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왕의 입성 마태21:1-11

nam씨 2017. 4. 8. 10:01


왕의 입성  마태21:1-11  종려주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나이 12세가 되면 누구든지 일년에 한번씩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2세 때부터 매년 한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을 것이며 공생애 기간에는 적어도 3번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께서는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어 매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고 나귀 주인이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하셨고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걷옷을 벗어서 나귀의 등에 깔았고 많은 사람들이 길에 옷을 벗어서 양탄자를 깔듯이 깔았고 승리와 영광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라오는 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소리를 치며 환영하고 영접하였습니다.

 

 

구원을 베푸실 왕이시다.

구원은 예수님이 주셔야지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 뿐입니다.불신자가 죽은다음에 가족들이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이 구원을 얻었을까요 할 때가 목회의 제일 어려운 때입니다.자식이 믿거나 혹은 가족 중의 한 분이 믿어서 불신자의 장례식을 힐 때에는 무슨 말을 전해야 할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가족을 위로하는 것이 장례식인데 이럴 때에는 전도나 설교밖에 따로이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우리에게 주실 분이 없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회사를 가는 일도 급하고 시집 장가 가는 일도 급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일도 급하지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입니다.흑자는 구원의 확신을 교만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아이구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어떻게 알아, 그것은 예수님만 아시는 일이지이런 사란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믿으면 구원하시겠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믿느냐 안믿느냐 입니다.“네가 믿으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내가 믿으면 내가 구원받고 내 가족이 구원받고 교회의 모든 성도가 구원에 이르므로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그것에 우리의 전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봉사하고 남편은 안내를 사랑하고 이웃을 돕고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섬기는 모든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매일 혼자서만 보따리 들고 교회만 다닐 때에 그 남편이 저런여자 때문에 예수님을 안믿겠다고 한다면 그 여자분은 차라리 교회를 며칠 안나와도 남편의 마음을 돌려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우리에게 메시야가 임하신다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매일 와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겸손하신 왕이시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란 천대받는 사람들이 타는 값싼 동물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표시로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여기 겸손이라고 번역된 야니라고 하는 단어는 온유라고도 번역이 됩니다.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나귀란 가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난하시고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 문제가 걸려 있다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고 믿어야 됩니다.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죄문제, 죽음문제, 세상의 모든 얽매인 것들을 주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분은 비록 그 기도의 방향이 잘못 나간다 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이 큰 것입니다.안믿는 사람은 기도할 능력도 없고 구하지도 않습니다.그래서 욕심으로라도 하나님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므로 우리는 그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세상에서 지위가 정하고 버티고 계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앞에 나갈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겸손하시고 가장 낮고 낮은 자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실패할 때나 승리할 때나 언제든지 주님 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하나님 아버지하고 주님을 부르는 그 심령 속에는 이미 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교제가 되고 있습니다.인간들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교만한 아음이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이 낮은 자세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들을 벌레 취급하듯 하셨다면 아무도 그 앞에 안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겸손하시고 낮게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 은혜인지 모릅니다.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자세도 이런 자세여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평화의 왕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입성하십니다.

그원전 500년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99절에서 이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하셨습니다. 군마를 타고 승리의 팡파례를 울리며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동물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것이며 겸손한 짐승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겸손하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누구를 모셨느냐에 따라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교만과 탐욕의 주인인 사탄이가 들어 있다면 우리는 늘 교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탐욕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라는 육신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며 마음에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8:5-6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일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늘 고통스럽고 불안하며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면 우리는 평안을 얻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겸손하신 주님을 모실 때에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며, 평화를 누리며 쉽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지배하고 계시다면 나는 염려와 근심이 없을 것이며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사는 다는 말은 내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2:5이하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자신을 비어 버리신 겸손하신 마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순종의 마음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신 희생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땅에 늘 무서운 전쟁이 끝이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끝없는 전쟁으로 기근이 일어나고 수 많은 사람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가정에 평화가 깨지고 갈등과 불화가 있어서 이혼을 하게 되고 아이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서 방황을 하고, 술에 취하고 마약을 마시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겸손하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과 우리 민족과 이 땅 모든 곳에 평화가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승리의 왕이시다.

1-5절에서 예수님의 입성은 곧 승리의 입성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아마 이 모습을 본 무리들은 예수의 화려한 왕위등극을 보지 못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는 한갖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의 자만심과 이기적인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무리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였다면 메시야가 오실 때 어떤 모습일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은 자신들이 처한 압제의 상황에서 막연하게 어떤 돌파구로서 메시야를 고대하였을 뿐 메시야 도래에 대한 깊은 생각과 준비가 없었다.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그에 따를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깨닫지 못하고 2,000년 전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또한 자기 이기적인 생각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 욕심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겸손의 왕이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셨기 때문에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성도를 아름답게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무리들이 예수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했다고 해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외형상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승리의 입성이었다. 대적자들의 시기와 질투, 음해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심으로 대적자들에게 승리하셨다. 초라한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모든 무리들에게 겸손과 온유의 왕으로 당당히 입성하였으니 그 또한 승리였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만유의 왕이 되셨으니 이 또한 승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