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창19:23-33

nam씨 2017. 12. 15. 14:24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창19:23-33, 17:26-37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하면서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다고 여우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롱!".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내게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든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시험에 들까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때, 곧 심판의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를 잘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했지만 노아의 가족 외에는 예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는 소돔 고모라의 심판의 때 롯의 가족이 겨우 심판을 피해 그 곳에서 나올 때 그나마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롯의 처가 뒤 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신약 본문에는 종말의 때를 예고하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우리 성도는 심판의 날을 잊지 말고 항상 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1.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구약 본문 창19: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말하는 천사의 말도 믿지를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 외에는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사가 이 성이 멸망할 것인즉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 기둥이 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천사들로부터 소돔 성을 멸망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롯은 자기들의 사위 될 자들에게 안타까워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농담으로 여겼더라."(19: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농담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들었던 사위 될 자들도 소돔 성이 멸망할 때에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롯은 하나님을 신뢰 하는 면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 아닌 자기중심 신앙, 물질 중심 신앙, 세상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30절에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했습니다. 롯이 왜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의 멸망을 보았던 롯이 그 악몽 같은 불안을 떨치지 못해 굴속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알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과 꼭 같이 악해서 롯이 그들 속에 있기가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장은 롯만이 아니라 소알 성에 살던 사람들 전부가 두려워 산으로 올라가 굴속으로 숨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롯이 소알 성에 거하기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소알 성까지 다 멸하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이 소알 성으로 피하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듣고 소알을 롯의 피난처로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123) 했습니다.

 

롯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을 소돔 성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소알 성에서 멸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소돔에서 그를 내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소돔의 처참한 멸망을 보았던 롯에게 불안도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그곳에서 구원을 얻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근성이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불신의 근성이 그를 두려움 가운데 소알을 떠나 굴속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이 불신은 곧 소돔의 근성이요, 세상의 근성이요, 사단 마귀의 근성입니다. 이 나쁜 근성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불순종 하게 하고, 불신의 자리에 붙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자리에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불신은 사탄이 이 땅의 인간들에게 던져준 최고의 흥미로운 미끼입니다. 이 미혹에 빠지게 되면 결국 말씀을 믿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처와 같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세상 것보다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믿음도 도적맞게 되고, 롯의 처같이 구원도 잃게 됩니다. 롯에 대한 성경을 읽을 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롯이 구원 받은 사람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구원받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답을 베드로후서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7을 보면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하는 말씀으로 보아 롯이 불 가운데에서 겨우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뛰어나고 성숙한 하나님의 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구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성공한 의인은 아니고 겨우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실패한 의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롯이 왜 실패한 의인의 모습인지 그에 대한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은 항상 하나님 보다 물질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애착심이 강해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할 때는 언제나 물질적인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고 계산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에 내려갔다 온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양을 키우는 규모가 커지게 되자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이 우물로 인하여 서로 다투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물로 인해 싸울 관계가 아닙니다. 이때에 롯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정도 되기까지는 삼촌 덕입니다. 삼촌의 도움으로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우물 문제로 종들이 다투는데 제가 우물을 양보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도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게 될 때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것이니 선택하라”(13:9)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도 롯은 삼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윗분인 삼촌이 먼저 정하시면 제가 다른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보니 동쪽 요단 뜰이 비옥하고 풍요롭고 목축업도 잘 될 것 같고 하나님의 동산 같습니다. 다른 쪽은 산지입니다. 롯은 주저 없이 요단 뜰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롯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소돔성은 호색, 남색의 도시였기에 천사들이 롯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 그들을 내어달라고 난리입니다. 남색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롯은 대뜸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 대신에 두 딸을 내어 줄 터이니 이분들에게는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롯은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딸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어도 딸들을 서슴없이 내놓았다는 것은 도덕성이 마비되어 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은 향락과 방탕의 도시였습니다. 향락과 방탕에 찌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우습게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소돔 사람들과 롯의 사위 될 자들은 향락과 방탕에 찌들어 있었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롯의 도덕성이 마비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롯의 두 딸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근친상간을 행합니다. 롯의 두 딸들이 근친상간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딸들이 소돔문화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술을 취하게 하여 눕고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롯의 두 딸이 소돔 성을 탈출하면서 독주를 가지고 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 성을 탈출할 때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무엇을 들고 나갈 경황이 없습니다. 그래도 가져가려면 값나가는 금은 패물을 가지고 나와야 할 터인데 그들은 술병을 들고 나왔습니다. 술에 중독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술도 좋은 술이 아니라 독주였을 것입니다. 좋은 술이라면 아버지가 그렇게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은 당시의 소돔성의 타락한 문화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근친상간이 죄라는 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롯의 딸들은 오직 자식을 낳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버지와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롯은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세속에 찌들고 물들어 경건성과 도덕성을 모두 상실해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현상을 신약 본문 눅17:27-28에서 노아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롯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 사람들이 몰두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심고, 연락하며, 집을 짓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심을 전혀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보다 세속적인 쾌락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일중독, 마약 중독, 색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경건한 삶이 생활화 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는 삶이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지 두 본문은 분명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실패한 의인 롯의 모습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성공한 의인이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악과 심판에 대해 알려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면서 의인의 수를 다섯 번이나 변경 하면서 소돔의 심판을 철회해 주실 것을 위해 간곡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본문 창19:29에서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롯이 받은 부끄러운 구원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인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감화로 롯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롯이 세상 중심으로 살면서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여 위험을 무릎 쓰고 추격하여 롯의 가족과 소돔 성민들을 구해 냈습니다. 의인의 역할, 의인의 기도가 멸망에 빠질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의인의 삶, 중보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삶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려도 속한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을 더 멀리하고 세상을 더욱 사랑하며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심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도 누군가의 전도와 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멸망 받는 것은 물론 복음의 은총을 알고도 전하고 기도하지 않는 자신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선교사와 평신도들의 묘가 167기나 있습니다. 그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묘가 하나 있는데, 1907년 미국 텍사스 해외 선교부 파송으로 조선 땅에 와 황해도 개성에서 사역하다 맹장염으로 쓰러져 25세의 처녀로 사망한 루비 캔드릭선교사의 묘입니다.

 

그녀가 부모께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조선은 박해가 점점 심하고 생활환경은 너무나 열악합니다. 3일 전에도 관가에 끌려가 내가 아는 교인이 순교 당했습니다. 이 땅은 토머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목 잘려 순교당하고, 제임스 선교사가 순교한 땅입니다. 지금 박해가 너무 심해 철수하라는 선교부의 지시가 있으나 대부분 선교사는 순교할 각오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편지로 인해 새로운 20여명의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지원했습니다.

 

내 목숨 1000개가 있다면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비문에 쓰여 진 내용입니다. 이 작은 한반도에 지난 126년 동안 3000여명의 선교사, 비공인 1220여명이 왔습니다. 이들의 생명 바친 헌신으로 인해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우리 또한 중보 기도와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잠시 잠간 후면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잘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세상 것보다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