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 있는 신앙 삼상19:18-24
감동이 있는 신앙 삼상19:18-24, 눅7:24-35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이아가라는 매우 거대한 폭포로 물이 떨어지는 곳은 거센 급류를 이루지만 그 지점으로부터 10미터 전까지는 물살이 잔잔해 충분히 조심만 한다면 아무 문제없이 배를 타고 탐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몰랐던 한 관광객들이 잔잔한 물살만 보고는 안심한 채 아무 경계를 하지 않고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폭포 위를 기구를 타고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그 상황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10m만 더 가면 급류가 있소, 어서 배를 멈춰요!”
하지만 배에 있는 관광객들은 이렇게 잔잔한데 급류가 있을 리가 없다며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떠내려갔습니다. 10m가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손쓸 도리가 없게 되고 나서였습니다. 결국 급류에 휩쓸려 애석하게도 관광객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신호가 오듯이 우리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무감각 하여 말씀을 통해 주시는 경고, 성령이 주시는 깨우침과 감동에 곧 반응을 하지 않으면 금방 회복되어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감동이 있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감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어떤 이는 현대를 삼무시대(三無時代)라고 말합니다. 무감각, 무감동, 무감사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은혜를 잊게 되어 감동이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기쁨도, 감동도, 감사도 없고 이웃에 대한 배려나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의 경우와 같이 됩니다. 사울 왕은 본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보면 사울이 자기 집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 위하여 사환을 데리고 여러 곳으로 다니던 중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산당에서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무엘은 그 전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스의 아들 사울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신대로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곧 잃어버린 암나귀는 집에 돌아왔다는 것과 그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전한 후 사울을 따로 불러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입을 맞추며 왕이 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삼상 10;1).
그 후 사울은 성령에 감동되어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사무엘의 손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으로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한때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예언을 하는 등 성령의 은사를 크게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다음에 시험에 들어 교만해 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임했던 성령의 은혜와 감동이 떠나게 되니 악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믿음에서 떠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히 6:4-6).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던 사울이 그 지위에서 버림을 받고 패가망신하는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악신에게 사로잡힌 사울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만 하고 다녔습니다. 충신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단창을 던지기도 하고(삼상 18:11), 본문에도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내고, 급기야는 자신이 이곳에 왔습니다. 그 곳에서 다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까지 했지만 다시 악령에 사로잡혀 계속 군사를 풀어 토벌 작전을 펴기도 하였습니다(삼상 24:2). 그는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가서 다윗을 은신시키고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제사장과 그의 가족 팔십 오명을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습니다(삼상 22:18). 이토록 시험에 들어 날뛰는 사울이야말로 문제를 지닌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를 장터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소꿉장난을 합니다. 혼인잔치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불지만 아이들은 춤을 추지 않습니다. 저쪽에서는 장례식 놀이를 하기위해 애곡을 하지만 누구하나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무감각한 죽은 신앙을 가지게 되니 세례 요한이나 주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을 보고 회개하여 은혜를 받기는커녕 계속 시비만 걸면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눅7:33-34에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했습니다.
이 시대는 주님 당시의 시대 보다 더욱 영적 무감각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교통이 발달되고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습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피리를 불지만 피리 소리는 요란한 노래방의 소리에 묻히고 맙니다. 애곡을 하지만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에 마음을 뺏기고 맙니다. 강단에서는 수없이 말씀이 전파되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신앙으로 은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는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감동이 있는 성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어려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귀히 쓰임을 받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는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감동으로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가 되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자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게 무엇인가 막힌 것이 있고, 뒤얽힌 것이 있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거나,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거나, 기도하려 해도 기도의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거나, 입에서 침이 바짝바짝 마르게 됩니다. 감동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 받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거나, 시험에 들어 받은 은혜를 소멸했거나 하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가 막히고, 소통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마음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엇보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는 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속이는 것이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본문 32절에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그때부터 감동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말씀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면서 떨림이 옵니다. 말씀의 은혜가 가슴을 벅차게 하면서 ‘아멘! 아멘!’을 연발하게 합니다. 눈물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기꺼이 드릴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감동이 은혜입니다. 감동이 축복입니다. 감동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로 이런 감동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찬양해야 합니다.
32절에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라는 말씀은 찬양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피리를 불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추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메말라 버리면 마음이 차가워져 기쁨도 감사도 찬송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를 때에도 입을 꼭 다물고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찬송에 기쁨이 있고, 힘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러한 찬송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은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찬송은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 22:3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했고, 시 34:1-2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했습니다. 이 시편들은 다윗이 고난 중에 지은 시편들입니다. 다윗이 곤고한 중에 세상과 온통 단절된 가운데에서도 찬송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찬송은 고난을 이기는 힘입니다. 찬송은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소중한 통로입니다.
셋째로 참 예배와 헌신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감격을 맛보게 되고 하늘 소망이 넘치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 하는 자가 되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는 1980년 폐수종으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입원하여 있던 한 달 동안 소리 지르고 찾아오는 방문객들 앞에서 발악을 하였습니다. 자유에 대한 글과 수필을 써서 큰 명성을 얻었던 그가 죽음 앞에서 실로 너무 비참하여 졌습니다. 그는 그 해 4월16일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프랑스의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 하면서 죽음에서 자유를 외친 그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한 독자가 신문에 투고하기를 “왜 그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였는가 하면 그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의 본 훼퍼 목사는 나치에 반대하다 감옥에 갇혀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간수가 그를 부르자 감옥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웃으며 “이제 저는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아주 유쾌합니다. 여러 동지들 천국에서 즐거운 만남을 가집시다.” 라고 하면서 나갔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이나 그 어떤 것도 그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라마나욧은 성령 충만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라마 나욧은 어떤 곳입니까? “라마”는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나욧”은 가르치는 곳, 학교의 교사(校舍) 즉 건물이란 뜻입니다. 라마 나욧은 사무엘 선지자가 운영하는 라마에 있는 선지학교입니다. 이곳은 신앙의 뿌리가 있는 곳입니다.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가 그곳에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1:1에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신앙의 인물입니다. 한나의 기도로 낳은 사무엘은 성령 충만한 이스라엘의 기둥 같은 인물로 그 곳에 사무엘과 함께한 선지자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20절). 그들은 사무엘과 뜻을 같이 하여 그와 더불어 기도하며 제단을 쌓고, 성령에 감동하여 예언을 하는 등 신령한 삶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곳은 성령 충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삼상19:20에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시 사자를 보내었을 때도 성령에 사로잡혔고 세 번째 보낸 사자들도 전과 똑같이 성령에 감동되어 선지자들의 무리와 함께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 자신까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예언을 하였으며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니라."는 속담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24절). 이곳에 오는 자들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기관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성향이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고전 12:4-6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 했습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신비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라마 나욧은 성령에 감동된 무리들이 모인 곳으로 은혜가 충만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피난 온 다윗의 무리나, 악신에 사로 잡혀 미친 듯이 날뛰던 사울의 무리나, 모두가 다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부터 쫓는 자도 쫓기는 자도 구별 없이 모두가 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령한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 모습이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이루는 성도로 삽시다. 정리합니다.
1.감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2.성도는 감동이 있는 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찬송함으로, 참 예배와 헌신을 통해 감동 있는 신앙을 가집시다.
3.라마나욧은 성령 충만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