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눈이 열릴 때 눅24:28-35
영의 눈이 열릴 때 눅24:28-35, 엡1:15-23
한 소년이 불장난으로 집을 태우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꾸중이 무서워 집을 나갔습니다. 여러 해 동안 객지에서 방황하다가 죄악의 소굴에 빠졌습니다. 몸은 망가지고 양심은 괴롭기만 했습니다.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죽기로 결심한 그 날 밤, 멀리서나마 부모님을 한 번 보고 죽자고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자기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자기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던 침대 위에는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있는데 인기척에 부모님들이 달려 나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네가 떠난 후 한 번도 대문을 닫은 적이 없단다. 언제든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집을 나간 후 하룻밤도 네 방에 불을 끈 적이 없단다. 네가 없어진 이후 한 번도 우리는 편히 잠자리에 들고 맛있게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단다." 아버지 어머니는 언제나 방황이 끝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복음서 본문에 두 사람이 슬픈 모습으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중간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의 강권함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엠마오란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낙심의 길입니다. 절망의 길입니다.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두 사람이 갖던 길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영의 눈이 열릴 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1.신령한 영적 세계를 보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하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근심과 낙심의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알아 본 순간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불안한 마음이 변하여 평안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절망으로 마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죄와 함께 내가 죽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안보이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만나면 무미건조하던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됩니다. 죽을 맛 나는 인생이 살 맛 나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이 변하여 빛나는 희망이 됩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령한 축복은 누구나 깨닫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본문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란 말은 영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엡1:18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신앙생활 하면서 영적 눈이 열리는 은혜 체험을 해야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신령한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 한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냥 왔다갔다만 할 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도 말하기를 “나는 뜨락 신자”라고 했습니다. ‘뜨락 신자’ 란 믿음 없이 교회에 가서 뜰만 밟고 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뜨락 신자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진 지 40일쯤 되었을 때, 몸에 통증이 있어서 병원에 갔는데 ‘말초신경 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말초신경 염’이라는 병은 근육이 곯아 살이 마르면서 전신 마비를 일으키는 무서운 병입니다. 임신 상태라 약도 제대로 처방할 수 없고, 그대로 가다가는 아이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산모도 남편도 의사도 모두 걱정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기도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뜨락 신자’라고 했던 그 여자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를 고쳐 주옵소서!’ 지금까지 불순종했던 것, 교만했던 것을 다 회개했습니다. 십일조도 드리지 않던 사람이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에 제대로 출석하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기도할까 하고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권사님이 “기도할 줄 모르면 사도신경을 자꾸 외워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여 성도는 사도신경 중에서도 ‘몸이 다시 사는 것’이란 대목을 고백할 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살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저도 병으로 죽지 않게 하시고, 뱃속의 아이도 낳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기를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났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그동안 아주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예배 때마다 남편과 함께 참석하여 열심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았더니, 의사가 “아이를 중절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기적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 하자, 하나님께서 산송장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뻔했던 이 여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아서 성도들 앞에서 간증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내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라고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눈이 열려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고 더욱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부르심의 소망과 하늘 기업의 풍성함을 알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고 나서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눅24:33절에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보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즉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란 뜻입니다. 주전 1000년경 다윗 왕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즉 희망의 길, 구원의 자리, 하나님의 축복 있는 곳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하나님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로 살 때 놀라운 하늘 기업을 유업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서신서 본문 엡1:18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도록 기도합니다. 왜 나를 부르셨고,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기 원하는지 알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게 될 때 위대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물건마다 만든 목적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비전입니다. 비전을 가진 개인, 비전을 가진 가정, 비전을 가진 교회는 가지고 있는 비전만큼 성장하게 하십니다. 흔들리는 이유는 부르심의 소망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주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소망이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주간지 뉴스위크에 '미국을 움직이는 20인' 이란 기사가 실렸습니다. 거기에 '죠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 가 나옵니다. 에릭슨은 19세 때 다이빙 사고로 목을 제외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절망하며 부르짖다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십니까?" 라며 하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그래도 살게 하시는 뜻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있다면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입을 움직일 수 있기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림이 잘 그려지게 되자, 이 소식을 알고 볼펜 회사에서 제안을 합니다.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광고에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때 그녀는 제안을 허락하면서 조건을 제시합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아래에 'PTL' 이란 사인을 넣는 것이었습니다. 'PTL' 은 "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하라" 의 머리글자입니다.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만 있다면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불구의 몸이지만 소망 가운데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찬양하였더니, 하나님은 입술뿐만 아니라 수족도 움직이게 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강력한 전도자가 되어 장애인들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또한 본문 엡1:18 하반 절에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했습니다. 여기에서 기업은 상속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로마서 8:16-17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후사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영광스럽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기업을 상속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풍성한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세상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세상 것을 진토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숫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오히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영광의 기업이 자신의 것임을 아는 성도는 비굴하게 살지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의 풍성함이 있음을 알고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환경을 초월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황경을 초월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는 성도로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세상을 이기신 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이 성도들과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 엡1:19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했습니다. 부르심이 과거 경험이면, 풍성한 영광의 기업의 약속은 미래적이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현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천국에서만 누릴 은혜가 아닙니다. 오늘 이라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맛보고 체험하는 은혜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본문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알게 하시고' 는 원어로 '에피그노시스' 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인 '그노시스' 와는 달리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관념적으로, 혹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함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잡혀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던 바울은 도중에 광풍의 위험을 예견하고 안전하게 섬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자고 백부장에게 제안을 했지만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만 듣고 항해하다가 유라굴로 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소망을 잃고 자포자기했지만 바울은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엄청난 광풍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동행하시는 하나님, 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 때 내 곁에 계시며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은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1.신령한 영적 세계를 보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2.부르심의 소망과 하늘 기업의 풍성함을 알게 됩니다.
3.환경을 초월한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