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성 (잠 18장4-5)
그리스도인의 영성 (잠 18장4-5)
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5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불어로 영성(spirituel, 스피리뛰엘)이라는 용어는 본디 16세기 가톨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지만 오늘날에 와서 이 용어는 내적인 삶, 명상의 삶을 넘어서 영적이라는 의미를 가진 낱말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하는 낱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4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여기 ‘명철한 사람’은 히브리어로 “이쉬”로서 문자적 의미로는 그냥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모든 지혜와 고결함을 갖춘 지혜로운 자를 말씀하면서 왜 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까요?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위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그 아름다운 형상을 잃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래서 사람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면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골1:15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 신령한 목표는 예수의 형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했고, 엡4:15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풍부한 영성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서 봅니다. 특히 스데반집사는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영성적인 인물임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데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 역시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방자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예수 닮은 자로 유명하여 프란시스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과 흠모가 지나칠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의 삶의 특징은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의 집 문을 두드리는 병으로 일그러진 나병 환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시스에게 알몸으로 녹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체온으로 차가운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프란시스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의 예수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그랬지요. 세상의 어떤 신령한 자가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사랑의 예수를 닮으시기 바랍니다.
2. 영성은 깊은 내면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4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여기 “깊은 물”은 심오한 자의 사상과 지혜가 중단되는 일이 없이 계속 흘러나와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비유로 한 말입니다. 영성적인 삶도 그러합니다. 깊은 데서 은혜가 터져 나옵니다.
요4:14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은혜는 특히 말씀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고 찬송하면 이 깊음의 샘이 터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물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엡5:26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암8:11에도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러므로 늘 말씀을 통해서 이 깊음의 생수가 터지기를 바랍니다.
3. 영성은 이웃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4절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지혜의 샘을 솟구쳐 흐르는 시내에 비유한 것은 끝없이 흘러나오는 지혜로서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그 지혜와 지식의 끝은 어디인지 감탄스럽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왕상4:32-34에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그런데 솔로몬도 예수님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마12:42에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골짜기 물이라면 예수님은 큰 강이나 바다와 같습니다.
이처럼 영성이란 흐릅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이 은혜의 강이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흐릅니다.
동쪽으로 나아가며 계속하여 풍부해져 큰 강을 이루는데 강가를 돌아보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고, 이 물이 흘러 죽은 바다가 되살아났습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라. 이처럼 영성이란 은혜를 끼쳐야 영성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상한 신앙 가져 가정을 풍비박산 내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그 열매로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릴지라도 열매를 잘 봐야 합니다. 열매가 나쁘면 돌아서야 합니다.
4. 영성이란 육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5절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여기 “두둔하다”란 히브리어로 “나사” 이 용어는 ‘얼굴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는 객관적 사실이나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의 외모 재산 가문과 같이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는 외적인 요소에 의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한국판 노예사건이 왜 생깁니까? 사람들이 가진 자에게 편벽되이 두둔하기 때문입니다. 도서지방이란 좁은 사회여서 그런지 힘 있는 자를 두둔하는 심리가 강합니다. 경찰이 제 역할하거나 이웃이 공정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도망해도 이웃이 잡아주고 경찰이 잡아주니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악인을 두둔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관점으로 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영성적인 삶이란 육신의 관점보다 영적인 관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에 홍해가 가로 높여 있어도 홍해만 바라보고 실망하는 육신의 관점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영적인 관점이어야 신령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19:21)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치셨다. 재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치셨다. 사람이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치셨다.
그래서 고전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고후5:7에도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하늘이 무너져도 신령한 관점에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5. 영성이란 눌린 영혼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다시 5절에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고의로 공정치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현대의 법 정신은 열 명을 놓칠지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증거 재판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증거를 무시하고 무고하게 의인을 억울하게 판결한다면 이는 심히 악한 일입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에게 눌린 가련한 영혼이 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심령입니다. 의인의 심령일지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눌려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이 눌려 있어요. 마치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와 같이 심령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눌림 현상은 속죄의 확신이 없을 때 옵니다. 피의 복음을 알아도 은혜 생활에 게으르거나 약하면 눌리게 됩니다. 혹은 사탄의 시험이 너무 강하거나 영이 크게 눌린 사람 때문에 내 영이 눌리기도 합니다. 그 눌린 원인을 알아 말씀으로 바로 세워주고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힘써 기도하여 눌린 영혼을 풀어주고 영의 환경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영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아버지를 닮으셨고 가장 은혜가 넘치시고, 가장 은혜를 많이 끼치시고, 가장 성령을 따라 행하시고, 그리고 가장 악령을 잘 물리치신 영성의 대가이십니다. 우리 모두 사모하는 가운데 스데반처럼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가장 아름다운 영성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