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비즈니스 마 13: 44-50
천국의 비즈니스 마 13: 44-50
오늘 이 세상은 경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경제를 어떻게 하면 부흥시킬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들마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큰 소리로 연설합니다. 가정도 회사도 나라도 다 경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천국도 비즈니스 개념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천국도 비즈니스를 잘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해야 천국의 비즈니스를 잘 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로,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은 것입니다.
45절의 말씀을 다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마 13: 45)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려는 상인이라는 말은 그 분야에 대하여 굉장한 전문지식과 아울러 그 좋은 진주를 구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주 장사를 하는데 그 사업에 대하여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뜨거움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냥 진주를 팔아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런 종류의 상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진주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주의 가치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업을 하는 그런 사업가인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가장 아름다운 진주를 한 번만이라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진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상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들의 육신의 문제를 뛰어넘어 그 나라에 대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그 목적이 뚜렷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냥 정보를 얻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 누구를 믿는다’라는 말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회교나 불교에서도 있는 개념입니다. 그들도 알고 보면 이 세상 보다는 더 나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곳을 가기 위해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세우신 이 기독교는 세상의 그 어떤 종교와도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서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이유는 이 기독교를 세상의 다른 종교와 같은 개념으로 믿으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독교나 회교나 불교 다 같은 것이 아니냐는 시각을 가지고 믿으려고 하니까 실족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생명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믿으려고 하면 결코 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 39)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 33)
다 같은 말씀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일단은 자신의 생명을 잃어야지만 그 목숨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상인은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은 심정으로 그 생명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업이나 일에 있어서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더 나은 비전을 세우고 더 좋은 장소와 시설을 갖춤으로써 손님들을 더 끌어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심이 있지 않으면 남들보다 앞서 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을 품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 2)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 123)
분명 영적인 일은 세상의 사업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 정신만큼은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열심을 냅니까? 땅에서 사람들이 결국은 이 돈 때문에 웃고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많으면 좋아하고 돈이 없으면 슬퍼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돈 버는 일이 있다고 하면 때로는 생명까지도 내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영적인 일도 장사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면 정말 진정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값진 진주를 발견하기까지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46절 말씀의 앞부분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마 13:46)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값진 진주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대단한 가격의 진주가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값진 진주는 그냥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귀한 가치를 가진 진주를 찾기 위해 수많은 원산지를 찾아 다녀야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은 거져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기까지는 그냥 아무런 대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에게 거져 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까지 인간은 많은 의심과 회의 속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애굽의 종살이 노릇을 한 시기입니다. 둘째는 광야 40년의 기간입니다. 셋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정복기입니다.
진주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은 이스라엘의 세 시기 가운데 출애굽을 한 시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시기인 것입니다. 갓 구원을 받은 시기인 것입니다. 이제 막 구원을 받아 영적인 젖을 먹는 시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3~24)
‘이 산더러 들리라’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이런 기적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들은 산이 들리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의 깊은 내면에서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고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 동안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던 옛 사람이 아직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끊임없이 이미 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실제를 의심하여 하나님 자녀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진주를 발견한 것도 정말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진주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진주를 발견했다고 해서 문제가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주를 발견은 했지만 진정 자신의 것이 아직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초보의 길을 이제 막 내디딘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식품점 마켓에 가서 이것 저것을 사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과 함께 시장을 보고 있는데 딸의 친구를 갑자기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예쁘게 상냥하게 인사를 하길래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어서 자신이 카터에 있었던 과자 한 봉지를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미처 그 아이에게 선물을 준 것에 대한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딸 친구에게 선물을 주었지만 가게 안에서 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값나가는 것을 선물해도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선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크로거(Kroger)같은 큰 마켓에서 이것저것 갖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심 쓰듯, 선물을 주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아무리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물건을 발견했으면 그 물건을 사기 위해 값을 지불해야 비로소 그 물건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생을 여유부리며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 영생의 능력이 있기까지는 결코 우리들이 만족할 수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셔서 실제가 되시기까지 끊임없이 사모하고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찾은 진주를 사야 합니다.
46절 말씀 후반 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6)
이 상인은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즉시 가서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소유가 되기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진주 장사를 해서 벌은 돈이 무척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몽땅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진주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뒤져가며 찾았던 그 진주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았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자신의 생명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생명과 진주를 바꾸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자신의 생명을 잃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 40)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 28)
바로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그렇게 값비싼 희생을 십자가에서 치루신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 나오는 진주라는 것은 바로 영적으로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육신의 생명입니다. 이 육신의 생명과 맞바꾸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영생인 것입니다.
만약에 영생수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판다고 한다면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세상에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영생수가 아니겠습니다. 이 영생수를 시중에 판다고 한다면 그 가치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영생을 예수님께서는 거져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영원한 생명을 거져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께서 주신 영생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대신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심판을 받으셨을 때 우리들도 옛 생명으로 살았던 모든 죄악된 행동에 대하여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옛 생명은 이미 이 천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 되었기에 우리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옛 생명은 죽었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대신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제는 내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인격이 이제 나를 대신하여 내 안에서 살아계시는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이 영적인 실상입니다. 영적인 실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냥 우리들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인이 진주를 발견하고 가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분명히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소유했다는 말은 그렇게 가지고자 했던 진주를 자신이 영원히 볼 수 있고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생명은 반드시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실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상, 실제(히 11:1)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소망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음이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을 왜 바라리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롬 8: 25)
우리들도 전에는 우리 육신의 생명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나의 삶의 참이라고 믿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값비싼 진주를 자신의 전 재산으로 산 것으로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생각을 부정하고 자기 느낌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실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영생을 이미 이루어 놓으셨지만 이것은 우리의 옛 생명을 통해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것을 이미 이루셨다, 주셨다”라고 고백하는 것 차체가 이미 자신의 옛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실상은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생의 모습은 성령 충만의 모습이요 사랑의 모습이요, 건강한 모습이요, 행복한 모습이요, 감사의 모습이요, 찬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꾸 입으로 이것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 충만합니다. 나는 변화되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새로워졌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항상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 천국에 남는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이 믿음의 모습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 이상의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어지는 삶이되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고 이런 성령 충만의 삶이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