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나임의 춤 (아7:1-5)
마하나임의 춤 (아7:1-5)
= 신령한 사역자 =
요 약
주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선사할 사람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여 신령한 사역을 하는 경건한 성도이다. 영적 사역자의 자질은 먼저 전도의 열정으로 가득하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며, 복음을 가르쳐 중생하도록 돕고, 많은 믿음의 자손을 낳는 사람이며, 사랑과 믿음으로 양육하여 장성시키며, 끝까지 희생하며, 눈물이 마르지 않고, 양을 지키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존경과 겸손의 사람이다.
설 명
1. 배 경
⇒ 왕후들이 춤을 추는 술람미의 신체를 칭찬함이다.
2. 적 용
(진단) 부부생활에서 옷을 인해 다투신 적이 있나요?
(해결) 이 때 옷은 부부생활의 방해물입니다.
3. 영적 사역자의 자질
1) 전도의 열정
1절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남편에게 신속하게 응하는 술람미의 모습을 부러워함이다.
2) 말씀과 능력을 구비
2절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 구슬 꿰미 같구나”
: 대퇴부의 촉감을 뜻한다(1:10, 4:9, 7:1).
3) 중생의 역사
2절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 오르가즘을 위한 아내의 적극성을 가리킨다.
4) 많은 믿음의 자손
2절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 비만하지 않는 우아한 허리를 비유함이다.
5) 양육할 줄 앎
3절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 균형 있고 사랑스러운 유방을 시사한다.
6) 희생적인 마음
4절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 목은 희고 긴 목을 가리킨다.
7) 눈물의 사람
4절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 감동적인 눈물의 사람이었다.
8) 양들을 지키는 사람
4절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 코의 윤곽이 뚜렷함이다.
9) 하나님께 기도함
5절 “머리는 갈멜산 같고”
: 이 산의 모양처럼 두상이 잘 생겼다.
10) 존경과 겸손의 사람
5절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 최대의 존경과 헌신을 상징한다(요12:3).
아가 7:1-5
1 (왕후들)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원 문
1 ופי־המ 마 야푸(얼마나 아름다운가) ךימעפ 페아마이크(네 발이)
םילענב 반네알림(신(샌달)을 신은) בידנ־תב 바트 나디브(여왕같은 딸아)
ךיכרי יקומח 함무케 예레카크(너의 둥근 넓적다리는)
םיאלח ומכ 케모 할라임(보석과 같도다)
ןמא ידי השׂעמ 마아세 예데 암만(숙련공이 손으로 만든)
2 ךררשׁ 솨르레크(너의 배꼽은) רהצה ןגא 악간 핫사할(둥근 접시(bowl)와 같도다)
רסהי־לא 알 예흐사흐(결코 부족함이 없는) גזמה 함마제크(섞은 포도주)
ךנשב 비트네크(네 배(belly)는) םישח תמרע 아레마트 힛팀(밀밭의 많음 같이)
הגוס 수가(울타리를 둘렀도다) םינשׁושׁב 밧쇼솬님(백합화로)
3 ךידשׁ ינשׁ 쉬네 솨다이크(너의 두 유방은)
םירפע ינשׁכ 키쉬네 오파림(어린 사슴 두 마리 같도다)
היבצ ימאת 타오메 체비야(가젤 쌍둥이) 4 ךתאוצ 차와테크(네 목은)
ןשׁה לדגמכ 케미그달 핫쉔(상아탑과 같도다) ךיניע 에나이크(네 눈은)
ןובשׁחב תוכרב 베레코트 베헤쉬본(헤스본에 있는 풀장과 같고)
רעשׁ־לע 알 솨아르(문 곁에 있는) םיבר־תב 바트 랍빔(바드랍빔의)
ךפא 아페크(네 코는) ןונבלה לדגמכ 케미그달 할레바논(레바논의 탑과 같도다)
הפוצ 초페(바라보고 있는) קשׂמד ינפ 페네 담마세크(다메섹의 얼굴을)
5 ךשׁאר 로쉐크(네 머리는) ךילע 알라이크(너를 빛내고)
למרככ 칵칼멜(갈멜과 같이) ךשׁאר תלדו 웨달라트 로쉐크(그리고 네 머리털은)
ןמגראכ 카아르가만(자주빛 같도다) רוסא ךלמ 멜레크 아수르(왕이 사로잡혔도다)
םישהרב 바르하팀(그 나무들 사이에)
스 토 리
왕의 총애를 받는
술람미의 특출한 점은
왕후와 비빈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들은 술람미의 심성과 미모와 소질이야말로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천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춤추는 술람미를 우러러보며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술람미의 매력을 보았다.
남편이 원함을 눈치채고 곧바로 응하는 그 고운 마음씨
왕을 만족시키고 마는 그 움직이며
늘씬하고 우아한 허리
알맞게 균형 잡힌 유방
시원스럽게 길고 흰 목
감격과 연민의 감동적인 눈물
죽지 않고 균형 잡힌 코
갈멜산 봉우리처럼 잘 생긴 두상
거기다 왕이 매표될 수밖에 없도록
머리를 풀어 발을 씻는 남편을 향한 사랑과 존경이 있었다.
왕후들은 이처럼 잘 갖춰진 천부적인 미모와 인격과 사랑을 갖춘
술람미에게 어찌 왕이 반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강 해)
오늘은 ‘마하나임의 춤’이라는 제목입니다. 마하나임이란 창 32장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 즉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오던 중에 하나님의 천군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군대를 앞에 둔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이 군대를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 마하나임의 춤이란 곧 천군 천사들의 춤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승리의 춤입니다. 이러한 천군 천사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야곱을 죽이려던 외삼촌 라반의 마음이 돌이킴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왕적 권세를 배후에 업고 어둠과 악과 가난 등의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돕는 왕후의 그 모습이야말로 천사처럼 선하고 어질며 천군처럼 능력 있고 권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은혜 받아 예수의 마음 가지고 영광과 권세로서 천군 천사처럼 주의 일하기를 그토록 원하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모습은 왕후들이 부러워하였듯 모든 주의 일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요 자랑입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이란 성도들이 은혜 받아 예수의 마음과 권세로 천군 천사처럼 주의 선한 활동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춤이 암시하듯 이러한 활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쁨으로 넘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이 춤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춤을 부부생활에 적용하면 이미 언급한 대로 남편 솔로몬에 대한 시각적인 만족을 선사하는 술람미의 재치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마하나임의 춤은 술람미의 나체의 춤입니다. 그런데 앞의 6:14이 암시하는 대로 솔로몬은 술람미의 이 춤을 알고 있고 또한 감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노래는 왕후들과 비빈들의 노래이지만 실재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술람미 왕후의 완전한 아내로서의 모습을 왕후들의 노래를 빌어 시사한 시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왜냐하면 지엄한 왕궁에서 총애 받는 왕후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가정에서의 의복 문제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은 마하나임의 춤을 추는 술람미 왕후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서 신령한 사역자들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그럼 신령한 사역자들이 되려면 구비 사항은 무엇입니까?
1. 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1절에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했습니다.
이 칭찬은 춤추는 술람미를 바라보고 부러워하면서 부르는 왕후들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여기 귀한 자의 딸이란 문자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것은 술람미가 귀인의 딸도 아니며 평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은 춤추는 술람미 왕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시문학적인 감탄조의 과장입니다. 시문학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표현입니다. 즉 귀한 자도 귀한데 그 귀한 자가 귀하게 여기는 딸이니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그만큼 아내가 남편에게 귀하게 여겨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 곳에서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부분들이 있는데 비교해 보면 4:1-5의 칭찬은 술람미의 상반신에 대한 칭찬이요, 6:4-7에는 얼굴에 국한된 칭찬이었고, 6:10에는 왕후의 영광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발에서 머리털까지 전체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의 순서도 발에서 시작하여 머리까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순서적이라는 점입니다. 단지 눈보다 코가 나중에 나오는데 이것은 높은 연단에서 춤추는 점을 고려할 때 보이는 대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그 순서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순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신체의 부분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직접적인 묘사를 회피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면 그 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나님의 춤이란 표면적으로는 춤의 형태이지만 남편을 향한 술람미의 테크닉을 시사한 것입니다. 그 테크닉이란 가정에서 사랑을 받게 하는 의상 혹은 성생활의 상위체위 혹은 부부생활의 적극성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칭찬의 그 첫째가 신을 신은 발에 대한 칭찬입니다. 성경에서 신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의 상징이기도 했지만(출3:5, 수5:15), 일반적으로는 자유인의 상징이요(대하28:15, 사20:2-4), 출입의 상징이었습니다(사52:7). 그런데 본문의 신을 신은 발은 5:3을 비추어 볼 때 남편을 신속히 맞는 아내의 배려를 가리킵니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원하고 순간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신체적 리듬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요구는 뜻하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요구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거나 외면할 때 남편은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신속한 맞음은 아내의 신체 리듬이 깨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남편을 정신적으로 사랑함이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사랑 없이 정략적인 결혼을 한 다른 왕후들과 비빈들은 조강지처인 술람미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러운 나머지 너야말로 진실로 남편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구나 칭찬합니다. 술람미가 가진 다른 조건도 마찬가지로 왕후들과 이런 차별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면서 이 본문을 풀어가야 합니다.
이는 신령한 의미에서 전도자의 발입니다. 즉 영적인 사역자는 영혼을 구원하려는 구령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를 의무나 강제로 한다는 것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그러나 은혜를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도는 저절로 나옵니다. 한 순간도 주님 자랑을 하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감격 속에서 전하는 복음이라야 또한 은혜를 끼칩니다. 사52:7-9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했습니다. 이렇게 감탄사가 붙는 경우는 드문데 전도자의 발길에 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도하는 발길처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가장 기뻐하시듯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께 돌아오게 것이 전도이니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2. 신령한 사역자는 말씀과 능력을 구비해야 합니다.
1절에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했습니다.
이 구절은 왕후의 넓적다리를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 넓적다리는 다리와 골반이 연결되는 굵은 부분을 의미합니다(창32:25-32, 46:26, G. Loyyd Carr). 그리고 ‘둥글어서’란 단지 둥글다는 의미보다 각선미가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넓적다리를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꿰미”에 비유했습니다. ‘구슬꿰미’는 돋보이게 하는 역할 때문에 미의 극치를 뜻했고 앞에서도 구슬꿰미가 나올 때마다 술람미가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건이 있었습니다(1:10, 4:9, 7:1). 그런데 여기 구슬꿰미는 1:10이나 4:9의 진주목걸이(םיזורת 하루짐)가 아니라 수준이 더 높은 구슬꿰미입니다. 즉 이 구슬꿰미는 원문에 (םיאלה 할라임)으로 이 구슬은 금 은 보석꿰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선미와 부드러운 촉감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의 극치입니다. 특히 둥글다는 표현은 2절에 아내의 국부를 시사할 때도 쓰이지만 아내의 상위체위로 인한 부드러운 촉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꿴다는 표현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이 시각적이고 능동적인 대퇴부의 매력은 아내가 상위체위일 때 가능합니다. 이 때 아내의 능동성으로 인해 대퇴부의 촉감은 더욱 만족으로 이끌어 줍니다. 남자는 아내가 만족할 때 비로소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부부생활에서 변화성 있는 상위체위는 늘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오르가즘에도 도움이 됩니다. 남편은 취함에서만 아니라 취함을 당함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또한 아내를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취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을 원하고 눈을 감기보다는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혹시 아내의 개성에 맞지 않을지 몰라도 남자의 심리를 참고한다면 가정 행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왕후들이 술람미의 이 점에 그토록 찬사를 보낼까요?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국의 공주들로서 예법의 틀에서 자라온 성장 배경으로 상위체위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고 노동을 통한 단련된 술람미와는 달리 체력 또한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이 사실이 교훈 하는 바는 넓적다리는 힘의 상징이요(출29:22) 구슬꿰미는 말씀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령한 사역자가 갖출 중요한 요건입니다. 여기 금 은 보석은 본래 신성의 상징으로 은혜와 진리는 아주 귀한 가치입니다. 이와 같은 충만한 영적 권세를 입은 자는 많은 사역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요10:34-3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셨습니다. 마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모세를 바로 왕 앞에 신처럼 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성령의 상징 감람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하심도 은혜와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가르쳐 줍니다.
3. 신령한 사역자는 복음으로서 중생의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2절에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섞은 포도주”란 원액의 탁한 것이 아니고 물을 탄 선홍색의 묽은 포도주를 뜻합니다. 그리고 “가득히 부은”이란 문자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표면적으로는 건강한 여인의 다량의 맑은 경수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순서적으로도 부합하고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그렇습니다(G. Loyyd Carr). 물론 춤추는 술람미에게서 경수가 발견되었다기보다 왕후들의 눈에 비치는 그녀의 성적인 건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술람미의 라이벌들인 그들의 눈은 그 표면적인 것 그 이상을 연상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술람미가 왕을 매우 만족시키겠다는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성에 눈이 뜬 아내와 불감증의 아내와는 남편에게 주는 행복감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둥근 잔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미 1절에서 설명했듯이 이 둥근 잔은 촉감은 물론 오르가즘을 유발시키는 지속적이고 원활한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5:14의 남편의 부드럽게 애무하는 남편의 손길을 황금노리개로 묘사함과 흡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술람미가 상위체위에서 부부생활을 리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구절에 당시 사람들이 유쾌하게 마셨던 섞은 포도주 그리고 가득함이 그러하듯 이는 왕후들이 이러한 술람미로 인해 왕이 퍽 만족하겠다고 부러워함입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것은 당시 왕궁 여인들이 법도를 중시하여 부부생활을 주도함을 부끄럽게 여겼고 따라서 이러한 불감증에 가까운 상태로서는 남편의 만족도를 높여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민 출신 술람미는 그러한 왕궁의 전통을 모르고 순수한 자연인으로 살아왔기에 그러한 전통을 깰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은 자녀도 의복도 체면도 그 무엇도 방해물이 될 수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마하나임의 춤에서 성생활의 단면만이 아니라 평소 가정생활에서 술람미가 보여주는 아내로서의 모습을 봅니다. 그녀는 가정에서도 남편의 마음을 끌만큼 자신을 단장하고 노출하고 있었습니다. 레바논 고산지대 산골 추운 지역에 살다가 예루살렘 여름 나라에서 사는 술람미에게는 이것이 가장 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운 나라에서만 살던 왕후들은 조금만 추워도 옷을 벗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입고만 살던 왕궁의 체모에 익숙한 성장 배경을 가졌기에 거추장스러운 예복만 입은 체 자신을 노출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남편의 마음이 어느 편에 끌릴까요? 혹시 체온이 냉한 체질이라면 몸을 덥게 하는 식품을 먹어서라도 체온을 같이 하십시오. 여자들 중에는 냉한 체질이 많아 여름에도 추위를 타서 남편의 애를 먹이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또 대개 가정에서는 단장하지 않으면서 밖에 나갈 때는 뭇 남편의 시선을 끌만큼 단장하거나 노출을 합니다. 그 결과 남편들의 마음은 가정 밖의 여성들만이 매력적이라는 인식을 줍니다. 그래서 연애시절만 기억날 뿐 결혼 후에 자기 아내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정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최대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위해서라면 노출은 물론 온갖 멋을 부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편을 도취시키는 사랑의 포도주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물을 탄 포도주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둥근 잔”은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받으시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막의 물두멍은 둥글었습니다. 이처럼 전도자는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어 세상의 말보다 복음을 가르쳐서 중생의 역사를 많이 일으켜야 합니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사람은 그 산파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틀들을 파격적으로 깨고 말씀과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좋은 전통은 살려나가고 잘못된 틀은 과감히 개야 합니다. 이 틀을 깨지 않는 한 부흥 운동은 여러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한 신앙운동에 죄인들 다수가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 믿는 수많은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4. 신령한 사역자는 많은 믿음의 자손을 낳아야 합니다.
다시 2절에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했습니다.
이 부분은 춤추는 술람미의 허리를 칭찬함입니다. 허리가 “밀단”(תמרע 아레마트) 같다 했습니다. 여기 밀단은 보릿단과는 다릅니다. 늘씬한 몸매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백합화로 둘렀다는 것은 허리가 우아하기 그지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백합화 같은 허리란 사랑의 행위를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다고 한 대로 매우 사랑스러운 허리입니다. 지나친 비만은 애정감을 떨어뜨립니다. 그런데 왜 왕후들이 그토록 술람미 왕후이 허리를 극찬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술람미의 몸매는 왕궁 여인들의 몸매와는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왕궁의 여인들은 특히 솔로몬 왕에게 시집온 여인들은 이방 왕들의 공주들로서 노동도 없고 고급의 산해진미로 사는 자들입니다(단1:8). 특히 육식을 주로 하는 나라의 여자들의 경우 부인이 되면 뚱보 아줌마가 어울릴 만큼 상상치 못하게 비만해집니다. 특히 이 왕후들의 경우 쳐녀 시에도 그렇게 비만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후를 일반 궁녀도 아니오 이방 나라 공주들을 정략 결혼 해야 했기 때문에 나이가 맞든지 안 맞든지 인물됨이 어떠하든지 따질 수 없었고 따라서 그가 술람미에게 더욱 마음이 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레바논 수넴 산촌의 산채 먹고 살면서 노동한 술람미의 생활 다이어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특히 산채와 온갖 잡곡들은 몸매를 균형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비만은 성적인 기능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단지 우아한 허리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표현이 아니라 밀단이 암시하는 것처럼 다산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본래 허리는 자손이 있는 곳입니다(히7:10). 그리고 밀단은 많은 씨앗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아한 허리와 아울러 다산의 신체를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신령한 사역자들은 많은 죄인들에게 전도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밀단과 같이 말씀의 씨앗이 있어야 하고 백합화 같이 복음의 나팔을 힘차게 불어야 합니다. 지금 사역자들이 말씀이 풍성한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내용들은 모두 우리 사역자들이 사모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제 성화를 위한 수준 높은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 천당, 예수 구주에만 머물고 있다면 안 됩니다. 각인의 말씀의 수준에 따라서 먹일 대상이 다릅니다. 아볼로가 전한 수준과 바울이 전한 수준이 달랐습니다. 가령 예수 구원만 전하는 사람은 불신자에게 적당합니다. 아무리 신비하게 성경을 예수로 해석한다 해도 이 진리에 머무른다면 양육 대상은 중생을 전후하는 수준이 적당합니다. 물론 그 수준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심어주어야 함으로 아주 중요한 사역이며 한 목자이신 주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수준에 먹일 수 있는 다양한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씨앗만 준비해서는 안됩니다. 밀단을 백합화로 둘렀듯이 열심히 그리고 단단히 효과적으로 잘 전해야 합니다. 이 씨앗은 많은 믿음의 자손을 낳게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문화 명령은 신약에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하나님 자녀를 만드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말씀을 전하여 많은 영혼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신령한 전도자는 믿음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3절에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했습니다.
여기 유방을 “암사슴의 쌍태 새끼”에 비유했는데 그것은 쌍둥이이므로 둘이 동일하다는 것과 새끼는 심히 귀엽고 다리가 길어 등이 높고 수줍으며 잘 뛰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 왕후들이 술람미 왕후의 이런 유방을 부러워했을까요? 여기에는 필경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전재가 깔려 있습니다. 이 표현에 나오는 반대 의미를 찾아보면 쌍태라 한 대로 그들의 유방은 균형이 없거나, 새끼라 한 대로 그들의 유방은 너무 크거나 모양이 없다든가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특히 비만할 때 유방은 상상할 수 없이 크거나 쳐져서 독특한 모양을 합니다. 한 마디로 비만으로 인한 여성미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평소에 노동을 했기 때문에 근육의 적당한 발달은 물론 날씬한 몸매에 우아한 유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유방에 대한 칭찬은 술람미의 자손에 대한 양육까지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왕자를 낳고 그 왕자를 잘 양육하여 그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왕후로서 그 만큼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전도자는 왕이신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들을 양육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시킨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양육하려면 무엇으로 양육해야 합니까? 젖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 젖은 신령한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령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신령한 말씀이란 약 두 방향에서 즉 내용적으로 충실하고 성령과 확신으로 증거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살전1:4-5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수준과 각인의 수준에 따라 양육할 말씀이 다릅니다. 시대의 때를 따라 종말론도 강조해야 하고 각인의 신앙의 때를 따라 수준에 필요한 말씀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눅12:42-43에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상당히 자란 성도들에게는 성화와 사명과 재림을 위한 말씀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이 아가서 강해 역시 이런 면에서 좋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지도를 위해서는 성경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보여준 정통적인 해석법대로 해석하되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열립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이 해석법은 주관적인 듯 하나 이미 성경에 명시되고 강조된 객관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성령의 감동을 표방한 주관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부작용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열어주시는 말씀이라면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그 놀라운 말씀에 감격하게 될 것이고 기타의 우려는 신학을 통해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벧후1:19-21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젖은 믿음 사랑 안에서 먹여야 합니다. 암사슴의 쌍태 새끼는 믿음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두 유방은 성경에서 믿음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언제나 함께 나올 뿐 아니라(갈5:6, 갈5:6, 엡6:23, 살전1:3, 살전5:8, 딤전1:14, 몬1:5 등) 믿음 수준이 사랑 수준이고 사랑 수준이 곧 믿음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비만하여 여성미가 상실된 다른 왕후들처럼 우리가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정말 신령한 사역하기 어렵습니다. 남에게도 어렵지만 특히 본인이 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주의 종은 믿음과 사랑과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젖을 먹이듯 사랑과 믿음 안에서 먹여야 합니다. 혹시 양떼들이 따르지 않고 목회가 잘 안 된다면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6. 신령한 사역자는 오래 참는 인내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4절에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했습니다.
여기 ‘상아’(ןשׁ 쉔)는 ‘코끼리의 이빨’로 그 빛깔과 촉감과 무늬가 희고 부드럽고 좋아서 부와 사치의 표시요(암6:4) 교역이나 조세의 중요한 물품이요(겔27:15, 계18:12) 정교한 조각의 재료였습니다(겔27:6). 그리고 ‘망대’(לדגמ 미그달)는 성벽 구조물의 일부로 적의 동태를 살피는 전망대로(왕하18:8, 대하20:24) 그 중요한 특징은 우뚝 솟아 높다는 점이다. 이처럼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인의 조건 중에 목이 길어야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술람미의 목은 길었고 이것을 부러워한 왕후들은 목이 길지 않았습니다. 이는 선천적일 수 있지만 똑 같은 조건에서 원인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술람미가 비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만은 만병의 원인일 뿐 아니라 목조차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러니 다른 왕후들에게 값비싼 귀금속 목거리인들 어울리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술람미 여인을 부러워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서 6:13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를 보면 국민들은 한결같이 가난과 노동으로 왜소하고 목만 덩그렇게 길지만 오직 독재의 통치자와 그 가족과 측근들은 비만할 뿐 아니라 비만으로 목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이 예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긴 목은 수고와 고통을 아는 목입니다. 그래서 여기 다른 망대도 아니고 상아 망대라 했습니다. 상아 망대란 상아를 쌓아서 만든 상아탑으로 이것은 어떤 고생도 감수하겠다는 희생적인 의지를 나타냅니다(그랜드종합주석, 오지범). 즉 당시 왕후는 나라의 어머니인데 이런 희생이 없이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자와 어머니는 다릅니다. 여자는 아이가 배변을 하면 도망치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미워하지만 어머니는 기도합니다.
이처럼 신령한 전도자는 오래 참는 인내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심고 또 심고 뿌리고 또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수고한 바울의 희생을 봅니다. 고후11:23-28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순교한 스데반의 기도로 바울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했습니다. 오늘 내가 신앙인 혹은 유능한 일군으로 존재한다면 그 만큼 누군가의 희생적인 수고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고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7. 신령한 사역자는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4절에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했습니다.
여기 헤스본은 사해 동북쪽 25km 지점 고지대에 위치한 성읍으로 모세에게 정복되어 레위인의 성읍으로 지정된 성읍입니다. 이 성은 가파른 요새로서 꼭 사람의 얼굴 주위를 연상시키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의 바드랍빔 문 곁에는 맑은 양어의 연못이 있어서 항상 물이 절벽으로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술람미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박윤선, 렘9:1). 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문의 이름이 바드랍빔 문입니다. ‘바드랍빔’(םיברתב 바트랍빔)은 ‘민중의 딸’ 혹은 ‘많은 사람 가운데 있는 한 여인’이란 뜻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영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만큼 백성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 장례식에 나인성 과부 아들과 같이 슬퍼하는 행렬이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청년으로 불러주신 사람으로 감동적으로 살았습니다. 술람미의 눈물은 자기 슬픔의 눈물이 아니오 사랑과 감격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들 모두 감동되고 맙니다. 술람미에게 있던 이 눈물은 어떤 왕후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주 출신 왕후들은 고생을 모르기에 백성들을 보고도 그들의 어려움을 모르고 따라서 눈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산촌의 배고픔도 알고 오빠의 압제와 구박도 알고 레바논의 추움도 알고 노동의 고통도 압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백성들을 보면 눈물부터 앞을 가립니다. 술람미 왕후가 백성들을 보고 눈물 흐르는 이 사실 때문에 왕은 물론 술람미는 백성들의 찬사가 된 것입니다. 마치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처럼 이런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다른 왕후들은 내가 내 나라를 놔두고 이 나라에 와서 독수공방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불평할 뿐입니다. 이러니 다른 왕후와 비빈들이 어찌 가짜 울음으로 술람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흐르는 눈물은 역겨운 슬픔과 탄식의 눈물일 뿐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교회와 세상의 보배입니다. 바울도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도 다윗도 예레미야도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예루살렘아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눈물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 사역자들에게도 눈물이 필요합니다. 이 눈물이 있을 때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하되 눈물을 가지고 일한다면 진실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입다의 처녀 딸이 죽을 때 죽기 전에 그의 친구들이 함께 애곡했습니다. 이처럼 눈물은 전이성이 강해서 한 사람의 눈물은 많은 이로 하여금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기 원했던 것도 그의 눈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8. 양들을 악의 세력에서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4절에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했습니다.
여기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로서(창14:15, 왕상11:24, 19:15) 헤르몬 산이 위치한 안티 레바논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최대의 대적은 아람이었습니다. 아람은 다윗 왕 때에는 이스라엘의 지배에 있었지만 솔로몬 때에는 소바의 르손이 B. C. 930년에 이 도시를 정복하여 강력한 아람 국가를 건설하여(왕상11:23-25)이스라엘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메섹의 침공을 언제나 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편 레바논(수13:5)의 높은 지점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적의 침공을 감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망대는 다메섹의 침공을 감시하거나 정탐하기 위한 망대입니다.
왜 술람미의 코를 이 망대에 비유했을까요? 몇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먼저는 얼굴의 조화를 콧날이 이루어 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잘 생기려면 코가 잘 생겨야 합니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다음은 술람미의 코는 낮은 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코가 높다고 미인은 아니나 세계적인 미인 평가 추세가 콧날이 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여위면 콧날만 크게 남습니다. 본래 코가 큰 것이 아니라 얼굴의 근육에 묻힌 그 코가 드러났을 뿐입니다. 비만하면 콧날도 얼굴에 의해 묻혀 버립니다. 그러므로 같은 조건이라면 비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게을러 세속과 육신적인 것만 가득 찬 마음의 비만 가지고서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여러모로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코는 후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는 성도의 영적 분별의 능력을 뜻합니다(박윤선, Watchman Nee, 黑埼幸吉, 오지범). 그러므로 성도를 양육하되 외부의 세상과 이단과 마귀 등의 온갖 악의 세력에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히12:15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 했습니다.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사실 단순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성령 충만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광 돌리며 살면 됩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복잡해졌습니까? 그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 이단과 세속사상의 침투로 그것을 막기 위해 더 체계화되고 구체화된 변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레바논 망대는 악의 침투를 미연에 대비하는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온갖 악의 세력에서 지키기 위해 교육과 변증을 강화하여 말씀의 견고한 기초를 닦아야 합니다. 코가 얼굴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듯 한 방면이 아닌 성경과 양들과 세상과 원수들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이리와 사자의 입에서 구한 것처럼 영혼을 향한 필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먼저 이러한 영적인 분별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9. 강한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5절에 “머리는 갈멜산 같고” 했습니다.
여기 ‘갈멜산’(למרכ 카르멜, ‘과수원’)은 팔레스틴 지역의 지중해 연안 중앙부에 돌출한 반도의 산악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산입니다. 이 산의 최고봉 ‘에스피아’(Espia)는 해발 530m로 헤르몬산 다음으로 높은 산으로 산봉우리가 잘 생긴 사람의 두상처럼 둥그렇고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풍부한 강우량으로 숲이 울창하며 바다 쪽은 절벽으로 사람의 얼굴을 상징하며 이 산의 하단 기슭의 ‘하이파항’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이며 이 산은 우뚝 솟아 지중해와 팔레스틴 지역을 굽어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니까 이 산의 모습은 아주 수려한 여인의 두상과 흡사합니다. 술람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두상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당시 미인의 조건인 머리의 숱도 많았습니다. 머리의 숱에 있어서 같은 조건일 때 여윈 얼굴이 머리의 비례를 높게 합니다. 큰 얼굴은 얼굴의 분량이 더 많을 뿐 아니라 머리마저 귀찮게 여겨지거나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비만한 왕후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머리를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갈멜산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겨루어 이긴 기도의 장소처럼(왕상18:20-40) 악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강한 기도의 생활입니다. 그래야 여호와냐 바알이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세속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불로서 그들의 악을 사르고 기손 시내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죽였듯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악을 쳐죽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야와 같은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여우 꼬리에 훼를 달아 블레셋 곡식 벌판을 불살랐던 것처럼 기도로서 이 땅에 성령의 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이 부흥운동의 대 비전을 갖기 바랍니다.
마지막, 신령한 사역자는 하나님깨만 영광 돌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5절에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했습니다.
여기 드리운 머리털(םישהרב 바르하팀)은 풀어 내린 ‘머리타래’를 가리킵니다(에발트, 데 베테, 델리치, 최클러, 굿, 노이즈). 그런데 술람미의 머리는 본래 검었고 이것으로 인해 왕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받았었는데(4:1, 6:5) 이제는 자줏빛으로 변해 있습니다. 염색을 했을까요? 염색을 했다면 구태여 당시 근동지방에서 알아주지 않던 붉은 색으로 했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머리털에 왕이 매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염색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머리 다발의 끝에 해당되는 드리운 부분만 자줏빛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가서의 상징과 은유적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상징적인 해석을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자줏빛은 왕을 상징하는 색깔로(삿8:26) 이 색깔이 되어 있음은 그녀가 자기의 머리털로 왕의 발을 씻음을 상징하며 이는 최대의 존경과 헌신을 의미합니다(요12:3). 마치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붓고 그 머리털로 씻음과 같습니다. 술람미는 비록 왕후가 되었지만 백성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섬김은 심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왕후들은 이방 나라의 공주들로서 대접만 받고 살아왔기에 남편을 섬길 줄 모릅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만 들먹이며 섬김만 받으려고 합니다. 시대는 다르나 시45:10-11을 참고할 때 이방 공주 출신 왕후들은 자기 아비 집을 잊지 못했고 이로 인해 왕이 그들을 사랑할 수 없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략 결혼을 했기에 만약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국가간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세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아내를 이긴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피곤함 속에서 살아온 솔로몬 왕이 술람미의 이런 사랑을 받으니 어찌 감동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주의 사역자는 주를 최상으로 존대하는 겸손의 미덕을 가져야 함입니다. 이 미덕은 성도의 은혜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가 과거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처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격함으로 섬길 수 있고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남의 영혼은 구원하고도 겸손하지 않으면 물리침을 받습니다. 주의 일하고도 겸손치 못하다면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무익한 종의 비유처럼 온갖 충성을 다한 후에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하지 않는다면 자기 영혼을 실족시키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종이면서 주인을 부리려는 내 주관적인 자세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내가 할 일 충실히 하면서 하나님께 여쭈어 가면서 일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도 무엇을 전할 것인가 기도해 보세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길을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칭찬에 들뜨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존대하고 그 앞에 겸손하는 것이 성도의 최고의 미덕입니다. 마치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인 것처럼 이러한 사역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강하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신령한 사역자들을 보시면 마하나임의 춤을 추는 천군 천사를 보시듯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신령한 사역자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씀 안에서 성숙해 가자 자기를 알리셨듯 진리 안에서 성숙해 갈 때 그 실체와 영광을 더욱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참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일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