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가복음

달리다굼 신앙 막5:33-43,

nam씨 2017. 7. 6. 21:32


달리다굼 신앙 막5:33-43, 살전1:2-10

 

얼마 전 체첸 반군에 의한 테러 사상자 중 대부분이 어린이들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런 슬픔은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픔의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래 전 개구리 소년들이 이유도 없이 사라졌다가 몇 해 전 유골로 발견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범인들에 의해 유괴 되어 죽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가족은 물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를 찾아갔습니다(5:41) 예수님은 아이로의 부탁을 받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 그 아이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하시니 아이가 살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달리다소녀’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활동하는 건강한 소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병든 소녀와 같이 시들시들한 모습을 가지거나 죽은 소녀처럼 죽은 신앙의 모습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기쁨 대신 염려의 마음을 줍니다. 소녀가 주님 은혜로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오늘 우리도 건강한 신앙을 되찾아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달리다굼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달리다굼 신앙은,

 

1.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입니다.

 

5:39-40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을 비웃은 사람들은 헌화하며 울고 떠드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장례의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소녀를 위하여 어떤 책임이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장례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웃는 냉소적인 사람들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신앙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일에 무지하기 때문이지만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불신앙의 모습으로 사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급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또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불신앙으로 불평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은 노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런 불신적인 삶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떤 죄 보다도 불신앙의 죄를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큰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더욱 기뻐하십니다. 복음서 본문에 12년 동안을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 주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연약한 몸으로 무리들을 헤치고 주님의 옷자락 잡는 순간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드러내시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내 딸을 좀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연약한 믿음으로 불신앙에 빠지면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큰 관심사중 하나는 건강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여건이 자유롭고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좀 아파도 혹시 노종양이 아닌가? 소화가 잘 안되어도 혹 위암에 걸린 것이 아닌가? 또 조금 피로한 기색이 나타나도 간염이나 당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밤에 잠이 오지 않아도 노이로제는 아닌가? 기침이 조금 심해져도 혹 폐결핵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마음이요, 환경을 초월한 평강의 마음입니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살전1:6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편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면 모든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 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은 물론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는 자와 사별 앞에서도 평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죠지 뮬러는 어느 날 40년 동안 동고동락해오던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는 아내를 잃은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세일렘 교회의 저녁집회에서 밝은 얼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제 아내를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 온 고뇌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평안히 이르게 하셨습니다. 지금쯤 제 아내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감격에 차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기쁩니다.”

믿음 없는 불신앙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불신앙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믿는 성도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으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2.영적침체 상태에서 일어난 장성한 신앙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다 시련을 만나면 엘리야가 롬뎀 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구한 것처럼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범죄 하고 한동안 영적 침체에 빠져 괴로워 한 것처럼 형통의 때에 깨어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에 들어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불신의 소리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소유했던 믿음을 계속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하셔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장성한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확신 가운데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 성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는 많은 환난 중에서도 사도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만한 훌륭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살전1:4-5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말로만 믿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가진 견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성도의 은혜 체험은 장성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복음서 본문에 낙심하는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집에는 훤화하는 소리와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울음 바다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이는 믿음도 부활의 소망도 없는 현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 다 배제시키고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내 안에 불신앙의 요소, 부정적인 요소,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밭에 있는 돌을 골라내듯 골라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위를 보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 안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눈이 너무 지쳐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과 마음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121:1-2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했습니다. 우리의 심신이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도우심을 구할 때 새 힘을 얻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견고한 믿음, 장성한 믿음, 활력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 침체에서 일어나 장성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형식적인 믿음에서 일어나 순종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가 2차 전도 여행 때 동료들과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는데, 그 감사의 이유를 3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말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행위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은 소녀가 죽은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 순종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 희생과 수고가 없는 사랑, 인내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소망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순종과 행위가 따라오는 믿음이라야 살아 있는 믿음이고,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사랑이라야 참 사랑이며,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소망이라야 진정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믿고서 삶의 형편이 좋아지거나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짐으로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복음을 받았으며, 복음 전파자들과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6).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9)” 더 나아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그들로부터 퍼져나갔고, “하나님을 향하는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두루 퍼졌습니다(7-8). 그들의 믿음은 입술로만 말하는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순종의 행위가 따르는 산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내게 손해가 와도 과감히 버리고,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싫어도 순종하는 신앙이 산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의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무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 가운데 양조장을 크게 짓고 개업 예배를 드리게 된 이가 있었습니다. 개업 예배를 마치고 이제 마지막 순서인 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목사님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오늘 예배드리고 내일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이 열리면 엄청난 술이 생산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 하나님이시여! 제발 오늘 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이 양조장 문이 내일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내용의 축복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후 축하 파티를 하려다가 모두 당황하여 돌아가 버렸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했습니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후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살면서 죄와 멀리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자는 주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의 소욕을 따라 살지만, 산 신앙인은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죄와 싸우게 되고, 죄를 미워하고 버리게 됩니다. 이 신앙이 산 신앙이요, 달리다굼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달리다굼 신앙은,

 

1.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입니다.

 

2.영적침체 상태에서 일어난 장성한 신앙입니다.

 

3.형식적인 믿음에서 일어나 순종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