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자의 여유 잠30:15-16
자족하는 자의 여유 잠30:15-16, 빌4:10-20
어느 마을에 아주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주식투자를 잘못해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잔고를 조회해 보았더니 십만 달러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카가 한 사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은 십만 달러는 자동적으로 그 조카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그의 조카가 뜻밖에 십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십장마비를 일으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십만 달러인데 한 사람은 너무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백만장자 였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을 몰랐고, 어렵게 농사를 짓고 살았던 조카는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주님 안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더라면 그와 같이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자족하는 자의 여유”라는 제목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자족의 은혜를 배우기를 소망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에게는 자족도 여유도 없습니다.
구약 본문 잠30:15-16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끊임없는 욕망의 망령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먼저 거머리로 비유했습니다. 이 거머리는 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 붙으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처음에는 작은 모양의 거머리이지만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하면 어떤 것은 손가락 굵기 만한 정도로 크지만 "이젠 됐다"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에 음부로 비유했습니다. 창세 이래로 음부는 죽은 자를 받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생명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또 아이 배지 못한 태로 비유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태는 계속해서 잉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계속 물을 부어도 한없이 스며드는 땅으로 비유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흔적 없이 태워버리는 불로 비유했습니다.
이는 모두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빗대어 말한 비유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마음껏 누려본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가 쓴 전도서 2장에 보면 술로 마음을 즐겁게 해 보려고 술도 마셔 보았습니다. 향락 사업을 크게 하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과수원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공원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금은보화를 욕심껏 가져 보기도 하였습니다. 기생들을 두고 노래를 시키고 흥을 돋구기도 하였습니다. 처첩을 천 여 명을 두어 보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향락과 방탕의 극치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원하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 나는 만족하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해 아래 모든 수고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사람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탐심과 욕심의 문제가 우리 마음속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탐심의 문제가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만족할 수 없게끔 만들기 때문입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여유도 없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 욕심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집착은 다시 무리수를 두도록 만들기에 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시험 드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약1:14-15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했습니다. 우리 모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욕심에 이끌려 살다가 심판에 이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자족하는 마음과 여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옵니다.
신약 본문 빌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주님 안에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무한한 공급자가 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안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것을 주께서 채워 주심을 믿었기에 어려움 중에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빌4:19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돌섬은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섬은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수 만 톤의 군함이 와서 밀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함이 밀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돌섬이지만 그것이 지구 땅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데 어떤 풍랑이 감히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보호함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근심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신론자로서 변호사였던 클래렌스 대로우가 미국의 경기가 아주 나빴을 때 시카고 남부 지역에 있는 흑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궁핍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는 모습에 대로우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로우는 묻기를,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당신들은 행복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흑인여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아멘!" 하면서 외칠 때 그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비록 비참한 환경 속에 빠져 있었지만 자기들이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시다면 어떠한 환난 가운데도 기뻐하며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고,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우리 안에 자족의 마음과 여유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3.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자에게 환경에 메이지 않는 여유가 있습니다. 신약 본문 빌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은 어려웠습니다. 가정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나 자식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모함을 받아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따라다니는 삶이었습니다.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했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했고,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배웠다”는 단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련에 시련을 겪고, 시험에 시험을 이기고, 어려운 극한 상황에 맞닥뜨리며 깨닫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족의 비결을 배운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고 환경을 변화 시키는 사람으로 삽니다.
어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에 누가 거기 있느냐 여하에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 집에 사느냐에 따라서 지저분한 집이 될 수도 있고 깨끗한 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누가 모이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싸우고 분쟁하며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남에 가면 개포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왜 그 동네가 개포동인가 하니 사람이 하도 살기가 더럽고 지저분한 동네라서 개도 살기를 포기했다고 해서 개포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거기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 아름답고 좋은 환경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개포동 신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동네를 개포동이라 부르고 삽니다. 왜냐하면 개도 포기한 동네가 이제는 개도 포텐샤를 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고, 사업이 잘 되고, 수입이 많아지면 기분이 업 되고, 그 반대가 되면 우울하고, 화가 나고, 저기압이 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온도를 올리고, 날씨가 더우면 온도를 내려서 온도를 조절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입니다. 온도조절기와 같은 삶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면서 언제나 바울처럼 삶을 조절하면서 자족한 삶을 삽니다.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풍요로운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인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한 삶의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에게는 자족도 여유도 없습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여유는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옵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자에게 환경에 메이지 않는 여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