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골로세서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골2:8-15]

nam씨 2016. 3. 26. 14:48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2:8-15]

돈이 많이 한 신부님이 누가 볼까, 눈치 챌까 돈을 감추어 놓을 때마다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꾀가 생각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를 모셔두는 감실이 떠올랐습니다. 신부님은 이 감실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금고라 생각해서 가진 돈을 몽땅 감실 안에 넣고는 종이 한 장에 이런 글을 적어 붙여두었습니다.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 그런데, 귀신이 곡할 노릇, 누가 감실의 문을 부수고 돈을 몽땅 털어갔고, 역시 종이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시여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부활절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상자를 하나씩 나눠주며 한 주일 동안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계된 물건을 하나씩 상자 속에 넣어 오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드디어 부활절에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숙제한 상자를 하나씩 들고 와서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상자 속에 나비를 넣어 가지고 왔고, 혹은 계란과 꽃을, 어떤 아이는 개미를, 또 다른 아이는 파란 나무 잎사귀를 넣어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빈 상자를 들고 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능이 좀 낮은 지적장애아였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질 못하고 생각이 좀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다고 그랬지요? 이 빈 상자는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이어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얘야, 네가 가장 훌륭하게 숙제를 마쳤구나. 정말 잘했다.” 그렇게 축하했다고 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의 피라밋은 바로왕의 거대한 무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는 공자와 그 가족의 무덤인 '공림(孔林)'이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의 가족 무덤입니다.인도의 아소카 왕은 석가모니의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무려 84천개의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절에 있는 탑은 모두가 석가모니의 무덤인 셈입니다. 한국에도 석가모니 유골을 모신 탑이 있습니다.

 

마호메트의 무덤은 메카에 있고 해마다 수백 만 명이 메카를 찾아 참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예수님의 무덤만 비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무덤에서 나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찾아가서 참배할 예수의 무덤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기독교는 살아있는 생명의 종교,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부활이다.”라고 말합니다. 재미있죠?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신비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2,33)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고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을 동반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까지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예정된 것이고, 계획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최후의 승리는 바로 부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개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11:43)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뭘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오늘은 그 십자가를 설명하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골 백번 설명해도 부활이 없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2. 부활은 사랑의 승리

십자가는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커뮤니케이션, 즉 사랑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아무에게나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을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제대로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랑은 많은 고난 속에서 피어난 희생입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죽음으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마 주님이 진정으로 우리는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부활도 안 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의 계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고 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그 값을 누가 치러도 치러야 합니다. 하온데 예수님께서 그 죄 값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미 예정된 의의 계시요 구원의 승리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과 신비를 아셔야 합니다.

 

어느 아주 작은 퓨리턴(puritan)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깨끗하고 정결하게 정리되어 있고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일은 그 수도사가 다하였습니다. 그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녀는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추방당하게 되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감옥에 처넣어졌습니다.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그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간음한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죽음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와 부활에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긍휼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말씀과 은혜, 십자가와 부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23:43)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주님의 십자가만이 긍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죽음의 승리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 길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 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냈습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없이 죽음이라고 하는 한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맥스로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모멘토리(Momentori),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모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주님을 생각하시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기 전에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일생에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그래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이슬람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 밖에 볼 수 없지 않소?” 이 말에 스탠리 존스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네 이슬람교와 우리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의 계시는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무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성현이나 각종 종교의 창시자도 죽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영웅호걸도 백만장자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되면,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십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계시로 영광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