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유순한 대답, 사랑, 분노
15장:
[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본문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말한다. 유순한 대답은 온유와 겸손의 심령에서 나오며, 윗사람이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을 가진 자에게서 나온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마 11:29)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셔서 맺는 열매이다(갈 5:23). 잠언 25:15는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했다. 본인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도 온유한 말은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할 것이다.
미디안 전쟁에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분노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사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겸손히 말함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었다(삿 8: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교훈하였고(갈 6:1), 그는 또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교훈하였다(딤후 2:25).
본문은 그러나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말한다. 과격한 말은 교만한 마음과 상대방을 무시함에서 나온다.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종들을 모욕했던 나발의 과격한 말은 다윗을 격노케 만들었었다. 지혜로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의 겸손한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면 나발은 아마 그 날 즉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었다(삼상 25:10-11; 23-41). 또 르호보암의 포학한 말은 백성들을 매우 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왕국은 둘로 분열되었다(왕상 12:13-14).
우리는 주의 교훈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으로 항상 자신을 단장하자. 그래서 자신에게 불쾌한 일이 있을 때도 유순한 대답을 하는 자가 되자.
[2절]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본문은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지혜자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 여기에서 지식은 참 지식, 바르고 좋은 지식, 곧 하나님께서 성경에 주신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선히 베푼다’는 말은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히 사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활용 능력이다. 지혜 없는 지식은 유익이 없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뜻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하고 죄를 버리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쏟는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것, 잘못된 생각과 판단, 선입견과 편견, 오해, 잘못된 혹은 과격한 감정, 건설적이지 못하고 덕스럽지 못한 말과 행동 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우리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가 되고 또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자가 되자. 그러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항상 구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눈’이라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 즉 하나님을 사람과 같은 모양을 가지신 존재로 표현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그는 생명 없는 우상과 다르시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신(렘 23:24)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정확하고 완전하게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잠언 15:11, “음부와 유명(幽冥)[멸망의 깊은 웅덩이]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하나님의 눈은 완전한 감시용 카메라(CCTV)와 같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인생의 도덕적 행위이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인들의 악행도 아시고, 의인들의 선행이나 심지어 억울함도 아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는 선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와 선만 행하자.
[4절]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사람의 혀 곧 말은 인격의 표현이며 성화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의 온전함이 온전한 것이다(약 3:2). ‘온량한’이라는 원어(마르페)는 ‘건강한, 치료하는, 평온한, 부드러운’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평안과 유익을 주고 다른 이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혀를 말한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본문은 온량한 혀, 곧 건전하고 부드럽고 선한 말이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생기와 활기를 준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기쁨과 활기를 주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본문은 그러나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말은 악하고 비뚤어진 것을 말한다. 악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악하고 비뚤어진 말을 하는 자, 남을 함부로, 파괴적이게 비난하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패려한 혀를 버리고 건전하고 선하고 부드러운 혀를 가지자.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기쁨과 활기를 주는 자가 되자.
[5절]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본문은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고 기른 부모를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나이가 많고 인생 경륜이 있는 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자도 가리킬 것이다. 교회의 경건한 직분자들도 영적 아비들이다. 아비의 훈계는 자녀에게 바른 길을 지시하고 잘못된 길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고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사랑과 본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이 미련한 까닭은, 경건한 아버지가 주는 지혜와 지식과 경험의 말씀, 곧 바르고 선한 길을 거부하고 잘못된 길로 가서 마침내 그 자신이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러나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슬기로운 자]이다”라고 말한다. 부모나 윗사람을 공경하는 자는 순종할 것이며 부모나 윗사람을 무시하는 자는 거역할 것이다.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은 바른 길을 가고 잘못된 길을 피하며 또 부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의의 길, 평강의 길, 형통의 길을 가는 것이니까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이다.
우리는 지식과 사랑과 모범을 가지고 자녀들과 아이들을 훈계하자. 또 자녀들과 아이들로 부모와 어른들의 훈계를 잘 듣게 하자.
[6절]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의 집에는 영육의 많은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영적인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경건함, 말씀의 지식, 의와 선과 진실의 덕이 있다. 그것들은 귀한 보화들이다. 그에게는 육적인 보물도 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을 약속하였다. 의인은 물질적 여유를 가질 것이다. 잠언 3:16, “그[지혜의]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富貴)가 있나니.”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금생(今生)의 약속 속에는 건강과 물질의 복이 포함될 것이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된다,” 다시 번역하면,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 정당한 소득이라도 그러할 것이며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일 것이다. 잠언 13: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했는데, 그 결과 그는 그 자녀들과 더불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죽임과 불사름을 당하였다(수 7장).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만 살자.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치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자.
[7절]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잠언 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인격은 말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지혜자의 인격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로 나타난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이 전파하는 지식은 진리의 지식 곧 참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과 평안에 대한 지식, 형통과 행복과 영생에 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그는 이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한다. 그것이 전도요 간증이다. 그는 자녀들에게는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전파한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는 자이다. ‘마음이 정함이 없다’는 원문(로 켄)은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미련한 자는 세상적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파할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과 죄에 대한 지식,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에 대한 지식, 평안에 대한 지식이 없고 오직 미련한 것을 말할 뿐이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나타내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참된 지식, 곧 하나님과 구원과 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8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이다. 그것은 신약 교인들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 악인들도 때때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기 양심의 평안과 위안을 위해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들을 거역하는 자들의 제사를 미워하신다. 이사야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헛되다.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악인의 제사는 자신의 악에 외식(外飾)의 악을 더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고(삼상 1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호 6:6).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신다”고 말한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예배이든지 기도이든지 헌금이든지 단순히 종교적 의식만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자.
[9절]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길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악인가? 악은 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 선은 하나님 앞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모욕하고 그에게 해(害)를 끼치는 것이다. 그 해(害)는 영적, 정신적, 육신적, 물질적 해를 다 포함한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해이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정신적 해이고, 구타, 성폭력, 살인 등은 육신적 해이고, 도적질이나 남의 돈을 떼어먹는 것은 물질적 해이다. 이런 해들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들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사랑,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경건하게 살 것이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신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와 재앙이 임할 것이다. 그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과 평안이 임할 것이다. 참된 평안과 행복이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의만 따르며 의만 행하자.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10절]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본문은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도(道)는 길 곧 인간의 바른 생활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좁게는 십계명이요 넓게는 신구약성경 전체이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배반하는 자’라는 원어(오제브)는 ‘저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성경의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도, 곧 성경의 바른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공의와 사랑의 징계이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요 참 아들의 표요 거룩과 의로 인도하는 것이다(히 12:6, 8, 10). 또 ‘견책’이라는 원어(소카캇)는 ‘징계’라는 말(무사르)과 비슷한 뜻이다.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와 견책을 경히 여기지 말고 달게 받아야 하는데(잠 3:11),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음과 멸망을 당할 것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 곧 인생의 정로(正路)인 성경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고 그대로 잘 지키자. 또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지 말고 달게 받자.
[11절]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본문은 “음부와 유명(幽冥)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난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음부’(쉐올)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또 ‘유명’(幽冥, 아밧돈)은 ‘멸망의 깊은 웅덩이’라는 뜻으로 지옥과 동의어로 쓰인다. 무덤 깊은 곳도, 멸망의 깊은 웅덩이인 지옥도, 하나님 앞에는 다 드러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땅의 깊은 곳도 다 보시고 지옥의 깊은 곳까지도 다 아신다. 물질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눈을 떠나 있지 않다. 하늘 높은 곳도, 바다 깊은 곳도, 땅 깊은 곳도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 욥기 26:6,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아밧돈)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시편 139:8, 12,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본문은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물질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영의 세계도 다 아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 . .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도, 인간의 마음의 선함과 악함, 진실과 거짓을 다 아신다. 그는 인간의 은밀한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12절]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는 ‘경멸하는 자’(BDB, KJV), ‘조롱하는 자’ (NASB)라는 뜻이다. ‘견책받기’라는 원어(호케아크 로)는 ‘그를 책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경멸하는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남을 경멸하는 자가 그를 책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미련하고 거만하고 자기의 행위를 바른 줄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잠언 1:7,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2:1,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본문은 또 그는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한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남을 경멸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않는 까닭은 자기가 남보다 더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지적과 충고 혹은 책망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또 그와 비교되므로 자신의 미련함과 부족과 악함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책망 듣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부족을 지적받고 그것을 고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충고]를 듣느니라.” 잠언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의 길은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결국 평강과 형통과 행복을 준다.
우리는 거만한 마음으로 남을 경멸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힘써 지키는 자가 되자.
[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을 직역하면,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하나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이 있느니라.”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과 영과 몸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soul)은 영(혹은 영혼)의 활동작용 혹은 활동영역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로 나타난다. 몸은 단독으로는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이 없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영육(靈肉)의 결합체로서 활동한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는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 또한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지기 쉽다. 또 반대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기 쉽다.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밝게, 빛나게 하지만,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 혹은 상한 심령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얼굴에 어느 정도 나타난다. 기쁜 마음은 기쁜 얼굴로, 슬픈 마음은 슬픈 얼굴로, 평안한 마음은 평안한 얼굴로, 고통하는 마음은 고통스런 얼굴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은 미움과 사랑의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우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도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빌 4:6-7).
우리는 죄 짓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영과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며 그것이 얼굴에도 나타나게 하자.
[14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연합체이며 거기에서 말과 행동이 나온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 그 지식은 참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책인 성경의 지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지식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듣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14- 16,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인 것, 미움이나 음란 등 부도덕한 것, 또 말의 실수, 남을 비방함, 게으름, 사치와 낭비 등을 포함한다. ‘즐긴다’는 원어(라아)는 ‘먹고산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들은 미련한 것을 먹고살며 미련한 것들을 나타낸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잠언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먹고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참 지식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사모하자.
[15절]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본문은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다”고 말한다. ‘고난받는 자’라는 원어(아니)는 ‘핍박받는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그 날이 다 험악하다’는 말은 그의 날들이 굶주림이나 헐벗음, 멸시나 천대 등의 어려움을 당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즐거운 자’라는 원어(토브 레브)는 ‘마음이 좋고 기쁜 자’라는 뜻이다. 마음이 좋고 기쁜 자는 잔칫날이 따로 없고 항상 잔치할 것이다.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 성도의 마음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이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 될 뿐이다. 성도가 마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성령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4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한다. 또 성경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가 기쁨이라고 증거한다(갈 5:22-23).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환경 여건이나 신체적 조건을 초월한다. 성도는 심지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했으나 기뻐하며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5:40-41). 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많은 매를 맞았고 옥에 갇혔으나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행 16:25). 또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중에서도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1).
영육으로 고난이 많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 항상 기뻐하자.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의 행복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가산이 적다,’ ‘크게 부하다’는 원어(메아트, 라브)는 각각 ‘적다,’ ‘많다’는 단어이다. 그것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이 적거나 많다는 뜻이다. 사람이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론 돈이 없어야 행복하다거나 돈이 넉넉한 것이 행복에 불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돈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고 돈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사람의 행복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본문은 사람의 행복이 평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본문에 ‘번뇌’라는 원어(메후마)는 ‘혼란, 소란, 불안’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걱정거리’(trouble)(KJV), ‘소란’(turmoil)(NASB, NIV)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심리적인 불안이나 건강상의 걱정거리, 물질적, 환경적 걱정거리 등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거리들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돈이 좀 부족해도 평안하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참 평안과 행복을 주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레 25:18-19; 레 26:5-6; 시 4:8; 마 11:28; 요 14:27). 그것은 몸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환경적 평안을 포함한다. 민수기 6:26, (아론의 축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만 순종하자.
[17절]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본문은 특히 가정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여간’은 ‘보통’이라는 뜻이다. ‘채소를 먹는다’는 말은 부잣집이 아닌 보통의 가정을 가리킬 것이다. 비록 가정의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채소만 먹는 형편이라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정적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가 있어 살진 소를 먹는 부잣집일지라도 가족들 간에 서로 미워함이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부요 자체가 가정적 행복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물론 물질적 여유는 인간의 삶이나 가정의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그것이 평안과 사랑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잠언 15:16에서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고 또 본문도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미움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고 평안과 행복을 빼앗아간다. 가족들은 언제 서로 미워하게 되는가? 그것은 가족들 중 누가 이기적(利己的)이게 행동하거나 가인처럼 형제를 시기하거나 남을 욕하고 구타하고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해를 끼칠 때일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의 부족과 허물을 감싸고 용서하고 상대를 관용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때 마음의 평안과 기쁨도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단지 물질적 부요에 있지 않고 평안과 서로 사랑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평안을 얻고 서로 사랑하며 살자.
[18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본문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공의로 노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분노도 있다. 자신의 잘못된 선입견과 추측 혹은 오해로 인해 부당하게, 실수로 분노하는 경우가 있다. 또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상대의 실수에 대해 지나치고 과격한 감정이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미움의 감정은 때때로 그런 지나친 분노의 실수를 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도서 7:9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고 말한다. 분노는 때때로 의견 대립에서 생긴다. 무슨 일에든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여러 의견들이 다 좋은 것들이며 각각 상당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후 회의의 절차를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건전한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어떤 다툼도 피할 수 있다.
성도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 때 필요한 덕목들 중에는 사랑과 겸손이 있고 또 특히 자기 통제력 즉 자제심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나친 감정을 통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겸손과 사랑과 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잠 14:29; 19:11). 또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약 1:19).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분노를 쉽게 내지 말고 더디 내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과 겸손과 자제심을 가지고 처리해야 한다.
[19절]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자기 일에 불성실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이다. 게으름은 악이다. 가시울타리는 가시가 찔러 가기 어려운 길을 가리킨다. 게으른 자의 길이 가시울타리 같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말한다(잠 10:4). 또 게으른 자에게는 할 일이 밀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른 자가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잠 12:27). 또 게으른 자는 의지가 약해서 난관을 잘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며 주리게 만들고(잠 19: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말한다(잠 19:24; 26:15).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大路)니라”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이다. 그는 물론 부지런하다. 부지런하게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자의 길이 대로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와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일 것이며, 할 일을 그때그때 다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며, 또 의지가 강해져서 웬만한 난관은 잘 극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1:1-3은 같은 진리를 보인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20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고 말한다. 잠언 10:1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즐겁게 하는 방법은 그의 경건하고 선한 교훈을 순종하여 경건하고 선하게 살고 범사에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잠언이 주는 지혜의 교훈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즐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일이요 자신에게 복이 되는 지혜로운 일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는 방법은, 그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들의 교훈을 버리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거역함으로써이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부모에 대한 멸시이다. 그런 사람은 실상 그 아비의 근심이고 그 어미의 고통이다(잠 17:25).
부모를 멸시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5계명에 약속된 복, 즉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한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들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도 지혜로운 성도가 되고 사회에서도 좋은 시민이 되자.
[21절]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본문은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미련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어도”이다. ‘미련한 것’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 사람의 좁은 소견을 따라 행하는 것, 사람의 양심에 바르지 못하고 악하게 행하는 것, 즉 한마디로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한 자’라는 원어(카사르 레브)는 직역하면 ‘마음이 없는 자’라는 말로서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10)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다. 사람이 생각이 있다면 미련한 일에 대해 슬퍼하고 미워하고 탄식하고 멀리해야 하는데, 무지한 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죄의 형벌은 죽음과 멸망이기 때문에, 미련한 것 곧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무지하고 생각이 없고 지혜가 없는 행동이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그는 그 길을 바르게 한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르고 복된 길이다.
우리는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생각이 있는 자, 지혜가 있는 자가 되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또 우리는 미련한 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길을 걷자. 그것이 지혜 있고 복된 삶이다.
[22절]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본문은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11:14도 비슷하게 말하기를,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할 것이다. ‘의논’은 ‘회의, 토의, 조언’이라는 뜻이다. 보통 한 사람의 생각보다 두 사람 이상의 의논과 조언이 낫다. 의논이 없으면 계획들이 좌절되는 까닭은, 개인의 생각의 미흡함과 제한성, 독단적 생각과 고집과 치우친 감정 등으로 인한 실수, 또 경험 미숙으로 인한 예상치 않은 일들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 머리를 맞대고 그 문제를 의논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고 그런 것이 없으면 그 일을 잘 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모사는 조언자, 참모를 가리킨다. 조언자가 많으면 무슨 일이든지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0:18은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하고, 잠언 24:6은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회의의 필요성과 유익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관계자들, 책임 있는 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먼저 성경의 교훈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또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인내하며 듣고 다함께 그 일을 연구하고 숙고하고 또 필요한 경우는 그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또 충분히 토의한 후 최종적으로 표결하여 다수의 의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 때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믿음과 겸손함과 포용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독단적 생각으로 하지 말고, 성경 진리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경험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서로 의논하며 행하자.
[23절]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본문은 “사람이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 입의 대답에는 좋은 대답도 있고 나쁜 대답도 있다. 좋은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이요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선하고 덕스러운 대답이요 진실한 대답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어리석은 대답, 남을 해치는 대답, 악하고 파괴적인 대답, 미움에서 나온 대답, 거짓된 대답이다. 좋은 대답은, 듣는 이에게 유익도 주지만, 말하는 자신에게도 기쁨을 일으킨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 그의 나병의 깨끗함을 받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노하여 떠나려 하였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선하고 지혜로운 충고를 한 종들은 그들의 마음도 크게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듣는 이에게 상함과 불쾌함과 불안함과 낙심함을 줄 뿐 아니라, 말하는 자신에게도 불안을 가져올 것이다.
본문은 또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경우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것을 동문서답이라고 말한다. 또 상대에 대한 오해나 이기적 욕심 때문에 잘못된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말, 때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때에 맞는 말이란, 이해가 필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말이며, 상대방에게 위로나 격려가 필요할 때 그를 낙심시키지 않고 위로 격려하며 또 잘한 것은 칭찬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아첨하지 않고 권면이나 책망이 필요할 때 권면하고 책망하는 말이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한다. 때에 맞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고 선하다.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상대방의 형편과 말을 잘 이해하고 때에 맞는 바르고 적절한 말, 곧 상대방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자가 되자.
[24절]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 위로 향한다”이다(KJV, NASB, NIV). ‘생명의 길’은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길이다. 생명은 귀하고 복되다. 그래서 우리는 생일을 축하하고 생명의 건강한 보존을 위해 영양 있는 음식과 보약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병원 치료를 받고 좋은 약을 복용한다. 영생의 가치는 더 크다.
그런데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뜻을 알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진다. 죄는 인생에게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지혜는 의를 얻고 의를 행케 하고 그 의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이 ‘위로 향한다’는 말은 천국과 영생의 나라가 현재 위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땅 속에, 어두움 속에 갇혀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실상 그가 세상을 초월해 계시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늘이라는 말 외에 하나님의 처소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다.
본문은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된다”고 말한다. ‘음부’(陰府)라는 원어(쉐올 לוֹא������)는 구약성경에서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무덤과 지옥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처소로서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고 죽은 자는 땅에 묻힌다. 산 자가 땅에 묻히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옥도 악인들이 죽은 후 형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곳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요 그 후에는 지옥 형벌이 있다. 그것이 어리석은 악인들의 길이다. 그러나 의의 보응은 생명이요 의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길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지혜로운 자가 생명의 길을 감으로 지옥에서 떠나 천국에 들어감을 알자. 우리는 오직 지혜자로만 살아가자.
[25절]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께서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모르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거역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무신다. 집은 가정과 가족들을 가리킨다. 사람이 교만하면 그와 그의 집이 망할 것이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하였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본문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부의 지계(地界) 즉 땅의 경계를 정하신다고 말한다. ‘정한다’는 원어(얏체브)는 ‘세운다,’ ‘견고케 한다’(fix, establish)는 뜻이다. 과부는 외로운 자이며 이 세상에서 때때로 무시와 부당한 취급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이다.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때때로 과부의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과부들을 돌보아 주시며 도우시며 그의 땅과 재산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같이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돌보시며 도우시는 자시다. 신명기 10:18,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원통한 일을 갚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시편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편 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우리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교만한 자가 되지 말자. 또 우리는 인간적 도움이 없다고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26절]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본문은 악한 꾀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꾀’라는 원어(마카솨보스)는 ‘생각들’(KJV, NIV), ‘계획들’(NASB)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생각들과 계획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5:4-5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선한 말은 정결하다고 말한다. ‘선한’이라는 원어(노암)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원문은 한글개역성경처럼 “선한[기쁨의] 말들은 정결하니라”(NASB)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또는 “정결한 자들의 생각들은 [하나님께] 기쁨의 말들이니라”(KJV)고 번역되기도 한다. 두 번역이 다 뜻이 통하는 것 같다. 악한 생각은 독한 말로 표현될 것이지만, 기쁨의 말은 깨끗하다. 또 ‘정결한 자들’은 악하지 않고 선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악은 더럽고 불결한 것이며 선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킬 것이지만, 정결한 자들의 생각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을 생각하고 선을 말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목적은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한 생각과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깨끗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하자.
[27절]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본문은 “이(利)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利)를 탐하는 자’라는 원어(보체아 베차)는 ‘토색하는 자,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라는 뜻이다. ‘해롭게 한다’는 원어(아카르)는 ‘소란케 한다’(disturb, trouble)는 뜻이다. 본문은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가 자기 집을 소란케 만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가정과 가족들에게 건강상, 경제상 어려운 일들을 만든다는 뜻, 즉 자기 가정을 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뇌물을 구하며 받는다. 잠언 17:23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정당한 이익만 구하고 부당한 이익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탐심을 버린 자이다.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 ‘산다’는 말은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고 형통하게, 즉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을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성경은 뇌물을 받지 말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디도서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디모데전서 3:8,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자기의 집을 해롭게 할 뇌물이나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도답게, 정정당당하게,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자.
[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고 말한다. ‘깊이 생각하다’는 원어(하가)는 ‘신음하다, 심사숙고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BDB). 야고보서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말하였고(약 1:19), 잠언 다른 곳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9)고 말하였다.
왜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말로 범죄하거나 실수하지 않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고 말한다. 시편 37:30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른다”고 말하며,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는다”고 말한다. 잠언은,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며 미련한 것을 쏟으며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증거한다(잠 12:23; 13:16; 15:2; 18:2).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의 입은 미련하고 악한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는 의인 되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결코 악한 말을 내뱉지 말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하자.
[29절]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자이며 악은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 교훈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악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며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시편 5: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22:15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그는]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한다. 의인은 메시야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야고보서 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제 성경 교훈에 순종하며 의롭게 삶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자.
[30절]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한다. ‘밝은 것’이라는 원어(마오르)는 ‘빛, 발광체’를 가리킨다. ‘눈의 빛’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려워 보인다. 그것이 사람의 눈의 시력이나 내면적 깨달음을 가리킨 것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의 내면적 깨달음을 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그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그러나 본문의 ‘눈의 밝은 것’ 혹은 ‘눈의 빛’이라는 말은 ‘밝은 눈’ (bright eyes)(NASB)을 가리킨다고 본다. 밝은 눈은 ‘기쁜 얼굴 모습’ (NIV)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눈의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밝은 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Amplified Bible). 어둠은 마음을 우울케 하지만,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집의 조명도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사람의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둡고 불쾌한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우울함과 불안과 불쾌함을 줄 것이지만, 밝은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본문은 또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한다”고 말한다. 나쁜 소식은 사람에게 근심과 걱정, 불안과 낙망을 주어 몸에 병이 들게까지 한다. 그러나 기쁘고 좋은 소식은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 평안과 소망을 주며 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잠언 25:25는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말한다. 좋은 소식은 시원함과 기쁨을 주는 것이며, 그런 소식은 몸에도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밝은 눈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복음을 전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건강까지 주는 자가 되자.
[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본문은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한다. ‘경계’라는 원어(토카카스)는 ‘책망, 꾸지람’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경계’ 곧 ‘생명의 책망’이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life- giving)(NASB, NIV) 혹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책망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듣는 귀’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 책망을 건성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마음으로 달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책망과 징계를 그런 태도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진심으로 달게 받는 자는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있다. 그는 지혜자이다.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불행과 죽음을 당하는 자는 결국 어리석은 자이지만, 의를 소유하고 의를 행함으로 평안과 생명을 누리는 자는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잠언의 여러 말씀들이 같은 교훈을 준다. 잠언 1:7-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경건한 부모의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지만, 그 훈계를 듣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잠언 4:13은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말한다. 훈계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훈계는 생명을 준다. 잠언 6:23도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한다. ‘훈계의 책망’ 곧 ‘징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 또 잠언 10:17도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고 말한다. 징계와 책망을 지키는 것이 생명길이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잘못 가는 것, 곧 죽음과 지옥형벌의 길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다가 영생에 이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32절]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본문은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BDB). 사람은 징계를 받을 때 자기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된다. 그러나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결국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사람의 불행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경히 여기는 자이다. 그는 외적,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요소만 중시하고, 영적, 도덕적 요소를 경히 여기는 자이다.
잠언 1:7은 미련한 자는 훈계를 멸시한다고 말한다. 잠언 1:29-32는, 악한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그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으며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또 잠언 8:35-36은,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는다”고 말한다. ‘견책’이라는 원어(토카카스)는 ‘책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나 징계의 고난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사람에 대한 지식, 구원의 지식, 영생의 지식, 평안의 길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의와 선을 구하며 행하는 자는 지혜와 형통과 승리를 얻을 것이다. 잠언 1:33은 “오직 나[지혜]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과, 현실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자. 그것이 참으로 영생과 행복의 길이다.
[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겸손히 그를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는 잠언에 자주 나오는 단어로서 ‘훈련,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 ‘지혜의 훈련’이라는 말은 ‘지혜로운 훈련’ 혹은 ‘지혜를 주는 훈련’이라는 뜻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무사르)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교훈을 잘 받을 것이며, 그의 교훈은 죄악된 일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그를 의의 길로 이끈다.
본문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겸손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겸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한하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로 알 때, 또 자신을, 유한하고 죄악된 피조물임을 바로 알 때 겸손할 수 있다. 또 사람은 겸손할 때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된다.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한 자리에 오른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고 그의 진노를 받아 수치와 불행을 당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를 얻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자. 또 이것이 지혜의 길이요 존귀함에 이르는 길임을 알자.
, 사랑, 분노
[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본문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말한다. 유순한 대답은 온유와 겸손의 심령에서 나오며, 윗사람이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을 가진 자에게서 나온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마 11:29)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셔서 맺는 열매이다(갈 5:23). 잠언 25:15는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했다. 본인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도 온유한 말은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할 것이다.
미디안 전쟁에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분노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사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겸손히 말함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었다(삿 8: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교훈하였고(갈 6:1), 그는 또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교훈하였다(딤후 2:25).
본문은 그러나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말한다. 과격한 말은 교만한 마음과 상대방을 무시함에서 나온다.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종들을 모욕했던 나발의 과격한 말은 다윗을 격노케 만들었었다. 지혜로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의 겸손한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면 나발은 아마 그 날 즉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었다(삼상 25:10-11; 23-41). 또 르호보암의 포학한 말은 백성들을 매우 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왕국은 둘로 분열되었다(왕상 12:13-14).
우리는 주의 교훈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으로 항상 자신을 단장하자. 그래서 자신에게 불쾌한 일이 있을 때도 유순한 대답을 하는 자가 되자.
[2절]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본문은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지혜자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 여기에서 지식은 참 지식, 바르고 좋은 지식, 곧 하나님께서 성경에 주신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선히 베푼다’는 말은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히 사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활용 능력이다. 지혜 없는 지식은 유익이 없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뜻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하고 죄를 버리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쏟는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것, 잘못된 생각과 판단, 선입견과 편견, 오해, 잘못된 혹은 과격한 감정, 건설적이지 못하고 덕스럽지 못한 말과 행동 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우리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가 되고 또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자가 되자. 그러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항상 구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눈’이라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 즉 하나님을 사람과 같은 모양을 가지신 존재로 표현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그는 생명 없는 우상과 다르시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신(렘 23:24)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정확하고 완전하게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잠언 15:11, “음부와 유명(幽冥)[멸망의 깊은 웅덩이]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하나님의 눈은 완전한 감시용 카메라(CCTV)와 같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인생의 도덕적 행위이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인들의 악행도 아시고, 의인들의 선행이나 심지어 억울함도 아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는 선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와 선만 행하자.
[4절]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사람의 혀 곧 말은 인격의 표현이며 성화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의 온전함이 온전한 것이다(약 3:2). ‘온량한’이라는 원어(마르페)는 ‘건강한, 치료하는, 평온한, 부드러운’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평안과 유익을 주고 다른 이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혀를 말한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본문은 온량한 혀, 곧 건전하고 부드럽고 선한 말이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생기와 활기를 준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기쁨과 활기를 주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본문은 그러나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말은 악하고 비뚤어진 것을 말한다. 악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악하고 비뚤어진 말을 하는 자, 남을 함부로, 파괴적이게 비난하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패려한 혀를 버리고 건전하고 선하고 부드러운 혀를 가지자.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기쁨과 활기를 주는 자가 되자.
[5절]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본문은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고 기른 부모를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나이가 많고 인생 경륜이 있는 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자도 가리킬 것이다. 교회의 경건한 직분자들도 영적 아비들이다. 아비의 훈계는 자녀에게 바른 길을 지시하고 잘못된 길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고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사랑과 본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이 미련한 까닭은, 경건한 아버지가 주는 지혜와 지식과 경험의 말씀, 곧 바르고 선한 길을 거부하고 잘못된 길로 가서 마침내 그 자신이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러나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슬기로운 자]이다”라고 말한다. 부모나 윗사람을 공경하는 자는 순종할 것이며 부모나 윗사람을 무시하는 자는 거역할 것이다.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은 바른 길을 가고 잘못된 길을 피하며 또 부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의의 길, 평강의 길, 형통의 길을 가는 것이니까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이다.
우리는 지식과 사랑과 모범을 가지고 자녀들과 아이들을 훈계하자. 또 자녀들과 아이들로 부모와 어른들의 훈계를 잘 듣게 하자.
[6절]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의 집에는 영육의 많은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영적인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경건함, 말씀의 지식, 의와 선과 진실의 덕이 있다. 그것들은 귀한 보화들이다. 그에게는 육적인 보물도 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을 약속하였다. 의인은 물질적 여유를 가질 것이다. 잠언 3:16, “그[지혜의]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富貴)가 있나니.”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금생(今生)의 약속 속에는 건강과 물질의 복이 포함될 것이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된다,” 다시 번역하면,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 정당한 소득이라도 그러할 것이며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일 것이다. 잠언 13: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했는데, 그 결과 그는 그 자녀들과 더불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죽임과 불사름을 당하였다(수 7장).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만 살자.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치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자.
[7절]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잠언 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인격은 말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지혜자의 인격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로 나타난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이 전파하는 지식은 진리의 지식 곧 참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과 평안에 대한 지식, 형통과 행복과 영생에 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그는 이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한다. 그것이 전도요 간증이다. 그는 자녀들에게는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전파한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는 자이다. ‘마음이 정함이 없다’는 원문(로 켄)은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미련한 자는 세상적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파할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과 죄에 대한 지식,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에 대한 지식, 평안에 대한 지식이 없고 오직 미련한 것을 말할 뿐이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나타내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참된 지식, 곧 하나님과 구원과 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8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이다. 그것은 신약 교인들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 악인들도 때때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기 양심의 평안과 위안을 위해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들을 거역하는 자들의 제사를 미워하신다. 이사야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헛되다.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악인의 제사는 자신의 악에 외식(外飾)의 악을 더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고(삼상 1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호 6:6).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신다”고 말한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예배이든지 기도이든지 헌금이든지 단순히 종교적 의식만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자.
[9절]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길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악인가? 악은 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 선은 하나님 앞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모욕하고 그에게 해(害)를 끼치는 것이다. 그 해(害)는 영적, 정신적, 육신적, 물질적 해를 다 포함한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해이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정신적 해이고, 구타, 성폭력, 살인 등은 육신적 해이고, 도적질이나 남의 돈을 떼어먹는 것은 물질적 해이다. 이런 해들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들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사랑,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경건하게 살 것이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신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와 재앙이 임할 것이다. 그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과 평안이 임할 것이다. 참된 평안과 행복이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의만 따르며 의만 행하자.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10절]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본문은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도(道)는 길 곧 인간의 바른 생활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좁게는 십계명이요 넓게는 신구약성경 전체이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배반하는 자’라는 원어(오제브)는 ‘저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성경의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도, 곧 성경의 바른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공의와 사랑의 징계이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요 참 아들의 표요 거룩과 의로 인도하는 것이다(히 12:6, 8, 10). 또 ‘견책’이라는 원어(소카캇)는 ‘징계’라는 말(무사르)과 비슷한 뜻이다.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와 견책을 경히 여기지 말고 달게 받아야 하는데(잠 3:11),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음과 멸망을 당할 것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 곧 인생의 정로(正路)인 성경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고 그대로 잘 지키자. 또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지 말고 달게 받자.
[11절]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본문은 “음부와 유명(幽冥)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난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음부’(쉐올)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또 ‘유명’(幽冥, 아밧돈)은 ‘멸망의 깊은 웅덩이’라는 뜻으로 지옥과 동의어로 쓰인다. 무덤 깊은 곳도, 멸망의 깊은 웅덩이인 지옥도, 하나님 앞에는 다 드러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땅의 깊은 곳도 다 보시고 지옥의 깊은 곳까지도 다 아신다. 물질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눈을 떠나 있지 않다. 하늘 높은 곳도, 바다 깊은 곳도, 땅 깊은 곳도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 욥기 26:6,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아밧돈)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시편 139:8, 12,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본문은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물질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영의 세계도 다 아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 . .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도, 인간의 마음의 선함과 악함, 진실과 거짓을 다 아신다. 그는 인간의 은밀한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12절]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는 ‘경멸하는 자’(BDB, KJV), ‘조롱하는 자’ (NASB)라는 뜻이다. ‘견책받기’라는 원어(호케아크 로)는 ‘그를 책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경멸하는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남을 경멸하는 자가 그를 책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미련하고 거만하고 자기의 행위를 바른 줄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잠언 1:7,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2:1,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본문은 또 그는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한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남을 경멸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않는 까닭은 자기가 남보다 더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지적과 충고 혹은 책망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또 그와 비교되므로 자신의 미련함과 부족과 악함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책망 듣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부족을 지적받고 그것을 고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충고]를 듣느니라.” 잠언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의 길은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결국 평강과 형통과 행복을 준다.
우리는 거만한 마음으로 남을 경멸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힘써 지키는 자가 되자.
[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을 직역하면,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하나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이 있느니라.”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과 영과 몸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soul)은 영(혹은 영혼)의 활동작용 혹은 활동영역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로 나타난다. 몸은 단독으로는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이 없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영육(靈肉)의 결합체로서 활동한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는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 또한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지기 쉽다. 또 반대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기 쉽다.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밝게, 빛나게 하지만,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 혹은 상한 심령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얼굴에 어느 정도 나타난다. 기쁜 마음은 기쁜 얼굴로, 슬픈 마음은 슬픈 얼굴로, 평안한 마음은 평안한 얼굴로, 고통하는 마음은 고통스런 얼굴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은 미움과 사랑의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우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도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빌 4:6-7).
우리는 죄 짓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영과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며 그것이 얼굴에도 나타나게 하자.
[14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연합체이며 거기에서 말과 행동이 나온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 그 지식은 참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책인 성경의 지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지식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듣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14- 16,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인 것, 미움이나 음란 등 부도덕한 것, 또 말의 실수, 남을 비방함, 게으름, 사치와 낭비 등을 포함한다. ‘즐긴다’는 원어(라아)는 ‘먹고산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들은 미련한 것을 먹고살며 미련한 것들을 나타낸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잠언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먹고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참 지식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사모하자.
[15절]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본문은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다”고 말한다. ‘고난받는 자’라는 원어(아니)는 ‘핍박받는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그 날이 다 험악하다’는 말은 그의 날들이 굶주림이나 헐벗음, 멸시나 천대 등의 어려움을 당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즐거운 자’라는 원어(토브 레브)는 ‘마음이 좋고 기쁜 자’라는 뜻이다. 마음이 좋고 기쁜 자는 잔칫날이 따로 없고 항상 잔치할 것이다.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 성도의 마음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이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 될 뿐이다. 성도가 마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성령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4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한다. 또 성경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가 기쁨이라고 증거한다(갈 5:22-23).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환경 여건이나 신체적 조건을 초월한다. 성도는 심지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했으나 기뻐하며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5:40-41). 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많은 매를 맞았고 옥에 갇혔으나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행 16:25). 또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중에서도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1).
영육으로 고난이 많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 항상 기뻐하자.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의 행복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가산이 적다,’ ‘크게 부하다’는 원어(메아트, 라브)는 각각 ‘적다,’ ‘많다’는 단어이다. 그것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이 적거나 많다는 뜻이다. 사람이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론 돈이 없어야 행복하다거나 돈이 넉넉한 것이 행복에 불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돈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고 돈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사람의 행복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본문은 사람의 행복이 평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본문에 ‘번뇌’라는 원어(메후마)는 ‘혼란, 소란, 불안’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걱정거리’(trouble)(KJV), ‘소란’(turmoil)(NASB, NIV)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심리적인 불안이나 건강상의 걱정거리, 물질적, 환경적 걱정거리 등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거리들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돈이 좀 부족해도 평안하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참 평안과 행복을 주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레 25:18-19; 레 26:5-6; 시 4:8; 마 11:28; 요 14:27). 그것은 몸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환경적 평안을 포함한다. 민수기 6:26, (아론의 축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만 순종하자.
[17절]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본문은 특히 가정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여간’은 ‘보통’이라는 뜻이다. ‘채소를 먹는다’는 말은 부잣집이 아닌 보통의 가정을 가리킬 것이다. 비록 가정의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채소만 먹는 형편이라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정적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가 있어 살진 소를 먹는 부잣집일지라도 가족들 간에 서로 미워함이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부요 자체가 가정적 행복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물론 물질적 여유는 인간의 삶이나 가정의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그것이 평안과 사랑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잠언 15:16에서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고 또 본문도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미움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고 평안과 행복을 빼앗아간다. 가족들은 언제 서로 미워하게 되는가? 그것은 가족들 중 누가 이기적(利己的)이게 행동하거나 가인처럼 형제를 시기하거나 남을 욕하고 구타하고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해를 끼칠 때일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의 부족과 허물을 감싸고 용서하고 상대를 관용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때 마음의 평안과 기쁨도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단지 물질적 부요에 있지 않고 평안과 서로 사랑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평안을 얻고 서로 사랑하며 살자.
[18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본문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공의로 노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분노도 있다. 자신의 잘못된 선입견과 추측 혹은 오해로 인해 부당하게, 실수로 분노하는 경우가 있다. 또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상대의 실수에 대해 지나치고 과격한 감정이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미움의 감정은 때때로 그런 지나친 분노의 실수를 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도서 7:9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고 말한다. 분노는 때때로 의견 대립에서 생긴다. 무슨 일에든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여러 의견들이 다 좋은 것들이며 각각 상당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후 회의의 절차를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건전한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어떤 다툼도 피할 수 있다.
성도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 때 필요한 덕목들 중에는 사랑과 겸손이 있고 또 특히 자기 통제력 즉 자제심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나친 감정을 통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겸손과 사랑과 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잠 14:29; 19:11). 또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약 1:19).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분노를 쉽게 내지 말고 더디 내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과 겸손과 자제심을 가지고 처리해야 한다.
[19절]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자기 일에 불성실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이다. 게으름은 악이다. 가시울타리는 가시가 찔러 가기 어려운 길을 가리킨다. 게으른 자의 길이 가시울타리 같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말한다(잠 10:4). 또 게으른 자에게는 할 일이 밀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른 자가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잠 12:27). 또 게으른 자는 의지가 약해서 난관을 잘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며 주리게 만들고(잠 19: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말한다(잠 19:24; 26:15).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大路)니라”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이다. 그는 물론 부지런하다. 부지런하게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자의 길이 대로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와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일 것이며, 할 일을 그때그때 다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며, 또 의지가 강해져서 웬만한 난관은 잘 극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1:1-3은 같은 진리를 보인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20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고 말한다. 잠언 10:1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즐겁게 하는 방법은 그의 경건하고 선한 교훈을 순종하여 경건하고 선하게 살고 범사에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잠언이 주는 지혜의 교훈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즐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일이요 자신에게 복이 되는 지혜로운 일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는 방법은, 그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들의 교훈을 버리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거역함으로써이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부모에 대한 멸시이다. 그런 사람은 실상 그 아비의 근심이고 그 어미의 고통이다(잠 17:25).
부모를 멸시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5계명에 약속된 복, 즉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한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들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도 지혜로운 성도가 되고 사회에서도 좋은 시민이 되자.
[21절]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본문은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미련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어도”이다. ‘미련한 것’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 사람의 좁은 소견을 따라 행하는 것, 사람의 양심에 바르지 못하고 악하게 행하는 것, 즉 한마디로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한 자’라는 원어(카사르 레브)는 직역하면 ‘마음이 없는 자’라는 말로서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10)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다. 사람이 생각이 있다면 미련한 일에 대해 슬퍼하고 미워하고 탄식하고 멀리해야 하는데, 무지한 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죄의 형벌은 죽음과 멸망이기 때문에, 미련한 것 곧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무지하고 생각이 없고 지혜가 없는 행동이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그는 그 길을 바르게 한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르고 복된 길이다.
우리는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생각이 있는 자, 지혜가 있는 자가 되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또 우리는 미련한 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길을 걷자. 그것이 지혜 있고 복된 삶이다.
[22절]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본문은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11:14도 비슷하게 말하기를,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할 것이다. ‘의논’은 ‘회의, 토의, 조언’이라는 뜻이다. 보통 한 사람의 생각보다 두 사람 이상의 의논과 조언이 낫다. 의논이 없으면 계획들이 좌절되는 까닭은, 개인의 생각의 미흡함과 제한성, 독단적 생각과 고집과 치우친 감정 등으로 인한 실수, 또 경험 미숙으로 인한 예상치 않은 일들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 머리를 맞대고 그 문제를 의논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고 그런 것이 없으면 그 일을 잘 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모사는 조언자, 참모를 가리킨다. 조언자가 많으면 무슨 일이든지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0:18은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하고, 잠언 24:6은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회의의 필요성과 유익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관계자들, 책임 있는 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먼저 성경의 교훈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또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인내하며 듣고 다함께 그 일을 연구하고 숙고하고 또 필요한 경우는 그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또 충분히 토의한 후 최종적으로 표결하여 다수의 의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 때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믿음과 겸손함과 포용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독단적 생각으로 하지 말고, 성경 진리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경험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서로 의논하며 행하자.
[23절]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본문은 “사람이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 입의 대답에는 좋은 대답도 있고 나쁜 대답도 있다. 좋은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이요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선하고 덕스러운 대답이요 진실한 대답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어리석은 대답, 남을 해치는 대답, 악하고 파괴적인 대답, 미움에서 나온 대답, 거짓된 대답이다. 좋은 대답은, 듣는 이에게 유익도 주지만, 말하는 자신에게도 기쁨을 일으킨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 그의 나병의 깨끗함을 받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노하여 떠나려 하였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선하고 지혜로운 충고를 한 종들은 그들의 마음도 크게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듣는 이에게 상함과 불쾌함과 불안함과 낙심함을 줄 뿐 아니라, 말하는 자신에게도 불안을 가져올 것이다.
본문은 또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경우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것을 동문서답이라고 말한다. 또 상대에 대한 오해나 이기적 욕심 때문에 잘못된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말, 때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때에 맞는 말이란, 이해가 필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말이며, 상대방에게 위로나 격려가 필요할 때 그를 낙심시키지 않고 위로 격려하며 또 잘한 것은 칭찬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아첨하지 않고 권면이나 책망이 필요할 때 권면하고 책망하는 말이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한다. 때에 맞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고 선하다.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상대방의 형편과 말을 잘 이해하고 때에 맞는 바르고 적절한 말, 곧 상대방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자가 되자.
[24절]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 위로 향한다”이다(KJV, NASB, NIV). ‘생명의 길’은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길이다. 생명은 귀하고 복되다. 그래서 우리는 생일을 축하하고 생명의 건강한 보존을 위해 영양 있는 음식과 보약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병원 치료를 받고 좋은 약을 복용한다. 영생의 가치는 더 크다.
그런데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뜻을 알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진다. 죄는 인생에게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지혜는 의를 얻고 의를 행케 하고 그 의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이 ‘위로 향한다’는 말은 천국과 영생의 나라가 현재 위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땅 속에, 어두움 속에 갇혀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실상 그가 세상을 초월해 계시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늘이라는 말 외에 하나님의 처소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다.
본문은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된다”고 말한다. ‘음부’(陰府)라는 원어(쉐올 לוֹא������)는 구약성경에서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무덤과 지옥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처소로서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고 죽은 자는 땅에 묻힌다. 산 자가 땅에 묻히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옥도 악인들이 죽은 후 형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곳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요 그 후에는 지옥 형벌이 있다. 그것이 어리석은 악인들의 길이다. 그러나 의의 보응은 생명이요 의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길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지혜로운 자가 생명의 길을 감으로 지옥에서 떠나 천국에 들어감을 알자. 우리는 오직 지혜자로만 살아가자.
[25절]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께서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모르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거역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무신다. 집은 가정과 가족들을 가리킨다. 사람이 교만하면 그와 그의 집이 망할 것이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하였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본문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부의 지계(地界) 즉 땅의 경계를 정하신다고 말한다. ‘정한다’는 원어(얏체브)는 ‘세운다,’ ‘견고케 한다’(fix, establish)는 뜻이다. 과부는 외로운 자이며 이 세상에서 때때로 무시와 부당한 취급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이다.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때때로 과부의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과부들을 돌보아 주시며 도우시며 그의 땅과 재산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같이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돌보시며 도우시는 자시다. 신명기 10:18,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원통한 일을 갚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시편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편 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우리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교만한 자가 되지 말자. 또 우리는 인간적 도움이 없다고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26절]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본문은 악한 꾀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꾀’라는 원어(마카솨보스)는 ‘생각들’(KJV, NIV), ‘계획들’(NASB)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생각들과 계획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5:4-5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선한 말은 정결하다고 말한다. ‘선한’이라는 원어(노암)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원문은 한글개역성경처럼 “선한[기쁨의] 말들은 정결하니라”(NASB)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또는 “정결한 자들의 생각들은 [하나님께] 기쁨의 말들이니라”(KJV)고 번역되기도 한다. 두 번역이 다 뜻이 통하는 것 같다. 악한 생각은 독한 말로 표현될 것이지만, 기쁨의 말은 깨끗하다. 또 ‘정결한 자들’은 악하지 않고 선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악은 더럽고 불결한 것이며 선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킬 것이지만, 정결한 자들의 생각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을 생각하고 선을 말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목적은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한 생각과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깨끗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하자.
[27절]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본문은 “이(利)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利)를 탐하는 자’라는 원어(보체아 베차)는 ‘토색하는 자,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라는 뜻이다. ‘해롭게 한다’는 원어(아카르)는 ‘소란케 한다’(disturb, trouble)는 뜻이다. 본문은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가 자기 집을 소란케 만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가정과 가족들에게 건강상, 경제상 어려운 일들을 만든다는 뜻, 즉 자기 가정을 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뇌물을 구하며 받는다. 잠언 17:23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정당한 이익만 구하고 부당한 이익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탐심을 버린 자이다.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 ‘산다’는 말은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고 형통하게, 즉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을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성경은 뇌물을 받지 말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디도서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디모데전서 3:8,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자기의 집을 해롭게 할 뇌물이나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도답게, 정정당당하게,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자.
[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고 말한다. ‘깊이 생각하다’는 원어(하가)는 ‘신음하다, 심사숙고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BDB). 야고보서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말하였고(약 1:19), 잠언 다른 곳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9)고 말하였다.
왜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말로 범죄하거나 실수하지 않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고 말한다. 시편 37:30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른다”고 말하며,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는다”고 말한다. 잠언은,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며 미련한 것을 쏟으며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증거한다(잠 12:23; 13:16; 15:2; 18:2).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의 입은 미련하고 악한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는 의인 되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결코 악한 말을 내뱉지 말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하자.
[29절]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자이며 악은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 교훈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악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며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시편 5: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22:15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그는]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한다. 의인은 메시야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야고보서 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제 성경 교훈에 순종하며 의롭게 삶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자.
[30절]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한다. ‘밝은 것’이라는 원어(마오르)는 ‘빛, 발광체’를 가리킨다. ‘눈의 빛’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려워 보인다. 그것이 사람의 눈의 시력이나 내면적 깨달음을 가리킨 것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의 내면적 깨달음을 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그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그러나 본문의 ‘눈의 밝은 것’ 혹은 ‘눈의 빛’이라는 말은 ‘밝은 눈’ (bright eyes)(NASB)을 가리킨다고 본다. 밝은 눈은 ‘기쁜 얼굴 모습’ (NIV)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눈의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밝은 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Amplified Bible). 어둠은 마음을 우울케 하지만,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집의 조명도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사람의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둡고 불쾌한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우울함과 불안과 불쾌함을 줄 것이지만, 밝은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본문은 또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한다”고 말한다. 나쁜 소식은 사람에게 근심과 걱정, 불안과 낙망을 주어 몸에 병이 들게까지 한다. 그러나 기쁘고 좋은 소식은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 평안과 소망을 주며 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잠언 25:25는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말한다. 좋은 소식은 시원함과 기쁨을 주는 것이며, 그런 소식은 몸에도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밝은 눈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복음을 전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건강까지 주는 자가 되자.
[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본문은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한다. ‘경계’라는 원어(토카카스)는 ‘책망, 꾸지람’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경계’ 곧 ‘생명의 책망’이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life- giving)(NASB, NIV) 혹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책망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듣는 귀’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 책망을 건성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마음으로 달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책망과 징계를 그런 태도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진심으로 달게 받는 자는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있다. 그는 지혜자이다.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불행과 죽음을 당하는 자는 결국 어리석은 자이지만, 의를 소유하고 의를 행함으로 평안과 생명을 누리는 자는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잠언의 여러 말씀들이 같은 교훈을 준다. 잠언 1:7-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경건한 부모의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지만, 그 훈계를 듣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잠언 4:13은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말한다. 훈계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훈계는 생명을 준다. 잠언 6:23도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한다. ‘훈계의 책망’ 곧 ‘징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 또 잠언 10:17도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고 말한다. 징계와 책망을 지키는 것이 생명길이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잘못 가는 것, 곧 죽음과 지옥형벌의 길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다가 영생에 이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32절]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본문은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BDB). 사람은 징계를 받을 때 자기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된다. 그러나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결국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사람의 불행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경히 여기는 자이다. 그는 외적,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요소만 중시하고, 영적, 도덕적 요소를 경히 여기는 자이다.
잠언 1:7은 미련한 자는 훈계를 멸시한다고 말한다. 잠언 1:29-32는, 악한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그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으며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또 잠언 8:35-36은,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는다”고 말한다. ‘견책’이라는 원어(토카카스)는 ‘책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나 징계의 고난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사람에 대한 지식, 구원의 지식, 영생의 지식, 평안의 길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의와 선을 구하며 행하는 자는 지혜와 형통과 승리를 얻을 것이다. 잠언 1:33은 “오직 나[지혜]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과, 현실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자. 그것이 참으로 영생과 행복의 길이다.
[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겸손히 그를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는 잠언에 자주 나오는 단어로서 ‘훈련,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 ‘지혜의 훈련’이라는 말은 ‘지혜로운 훈련’ 혹은 ‘지혜를 주는 훈련’이라는 뜻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무사르)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교훈을 잘 받을 것이며, 그의 교훈은 죄악된 일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그를 의의 길로 이끈다.
본문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겸손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겸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한하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로 알 때, 또 자신을, 유한하고 죄악된 피조물임을 바로 알 때 겸손할 수 있다. 또 사람은 겸손할 때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된다.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한 자리에 오른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고 그의 진노를 받아 수치와 불행을 당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를 얻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자. 또 이것이 지혜의 길이요 존귀함에 이르는 길임을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