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룻기

바른 선택과 선한 싸움 룻1:8-18, 행19:21-31

nam씨 2016. 6. 17. 21:04


바른 선택과 선한 싸움      룻1:8-18, 19:21-31

 

미국에서 있었던 한 주지사 이야기입니다. 주지사가 타고 다니는 마차 자리 옆에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상자 하나가 항상 놓여 져 있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근 거렸습니다. “금은보화가 들어 있을 것이다.” “광산 개발 허가증이 있을 것이다.” “호신용 총이 있을 것이다.” 등 등 입소문은 꼬리를 이었습니다.

 

어느 날 궁금함을 참지 못 한 사람이 주지사가 회의하는 틈을 타서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에 다 떨어진 누더기 옷 한 벌과 찌그러진 깡통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궁금함을 참지 못 하던 사람들이 수 백 명 몰려 와서 다 같이 보았습니다. 그 때 주지사가 나왔습니다. 한 사람이 용감하게 물었습니다. “주지사님! 항상 간직하고 다니시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열어 보았습니다. 왜 거지 옷과 깡통이 들어 있나요?”

 

주지사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는 오갈 데 없고 잘 곳이 없는 거지였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이 주지사까지 시켜 주셨습니다. 주지사가 되어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 상자를 열어 보지요. 그리고 나 스스로를 낮추며 산답니다. 나는 거지였습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두 손을 높이 들고 외쳤습니다. “주지사님! 만세! 주지사님 만세!” 그는 주지사가 되어도 금맥을 잡기 위해 물질을 따르지 않고, 인맥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고, 영적인 맥을 따라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높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따라가느냐가 바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바른 선택과 선한 싸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바른 선택을 하는 자가 인생의 승리자가 됩니다.

 

야성녀라는 영화에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개척 시대에 미망인이 된 한 백인 여자가 개척지를 찾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인디언들이 그녀를 보려고 몰려왔는데 백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이나 가지고 있는 가구 등이 인디언 여자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어느 날 한 인디언 여자가 누런 돌멩이 하나를 가져와서 이 백인 여자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인디언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는 번쩍이는 돌멩이에 불과했습니다. 백인 여자도 처음에는 그것이 황금덩이인 줄을 모르고 거저 사례로 옷 한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에 사는 인디언 여자들이 너도 나도 금덩이를 가져와서 옷이나 가구와 바꾸어 갔습니다.

 

그런데 한 인디언 여자는 손에 무엇인가 가지고 와서 자기는 누런 돌멩이는 없지만 이것을 줄 테니 무엇이든 한 가지만 줄 수 없느냐고 말했습니다. 받아보니 그것은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였습니다. 백인 여자는 무엇이든지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백인 여자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백인이 아프리카를 처음 탐험했을 때도 이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가치 판단이 없는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버리고 적은 것과 바꾸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본능을 따라 사는 동물과 달리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가치와 무가치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잘 선택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이 따르고 잘 못 선택한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의 남편은 일찍이 약속된 땅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이방인의 땅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가혹한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10년 후에 나오미는 자신의 민족과 자신의 땅, 그리고 자신의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4-7).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며, 건전한 결심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은 성도가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나오미는 고국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한 후 남편을 잃은 두 자부 룻과 오르바에게 남편도 죽고 나에게 소망이 없으니 친정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하자 오르바는 돌아갔으나 룻은 단호히 시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했습니다.

 

룻은 동서 오르바가 선택한 이방 신이 아닌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룻의 선택은 현명하고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매 순간 순간 선택의 기회들이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1)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사망이요 멸망입니다. 룻은 생명을 택했고, 오르바는 멸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어쩌면 오르바는 룻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시어머니를 좇아가는 룻이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룻은 생명을, 오르바는 멸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비웃고, 어리석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바른 선택을 한 자들입니다.

 

2)미래의 축복과 현재의 안락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룻이 자신의 고향 땅을 버리고 낯선 땅, 곧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따라 간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불확실한 미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르바가 선택한 현재의 안락함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룻은 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고 있었고, 그분의 약속과 축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과 미래의 축복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세상에서 영달과 안락함을 포기 하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위해 수많은 고난을 감내하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 상급과 면류관을 바라보며 나아갔습니다. 신약 본문을 보면 복음 전하다가 현재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자들로부터 봉변과 곤욕을 당하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제작하여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겨 편하게 먹고 살아 왔는데, 바울 일행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복음의 말씀이 자신들의 생계에 큰 타격이 될 것을 염려하여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사람들을 선동하여 큰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현재의 안락함인가, 아니면 미래의 축복인가 하는 선택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등불 예비 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장래의 축복을 사모하며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라 장래의 축복이 따르는 믿음의 길을 택하여 살아야 합니다.

 

3)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가, 육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룻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따르다 보아스라는 좋은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지만 데메드리오는 육의 소욕을 위해 주님의 일을 훼방하여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8:5-6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바른 선택으로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성도의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랙은 흉년을 피하여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이방 땅 모압 지방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비극적인 가정이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이 먼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남편이 세상에 없는 동안에 두 아들을 결혼시켜 두 자부를 맞이하였습니다. 10년가량 새로운 시절이 흘렀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또 생겼습니다. 두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세 과부만 남은 가정이 된 것입니다. 좀 더 잘 살아 보려고 모압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더 큰 불행을 만난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유혹이 온다고 성전을 떠나고, 믿음을 떠나 세상 따라가고 물질 따라가는 길은 사는 길 같지만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길로 가는 길은 사단이 원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길로 갔다가 패가망신 하고 부끄러운 족적을 남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이 명예와 물질을 따라 그 길로 갔다가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삼손이 정욕을 따라가다가 두 눈이 뽑히고, 적에게 큰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어떤 고난이 오고 불 시험이 온다 해도 인내로 끝까지 믿음을 지킬 때 마침내 그 고난을 통해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귀감과 소망을 주는 믿음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고난 중에 큰 깨달음을 얻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했고, 자부인 룻도 세상 적으로는 소망이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고난의 길이지만 시모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선택하여 따른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에서 두해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바울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는데,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도망갔습니다(19:12). 그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물질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부추겨 소동을 일으켜 주의 종을 박해하는 자들에 의해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생활 하다가 고난이 올 때도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리빙스턴은 가정환경이 너무 어려워 10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7세 때 강력한 소명을 받고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모팻을 만난 후 그의 딸과 결혼하여 1840년 아프리카로 선교를 위해 떠났습니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나고, 1871년 그의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영국 왕실과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은둔해 버렸고, 이에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탐험가 스탠리를 동원하여 그를 찾게 했습니다. 리빙스턴을 만난 스탠리는 은퇴 후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는 영국 왕실의 전언을 전하며 “30년 동안 헌신하셨으니 이제 그만 헌신의 삶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권하자, 리빙스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보답입니다. 차라리 이것은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빙스턴은 선교에 대한 헌신을 주님에게 해 주는것이 아닌 드리는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충성을 하고, 전도하는 것에 대한 자만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은 은혜 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감사의 보답이요, 조금이나마 사랑의 빚을 갚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썩어질 세상 것 때문에 싸우다 심판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선한 싸움에는 복 된 결과가 따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얻게 되면 행복 할 것 같지만 그러하지 못합니다. 이런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낙원이었던 것은 고3수험생이 없었고,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수험생이 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 모두가 긴장하고 많은 희생과 수고를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관계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에서나 많은 사랑의 수고와 배려가 필요함을 잘 압니다. 우리는 사랑의 짐을 져야 하는 자리가 쓸데없는 고난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영성을 더욱 풍성히 할 수 있는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시모 나오미와 자부 룻의 관계는 결코 갈등의 관계가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끔찍이 여기고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 보다 자부를 위해 자부가 더 잘되고 좋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사랑과 배려의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앞날을 위해 나를 떠나라고 강권한 것입니다. 한편 며느리 역시 시모가 자기의 희생과 노력으로 부양해야 할 입장이지만 그것을 전혀 부담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시모를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시모의 신앙적 감화에서 온 것인지, 인품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어쩌든 이러한 관계가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더 좋은 편을 택하려하다가 종종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다투다가 더 좋은 것을 찾지 하는 것 보다 사랑으로 양보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큽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의 기쁨이 더 큽니다. 세상 적인 싸움에서 얻는 유익 보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채우심의 은혜는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는 말씀을 우리는 진리로 믿고 실천 할 일입니다.

 

이처럼 자부를 사랑한 나오미는 효성스런 며느리를 통해 그의 가문이 다시 새워지고, 그것도 보아스라는 유능하고 훌륭한 사위를 얻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가문을 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며느리 룻은 열 자식 안 부러운 보물단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효성스런 룻을 위해 하나님은 복 되고 영광스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그녀는 이방인이고, 여인이지만 주님의 족보에 오른 마리아 외에 나오는 네 여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은장색 데메드리오처럼 세상 것을 위한 싸움에는 결국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후회와 영원한 형벌이 따르게 되지만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운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죽음이 임박해 옴을 느끼면서 딤후 4:7-8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했습니다.

 

우리 모두 선한 싸움을 싸우다 다시 오실 주님 맡기를 소망합니다.

 

정리 합니다.

 

 

바른 선택과 선한 싸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1.바른 선택을 하는 자가 인생의 승리자가 됩니다.

 

1)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2)미래의 축복과 현재의 안락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3)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가, 육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인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2.성도의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3.선한 싸움에는 복 된 결과가 따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