두려워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었던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해 전하며 그 분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눅3:1-3, 요1:6) 그는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끼쳐 당시 많은 백성들이 심중에 혹 그가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신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눅3:15, 요1:19-20)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고, 예수님도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3:13)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역 막바지에 일어난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증거를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은 짧은 시간 급속도로 확대되어졌습니다. 요한은 여전히 세례를 베풀고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위축되어졌습니다. 이 때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도 우리 선생님은 세례의 원조요, 닉네임이 세례 요한이라고 불릴 정도인데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이와 같은 비교의식, 경쟁의식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게 되고,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사단은 처음부터 이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비교의식은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인간을 하나님과 비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창3:5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다.” 또한 비교의식은 인류 첫 번째 살인의 원인이었습니다. (창4:1-8)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고 가인은 시기로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게 됩니다. 이후 비교의식은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원인이 됩니다.
출애급 당시 비교의식으로 인해 미리암은 한 때 문둥병이 걸리게 되었고, 고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관계는 비교의식이 어떻게 서로의 삶을 파괴하나 생생한 예가 됩니다.(삼상18:6-9) 나아가 비교의식은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아무리 신앙이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교의식은 극복하기가 힘든 일인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은 이것을 넘어서서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7절) 했고, “신랑을 위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 (29절)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0절) 했습니다. 요한의 이 고백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본받고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더욱 위대해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된다면 우리 자신의 삶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세례 요한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을 높이면서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사무엘상 2:30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은 세례 요한처럼 오직 하나님만 높이며 사명을 감당하는 겸손한 인물입니다.
본문 17절에 벨사살 왕에게 주는 다니엘의 대답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다니엘은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재물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 까짓 사람이 주는 상급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물은 왕이 취하고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나 주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상급과는 관계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세상것 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남달리 뛰어난 지혜를 주셨고, 바벨론의 총리로 높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다니엘의 해석대로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이 세우시면 권력과 재물을 얻고 사는 것이고, 아직 젊을지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벨사살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세례 요한이나 다니엘이 가졌던 자세를 반듯이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에게는 재물이나 권력, 사람이 주는 그 어떤 상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조그마한 유혹이나 환난의 바람에도 쉽게 놓아버리는 사명은 아니십니까? 벨사살 왕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가지고 다니엘을 유혹하지만, 다니엘은 그 까짓 것들을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의 뜻만을 전하는 사명의 사람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 난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겸손과 부족함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 세례 요한이나 다니엘처럼 겸손히 주님만을 높이며, 맡겨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새 해 첫 주일을 맞아 신년 예배를 드리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만 높이며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를 높이며 살다가 패망합니다.
▣.겸손한 성도는 주님만 높이며 삽니다.
▣.주님을 높이면서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