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도 큰 것 (잠 17:1-3)
작아도 큰 것 (잠 17:1-3)
이 시간에 “작아도 큰 것”이라는 제목입니다. 수수께끼가 생각나는 제목입니다. 작아도 작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요? 겨자씨인가요? 씨앗은 작지만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니까요? 베들레헴일까요? 마2:6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했으니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관점에서 작아도 작지 않는 것, 작아도 큰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아도 큰 것은 무엇일까요?
1. 감사하는 것입니다.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행복은 많은 것에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 백낙찬 선생은 "인생을 돈이나 부귀로서 낙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한다." 하면서 “만족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성자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 그렇게도 밝게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으며, 욕심 없이 오직 지금 당장 일에만 전념한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대답입니다.
우리는 1절 말씀에서 감사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고기가 집에 가득하지 않아도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4:15에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그랬습니다. 감사하면 은혜가 더하여 넘칩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선은 작아도 감사하면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복은 꼭 많이 받아야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가졌다는 큰 재물, 남이 받았다는 큰 능력, 남이 간증하는 큰 체험, 큰 은사 받지 못했어도 감사하면 더 큰 은혜를 누립니다.
엡1:4-6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를 지옥 불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택하여 주신 것만 생각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엡2:2-3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자들이었는지 생각하세요.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욕심 버리세요. 욕심이 많아서 감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욕심 버리고 감사하면 은혜가 커집니다. 나 같이 죄악 되고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택함을 받은 것만도 감사해서 늘 감사하면 그 감사로 인해서 우리 믿음이 온전해지고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2. 겸손하는 것입니다.
2절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여기 “종”이 나옵니다. 당시 종이란 권리란 없고 의무만 있는 하찮고 불행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에 우리나라에 반상제도가 있을 때 상인의 집에 자손이 출생하면 기뻐하지 않고 울었습니다. 너도 부모를 잘못 만나 대를 이어 종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종은 슬기로웠습니다. 동화에 나오는 이솝과 같은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괴팍하고 오만하고 방탕한 구제불능의 주인의 아들을 다스렸을 뿐 아니라 주인 아들 형제들 축에 자기도 끼어 그 유업을 나누어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인과 그 자녀들에게 영웅이나 보배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원리원칙이나 강압으로만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 지혜를 겸손이라고 봅니다. 지혜가 아니고는 2절의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보면 지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광주에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수 있는 괴팍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말이 청산유수라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는 할머니이었습니다. 아주 기가 세기로 유명한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저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라며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조용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며느리를 초기에 잡지 못하면 큰일난다.’ 그래서 처음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생으로 트집을 잡고 일부러 모욕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천만 뜻 밖에도 의연했고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며느리는 그때마다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한 번은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느냐?" 하고 생트집을 잡았지만 며느리는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 다소곳하게 머리를 조아리니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 한 번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 며 뭐라고 할 일도 아닌데 모욕을 줬습니다. 그렇지만 며느리는 웃으며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 식이니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말대꾸라도 해야 큰소리를 치며 나무라겠는데 항상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저 시어머니 발밑으로 기어들어 가니 불안한 사람은 오히려 시어머니 쪽이었습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얼마 가지 않아 시어머니가 그러더랍니다. "아가, 내가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 알아서 해라." 얼마나 지혜로운 며느리입니까?
이처럼 세상에 겸손보다 더 큰 덕목은 없고 겸손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습니다. 겸손하면 주인도 주인의 아들도 다 다스릴 수 있고, 주인의 재산까지도 얻을 수 있듯이, 우리가 겸손하면 우리의 완악한 마음도 다스려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기업, 온갖 아름다운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낮추어 보세요. 은혜와 복이 넘치지 않다면 더 낮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3. 연단 받는 일입니다.
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연단이란 훈련입니다. 훈련은 강제성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자행자지하던 사람을 강제적으로 훈련시키니 얼마나 힘들겠니까? 군에서 뭐가 힘듭니까? 반복이 힘듭니다. 선착순해서 달려갔다 왔는데 또 반복 또 반복 심장 멈춥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계속 반복훈련입니다. 원래가 훈련은 반복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도가니와 풀무는 쇠를 달구거나 녹이는 것입니다. 그 연단이 혹독합니다. 하나님 두렵지 않으면 맘대로 해보세요. 하나님의 연단 만만히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우리가 순종해야지 하나님의 연단이 철회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전에는 “연단”이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고 당해도 탈출할 궁리만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관심의 비중에서 보면 연단은 작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연단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 속에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을 수 없어요. 교회 나오지 않을 수 없어요. 열심히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봉사와 섬김 생활하지 않을 수 없어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을 붙들고 갈망하지 않을 수 없어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욥7:17-18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훈련하실 때는 정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습니다. 이때는 순종이 제일입니다. 회개해서 참 믿음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오실 때 작게 오셨습니다. 작은 나라, 작은 마을, 작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누구 하나 알아 줄 수 없이 작았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4:10) 작지만 작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작지만 작지 않은 감사의 신앙, 겸손의 자세, 연단의 믿음 가지고 큰 믿음과 영광을 이루어내시는 큰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