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환채의 향기 (아7:10-13)
합환채의 향기 (아7:10-13)
= 십자가를 지는 삶 =
요 약
영적으로 성숙한 신령한 성도들은 주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자기를 꺾고 순복하고 희생하려는 의지가 견고하다. 그들은 주님을 섬길 때 받는 고통도 기쁨과 은혜로 여긴다. 나아가 주의 사명을 위해 고난도 자처하며 이 때 주님은 더욱 밀접하게 만나주신다. 또한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충성을 다 하고자 한다.
설 명
1. 배 경
⇒ 남편의 만족을 위한 술람미의 끊임없는 배려가 나타난다.
2. 적 용
(진단) 부부생활의 만족도에 진전이 없나요?
(해결) 배움과 경험을 통하여 자꾸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3. 사랑의 발전
2:16 → 6:3 → 7:10
내 만족에서 주님을 위함으로 발전한다.
4. 더욱 영화롭게 해 드리려면
1) 자기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라
10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 남편을 위한 희생심을 본다.
2) 사명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라
11절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 부부생활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3) 예수의 마음으로 충성하라
12절 “일찌기 일어나서 - 포도 움이 돋았는지”
: 서로의 느낌을 존중한다.
4)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라
13절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 부부생활의 만족함과 방법의 다양성과 배려가 있다.
아가 7:10-13
10 (술람미)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원 문
10 ידודל ינא 아니 레도디(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ילעו 웨알라이(나에게) ותקושׁת 테슈카토(그의 사모함이 있도다)
11 ידוד הכל 레카 도디(내 사랑하는 자야 가자) אצנ 네체(우리가 나가서)
הדשׂה 핫사데(들로) הנילנ 날리나(머물자) םירפכב 밬케파림(동네에서)
12 המיכשׁנ 나쉬키마(우리가 일찍 일어나서) םימרכל 랔케라밈(포도원으로 (가서))
הארנ 니르에(보자) ןפגה החרפ םא 임 파르하 학게펜(포도나무가 잎을 피웠는지)
רדמסה חתפ 핕타흐 핫세마다르(포도송이가 잎을 열었는지)
םינומרה וצנה 헤네추 하림모님(석류나무가 꽃을 피웠는지)
ןתא םשׁ 솸 엩텐(거기서 내가 줄 것이다)
ךל ידד־תא 엩 도다이 라크(내 사랑을 너에게)
13 םיאדודה 핟두다임(합환채가) חיר־ונתנ 나테누 레아흐(향기를 발산하고)
וניחתפ־לעו 웨알 페타헤누(우리 문 위에)
םידגמ־לכ 콜 메가딤(모든 좋은 열매가) םישׁדח 하다쉼(새 것)
םינשׁי־םג 감 예솨님(또한 오래된 것이 (있도다) ידוד 도디(내 사랑하는 자여)
ךל יתנפצ 차파느티 라크(내가 너를 위해 쌓으리라)
스 토 리
술람미는 이제 자신이 온전히
솔로몬의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전에는 투덜거리며 못마땅해하던 남편이
이제는 술람미를 온전히 사모하고 있었다.
술람미 역시 그를 더욱 깊이 사모하게 되었으며
더욱 그에게 깊은 사랑의 만족감을 주고자 했다.
그녀는 왕궁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롭게 사랑하길 원했다.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은 봄의 계절과 함께 더욱 무르익어 갔다.
수태증진과 최음의 효과가 있는 합환채가 사용되고
만족을 위한 성생활의 방법도
옛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퍽 다양해졌다.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고안한 것이었다.
(강 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합환채의 향기”입니다. 합환채란 자수나무라 해서 ‘사랑의 사과’로 불리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의 열매는 맥추기에 결실하며 그 뿌리는 최음제 혹은 수태증진제로 사용된 나무였습니다. 아가서는 이런 이야기까지도 나오는 책입니다. 합환채가 나오는 등 지금 아가서의 사랑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 동안 부부 화목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한 술람미의 모습을 봅니다. 그 결과 이제는 자신의 만족은 물론 남편도 만족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여자로서 완성되어 가는 술람미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남편이 만족하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더욱 완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또 다시 최선을 다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장성한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수록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했습니다. 그래서 장성한 성도는 어떻게 해야 주님을 더욱 영화롭게 해드릴 것인지 온갖 궁리를 합니다.
그럼 주님을 더욱 영화롭게 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10절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했습니다.
이 구절은 술람미가 남편을 위해서 노력할 결과 남편이 자기를 사모하는 것을 깨달음입니다. 이처럼 나를 온전히 줄 때 몸도 마음도 뜻도 하나가 되어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분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술람미가 극복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이기는 문제였습니다. 그 동안에 있었던 문제들을 신앙생활과 연관시켜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오빠들에 의해 강제로 포도원지기가 됨을 극복해야 했습니다(1:6). 이것은 택한 백성들이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신자가 포도원인 교회생활에 충실히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온갖 환난과 율법과 고통의 연단이라는 보조적인 수단이 작용합니다.
다음은, 연인을 연모하면서 연인 목자를 남편 삼기 위한 방황을 극복해야 했습니다(1:7). 처음 나온 사람이 교회생활을 통해서 감화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 진정한 사랑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방황을 합니다. 여기서 복음 진리의 미숙함과 신앙생활의 미온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음은, 포도주의 집에서 약혼자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지만 아직도 시각의 차이로 순종이 늦어지는 것을 극복해야 했습니다(2:9). 이처럼 복음과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도 사고가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고가 변화하지 않는 한 천상에 속한 삶은 불가능하며 언약하신 은혜의 실재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음은, 약혼자의 불변의 언약과 깊은 사랑을 확인했을 때 소홀함과 자만을 극복해야 했습니다(2:16-17). 그 결과 약혼자를 잃고 방황하는 심히 방황했습니다(3:1-4). 이처럼 하나님의 불변의 언약적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감사함과 아울러 아직도 잔재한 악한 성품은 그 언약의 축복을 안일과 자만의 육신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그들은 신학적 체험적으로 능통하지만 신령한 자를 비웃으며 더 깊고 아름다운 신령한 관계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정작은 실재적인 삶을 누리지 못해 방황하는 상태입니다.
다음은, 혼인한 후 그리운 고향 부모형제들에 대한 미련을 극복해야 했습니다(4:8-9).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게 되면 남편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려 할 때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부분이 세상 사랑입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주님의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보면 사랑하지 않게 됨은 물론 세상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다음은, 신혼의 첫 날밤과 초기의 고통을 이겨야 했습니다(4:6, 16).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고통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편함에서 벗어나 희생하는 마음이 없이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깨뜨리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자신의 신체 리듬에 따라 행동하다가 남편을 실망시킴은 물론 늦게 나타난 자신의 오르가즘을 처리하지 못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5:2-8).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몸의 상태보다 마음을 사용함으로 두 사람의 불만을 극복합니다. 이처럼 초기의 기도생활은 십자가를 지는 심정이지만 이를 극복할 때 영적인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부부생활의 만족을 경험한 술람미는 이제 피동에 머물지 않고 자발적으로 여러 가지의 테크닉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6:11-7:9). 그 결과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왕후들의 부러움을 사고 자신도 만족합니다. 이와 같이 이제는 희생이 폭이 넓어져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여러 뜻에 충성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아내의 부부생활의 특징이 그러하듯 처음에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점점 계속할수록 그 일이 기쁨이 되고 내 인생의 제일 가는 가치와 목적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영적인 시점을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시점에 이른 술람미는 자신으로 인해 남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10절) 이 7:10의 고백은 2:16과 6:3보다 더 높은 차원의 고백입니다. 이 세 고백을 비교해 보면 처음 신랑이 나에게 속함을 강조한 고백에서 점차 내가 남편에게 속했다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내가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지만 이제는 남편이 아내의 사랑에 감동함입니다. 현재의 사랑이 첫 사랑보다 못하다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나 혼인집의 준비한 포도주보다 주님이 내신 포도주가 더 좋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도우시면 첫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배우자임을 고백하시고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만점 짜리 배우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내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주십니다(고전6:13). 이것이 우리가 늘 주창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주권 중심의 경건하고 신령한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주의 은혜로서 나를 겸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2.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주님의 남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11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고 말합니다.
여기 들이란 거친 들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들이란 우리 나라처럼 그냥 농사 짓는 평탄한 들이 아니고 움푹 패이고 치솟는 험준한 광야입니다. 이 들이 얼마나 거칠든지 창 35장을 보면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에브랏 길을 가다가 길이 험하여 난산하여 죽었습니다(창35:16-20). 이 들판은 술람미가 시집올 때 이스라엘의 60용사들이 칼 차고 호위했던 지극히 험한 곳입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유숙하자”의 ‘동네’(םירפכ 케파림)는 ‘성벽이 없는 마을들’(KJV, NIV, Lange)로 통행이나 기타 까다로운 법의 제재를 덜 받는 자유로운 장소입니다. 또 이 동네의 원문은 하나가 아니고 ‘동네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낱말입니다. 그리고 일부 번역성경이나 학자들은 이 ‘동네’를 1:14, 4:13처럼 ‘고벨화’로 (RSV, NEB, G. L. Carr, Delitzsch)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랑과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굴곡이 있고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또한 성벽도 없고 자유로우며 여러 곳의 동네인 그곳에서 유숙하자고 한 의미는 약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이런 달동네에 사는 백성들을 왕과 함께 돌아보자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부부생활에서 격정적인 부부생활을 하자는 은유입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의 발전은 자유롭고 격정적이며 새로움으로 나갑니다. 즉 성생활을 즐길 줄 아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술람미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면 이제는 도리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일하고 함께 고난받기를 더욱 사모하며 그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전에는 영적인 교제만 해도 큰 희생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주님이 도구로서 자기 백성을 위해 돌보시는 희생적인 주님의 그 사명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주님께서 남기신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에 십자가 질 사람이 없으니 누가 질 것이냐 하신다면 “제가 지겠습니다” 기쁨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목회자로서 어려움을 당할 때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동참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적극적인 의미를 모르면 주의 일하다가 상처받습니다. 이제 내가 죄에 대해 죽는 그 정도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십자가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온전히 주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충성해야 합니다.
12절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 “우리가”란 서로가 존중함을 뜻합니다. 초기에는 남편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아내도 노력함으로 대등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여기 우리라고 한 것처럼 이제는 어느 일방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주관합니다. 그런데 “일찍이”라 한 것처럼 서로의 요구에 지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함입니다. 부부생활이란 때가 지나면 불가능해 질 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남습니다. 자기 일에 열중하다가 실망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마치고 청을 들어주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이미 노여움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한 이 구절은 서로의 갈망을 단계적으로 묘사함입니다. 이 구절은 6:11의 반복처럼 보이나 다름은 전자가 배려에 의한 것이라면 여기는 갈망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갈망하여 남편의 그러한 상황이 오기를 사모합니다. 전과 비교할 때 놀라운 발전입니다. 즉 움이 돋음은 정력이 돋아남을 시사하는 회춘입니다. 꽃술이 퍼짐은 발기를 시사합니다. 그리고 석류꽃이 핌은 완전히 발기되어 크게 돌출 되는 시점입니다. 이처럼 성숙한 아내는 남편의 상태가 오기를 사모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몸은 서서히 달아오르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성감대가 작용하면 남편의 테크닉이 크게 필요 없을 만큼 몸이 준비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성감대가 중요합니다.
이것의 신령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감동하심에 민감하라는 교훈입니다. 즉 움과 꽃술과 석류꽃은 성령의 감화 감동 충만 등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감동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속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봉사할 마음 주실 때 즉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도 몇 초 머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즉시 포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자는 교훈입니다. 이 마음은 성령으로 우리의 중심에 부여됩니다. 바울도 이 마음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이 마음은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잘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자고 권면합니다. 빌2:1-5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했습니다.
4.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13절에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술람미의 노래입니다. 여기 ‘합환채’(ידוד 두다이)는 가지과의 식물로 ‘자수나무’ (mand rake 맨드레크)로 불려지기도 하는 ‘사랑의 사과’입니다. 이 나무는 키는 작고 잎은 둥글고 넓으며 꽃은 자주 빛이며 열매는 사과보다 작고 둥글고 노랗거나 불그스름한데 냄새는 독특한 향내를 지녔습니다. 이 열매는 맥추 때(시완월:양력5-6월)에 결실하며(창30:14) 그 뿌리는 최음제 혹은 수태증진제로 자기 전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레아가 남편 야곱을 차지하기 위해 이것을 라헬에게 준 적이 있었습니다(창30:14-17). 여기서 남편을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하는 술람미를 봅니다. 이것을 사용함보다 서로를 위한 적극적인 희생과 배려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곧 인격적인 배려를 전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입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이란 시간이 갈수록 윤활 작용의 감소 및 발기의 부족 등으로 퇴화됩니다. 이 때 서로의 배려로서 보조수단이 사용됩니다. 조심해야 할 점은 갱년기에 정력 증강을 위해 고단위 단백질의 정력식품들은 단기적인 효과는 있으나 동맥경화를 일으켜 성적 불구자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제는 미혼들의 성 문제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시기에서 이 문제야말로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욥의 정신으로 때묻지 않는 신앙생활을 꿈꾸는 청소년이라면 이 시기의 성 문제는 더욱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로 다가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본능과 싸워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극복을 위해 더러 제시된 방법이 있으나 소극적인 것이고 단 한 가지 돌팔 구는 자위행위인데 여기에 대해서 찬반 의견이 강합니다. 성경에 자위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생리적인 것이요 성적인 건강을 위해서 적절히 필요하며 이것을 율법의 굴레로서 억제한다면 정죄 받아 험한 시험의 수렁에서 헤 메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위행위는 하나님이 내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신앙에 위배된다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찬성이 옳다면 문제가 쉽지만 반대가 옳다면 이를 극복해야 할 대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실 본능과 싸워 이길 대안은 없습니다. 그래도 신앙적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앙 절대론을 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역시 지킬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 논리를 여기에 적용함이 타당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달리 적용하사 묵인하신 경우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마19:8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믿는 변함이 없으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는 비록 신약시대이지만 청년기의 이 문제는 구약시대를 능가하는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악한 신체적 환경에 처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에 대해서 용납 혹은 긍휼히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해소 차원을 넘어 마음의 범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충성된 마음으로 고하는 의견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저에게도 긍휼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여기 ‘우리 문’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부부의 ‘성’을 은유한 것으로 봅니다(Pope, 강병도). 이것은 앞서 5:2에서 성 거절에 가까운 술람미의 행동을 남편을 문 밖에 세워둠에 비유함과도 같습니다. 아가서에서 성을 시사하는 은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4:6의 몰약 산이나, 4:12의 봉한 샘이나, 5:2과 7:13과 8:9의 문이나, 5:10-16의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것 등 여러 묘사가 그렇고, 5:16과 9절 하 반절의 입이나, 6:11의 호도동산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문의 각양 귀한 실과란 부부생활의 다양성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 것 묵은 것을 구비하였다는 것은 그 고안됨의 옛것과 새것 즉 발전성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부부생활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성생활의 발전은 부부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신 복이지 죄악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한 말씀은 이제는 남편의 만족을 위해서 힘쓴다는 뜻입니다. 이는 부부생활을 리드해 가는 아내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고, 엡5:10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 내 방식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여쭈어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뜻을 다 이루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합함이란 항상 여호와께 여쭘에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물음은 하나님 주권신앙을 수립하는 좋은 훈련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족하도록 섬기는 방법입니다.
< 결론>
참으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살펴서 사십시다.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순종하고 충성하십시다. 마지못함과 기쁨은 그 가치가 다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만족스런 성도가 되지 못했다면 회개하시고 마음을 다하여 온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