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사야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사 53장1-5)

nam씨 2016. 3. 19. 14:28


[종려, 고난주일]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531-5)

 

고난 주일입니다.

어떻게 고난 주일을 지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자세일가요?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팔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고,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며, 음식도 간신히 삼키는 정도였습니다. 소년은 매일 할아버지 방으로 점심을 챙겨 가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소년은 그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해냈지만, 별로 즐거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는 그 일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어머니에게 이제부터는 엄마가 할아버지를 먹여 드리세요!라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을 꺼냈습니다. 너도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으니 할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부 알 때가 된 것 같구나. 할아버지는 원래 아주 건강한 분이셨지. 그런데 네가 아기였을 때 사고가 생겼단다. 불이 났었지. 지하실에서 일하던 네 아버지는 네가 엄마와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고, 나는 네가 아버지랑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그래서 각자 급히 집을 빠져나왔던 거야. 그때 먼저 나와 계셨던 할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사태를 파악하시고는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들어 가셨단다. 2층에서 너를 찾아내신 할아버지는 젖은 담요로 너를 감싸 안고 미친 듯이 뛰어나오셨단다. 그날 너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심한 화상뿐 아니라 연기에 질식된 상태에서 응급실로 실려 가셨어.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소년은 더 이상 아무런 불평 없이 점심을 챙겨 할아버지 방으로 갔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눈이 수북히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두 사람이 찾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사람은 미국 노인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사람 이었습니다. 눈 속을 빠져 나가며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6.25 전쟁시 한 미군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아이 울음 소리였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그 소리는 눈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눈 속에서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미군병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또 한 번 놀란 것은 흰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 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곤,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 안은채 얼어 죽고만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미군병사는 언 땅을 파 어머니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리고 가 자신의 아이로 키웠습니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고, 그때 언 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년이 눈이 수북히 쌓인 무덤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아래 눈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알몸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무덤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워냈습니다. 그런 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 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위에 쓰러져 통곡을 합니다. 어머니 ! 그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상>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리들리 하버갈이라는 여인이 그림 아래 적힌 내가 너를 위하여 이처럼 고통을 당했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라는 글귀를 메모지에 적어 두었습니다. 얼마 뒤, 그녀는 그 메모지를 다시 보았지만 전과 달리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어 벽난로에 던졌습니다. 그 순간 역풍이 불어 메모지가 다시 거실 안으로 날아와 떨어졌습니다. 이 일을 심상치 않게 여긴 그녀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해 그 글을 바탕으로 찬송가 가사를 적었습니다. 그 찬송이 바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찬송가 311)입니다.

 

찬송가 311(185) 내 너를 위하여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 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내 몸을 희생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3. 죄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하느냐

 

4.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주느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가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엄마는 아기를 낳기 위해 피를 쏟으며 산고를 치르지만 아기는 엄마를 위해 한 일도, 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셨는데 더 이상 무엇을 달라고 몸부림치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용서, 치료, 기적, 능력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4:15)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와 율법과 사망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해주심을 확실히 믿으시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임을 명심하고 사나 죽으나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예수님의 고난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대속의 고난

예수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가수 윤 복회는 이 말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윤 복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윤 복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윤 복회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윤 복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원한 나무 밑에서 한 성인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선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도가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배고픈 귀신인 아귀에게 쫓기던 불쌍한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품안으로 도망쳐 들어 왔습니다. 성인은 그 비둘기를 품에 감싸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여보시요. 그 비둘기는 내 밥이니 내어 주시요>

<나는 내 품으로 들어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비둘기를 네게 내어 줄 수가 없다>

<난 배가 고파 죽겠으니 내주시오. 나는 배가 고파서 미치겠습니다.

<나는 이 가련한 비둘기의 생명을 내팽개칠 수가 없다. 차라리 비둘기 무게만큼 내 살을 베어 주겠다.

성인은 양쪽에서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 쪽에 비둘기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저울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살점을 더 베어서 저울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울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아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며 꽃잎이 휘날렸습니다. 성인은 그제야 도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려는 곳에 생명이 있음을 알았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곳에 성취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딸 대신에 어머니 얼굴이 망가졌습니다. 비둘기 대신에 성인의 살점을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2. 자청의 고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 당한 고난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7-18)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예수님은 자청하여 찔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못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예수님은 온 몸이 고난으로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죄악의 원어는 원죄입니다. 나의 자범죄와 원죄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징계를 받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가야바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자청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이는 우리 병을 고쳐 주시려는 고난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3. 최대의 고난

예수님이 죄인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고 하더라도 40대 이상은 치지 못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칠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세지 않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사하였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도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의인이 죄수가 되었습니다. 성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강도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돈 한 푼도 없으신 분이 부자의 묘에 누우셨습니다.

최대의 의인이 최고의 악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3가지 특징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대속의 고난, 자청의 고난, 최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신학자 캠벨 몰간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학자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은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캘빈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 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어둠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그만 사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바라는 데 예수님을 친히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앞서 가기를 원하는 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쌓아 놓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모두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런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아야 할 고난은 무엇일가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남은 고난은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남긴 고난은 무엇일가요? 우리가 채워야 할 고난은 무엇일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이 모범을 보여 주시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그는 칼을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5분내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여 보시요>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1, 2…….5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칼을 휘둘러 대는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 하였습니다. 그 때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으로 다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긴장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다가가더니 휘두르는 칼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이는 자기 아들을 가리켰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칼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 할 때 이 칼을 들고 와서 5분 내에 죽여 달라면 죽이겠습니까?>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요? 할머니!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그 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십니다.

 

19세기 미국의 교육자 호라스만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소년 감화원을 짓는 개원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감화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면 이 건물을 세우는 데 든 예산과 인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개원식이 끝나고 한 신사가 호라스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닙니까?>

이 때 호라스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치다니요? 만일 그 아이가 당신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수십억 원을 들여서 건물을 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