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 고전10:31-33 요7:14-21,

nam씨 2017. 9. 16. 14:46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 고전10:31-33 7:14-21,

 

어떤 성도가 한 신자의 심판 장면을 보는 은혜 체험을 했습니다. 그 성도는 순교자의 복음을 외치는 교회 성도였습니다. 심판대에 서 있는 그 성도는 전신을 벌 벌 벌 떨고 있었고 그 순간의 그의 공포는 이 성도의 피부까지 와 닿았습니다.

 

그 옆에는 커다란 큰 화면이 있었는데, 바로 그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성도는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떨면서 설교화면을 보는데 그 목사님의 책망의 설교는 살아야 된다는, 깨어야 된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그에게 느껴지는데.. 그 화면을 바라보며 심판대 앞의 성도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했었는데, 왜 나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이런 후회와 절망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화면은 그 성도가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심판대에서 보고 있던 성도가 절규하며.. 크게 통곡을 했습니다. 그 통곡소리가 너무나도 불쌍했습니다. 화면 속에 성도의 모습은 설교 말씀을 많이 들어서 인지 무슨 말 하시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타성에 젖어 느슨해보였습니다. 목사님이 설교 중 재밌는 얘기를 하시면 웃고 또 집에 가스레인지 켜두고 오지는 않았나, 내일 저녁은 냉장고에 있던 그걸로 찌개 해 먹어야 겠다는 등 이런 잡념의 생각도 하는데.... 그 생각과 표정을 보고 있는 그 심판대 앞에 있던 성도는 내가 어찌 저 시간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목사님의 말씀에 왜 순종하지 못했을까..... 심판까지는 아직 멀었겠지 생각했지만 심판 앞에 있었다는 걸 어찌 몰랐을까... 어찌 기도는 다음에 하자하며 안일하며 나태해졌을까 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유황 불 못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그 다음이 바로 나라면 주님은 내게 무어라 하실까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 집사, 권사, 장로,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교회에 다닌 것이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오늘 두 본문은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1.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삽니다.

 

서신서 본문 고전 10:32-33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다른 이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서 남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힘쓰는 삶을 삽니다.

 

거치는 자란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자란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쓴 뿌리가 되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는 남에게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게 됩니다.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유대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당시 사회 권력 계급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행하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책망하고, 가난하여 소외되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는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친구로 대해주는 예수님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놀라운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귀신이 들렸다 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7:19-20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했습니다. 이들은 거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23:15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남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라는 말씀처럼 내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 하지 않고 다른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유익을 주는 방향으로 신앙 중심이 잡혀 있는 모습으로 삽니다. 나를 위해 이기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죄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선이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몸 된 교회 안에서 항상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힘쓰는 자의 모습이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은 다툼을 일으키고 나와 남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습니다. 결국 그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한 마리는 이제 혼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쾌재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금붕어도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몸이 썩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우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욕심 부리다 보면 결구 나와 남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불어 믿어야 합니다.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장작이 떨어져 있으면 화력을 낼 수 없지만 함께 포개지면 큰 화력을 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우리들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더욱 배려해주는 자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자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 합니다

 

 

2.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삽니다.

 

복음서 본문 요7:14-19에 보면 명절, 즉 초막절 중간쯤 되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셨는데, 얼마나 가르침이 명확하고 깊고 넓은지, 얼마나 권위와 권세가 있는지 유대인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15절에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했습니다. 교육이라곤 전혀 받지 못한 예수님이 너무나 명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명한 랍비학교도 가지 못하셨고 공식적인 학교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은 그 당시 최고의 명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눈으로 볼 때 학교 근처도 가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그토록 심오한 가르침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 경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 비아냥거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 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인간 예수님 자신의 지어낸 말인지 금방 알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무학(無學)의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지어낸 말인지 쉽게 분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애당초부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교육 배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항상 힘씁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셨고, 승천으로 존귀하게 하셨고, 영광스런 하늘 보좌에 않게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순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도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 반역, 배신, 배교, 배반 등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랐습니다. 고라 자손들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비롯하여 성경에는 수 없는 불신앙과 불순종, 배신의 역사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믿는다 하나 사사시대의 수없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과 배교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함이 없이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라 매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징벌들은 믿음의 길을 벗어나 타락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성격이 있습니다. 죄악을 보고도 심판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공평의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심판 하셨던 것처럼 구약 곳곳에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형벌을 시행 하셨습니다. 심지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전쟁에서 죽게 하셨고, 포로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성전까지라도 이방의 손을 들어 폐허로 만드시었습니다.

 

자녀에 대한 징계가 없다면 이는 사생아요 고아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곧 인간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그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심판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징계를 통해 도로 낫게 하시고 싸매시며 한없이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역사가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순종의 발자취 따르다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서신서 본문 고전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무엇을 하든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람만 생각하면 못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고, 관용하는 마음이 생기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광! 이것은 최고의 목적입니다. 지고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통치자이십니다. 지금도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다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있습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까? 지금 멈추어야 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자기가 영광 받으려 하다가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교만하여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 사단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거부하고 금식하고 채식만 먹었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을 알았지만 금 신상에게는 절할 수 없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았지만 하루 세 번 하던 기도를 쉴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만 신경을 썼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귀를 다 바쳐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였습니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훌륭합니까? 그러나 자기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물맷돌 하나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나간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출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갔습니다.

 

서신서 본문 33에 보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33)했습니다. 여기 보면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돈으로 영광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사치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 맞게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힘썼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거침이 없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도록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을 위한 근심입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영적인 근심입니다. 내가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한 근심,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 언행에 대한 근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알고도 행치 않은 것에 대한 근심,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외면한 것에 대한 근심, 하나님 보다 세상을 사랑한 것에 대한 근심 등은 회개를 이루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바른 믿음으로 사는 것 때문에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과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한 마디 중얼거렸다. , 저런 뻔뻔한 양반을 봤나! 힘없는 어린 아이를 걷게 하고 어른인 자기 혼자서만 당나귀 등에 타고 가다니!그래서 노인은 당나귀에서 내리고 대신 소년을 태웠습니다. 또 한참이 지난 뒤 어떤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저런 못된 녀석을 봤나! 노인을 걸어가게 하고 젊은 녀석이 혼자 당나귀에 올라타고 가다니!만나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비난을 던지고 지나가는 바람에 누구 말을 들어야 좋을지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습니다. 이들 부자가 마을에 돌아올 때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당나귀를 떠메고 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다 들도록 행동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 다 들도록 행동하다가 자기 주관성이 사라지고, 가장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도들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하고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식은,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삽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