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아름다움Ⅲ (아6:8-9)
왕후의 아름다움Ⅲ (아6:8-9)
= 참 성도의 모습 =
요 약
성도는 영적 수준에 따라 약 네 종류로 분류된다. 시녀 같은 성도는 죄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모하는 성도요, 비빈 같은 성도는 주님의 삶까지 동참하나 일상화되어 있지는 못한 성도요, 왕후 같은 성도는 주님의 삶에 동참함은 물론 주의 관심사인 이웃까지도 사랑하는 성도이다. 그런데 왕후 중의 왕후 같은 성도는 그것은 물론 자신의 생명과 마음과 습관까지도 주와 일체 된 하늘에 속한 것으로 입혀진 성도이다.
설 명
1. 배 경
⇒ 왕이 술람미 왕후를 직접 간접으로 칭찬하는 내용이다.
2. 적 용
(진단) 배우자의 우월성을 느끼지 못하나요?
(해결) 이제 나에게 이 만큼 해줄 배우자는 만나지 못합니다(잠5:18).
2. 네 종류의 신자들
1) 시녀 같은 성도
: 주님만 사랑하지만 아직 주님의 삶에 동참하지 못한다.
2) 비빈 같은 성도
: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나 일상화되어 있지 못한다.
3) 왕후 같은 성도
: 그리스도의 삶에 깊이 동참하여
그의 높아지심의 영광과 능력과 인품과 위엄이 나타난다.
4) 왕후 중의 왕후 같은 성도
: 아래의 술람미와 같은 성도이다.
3. 왕후 중의 왕후 같은 성도란?
1) 순수한 동기로 사랑함
“나의 비둘기”
2) 주님의 중심을 이해함
“나의 완전한 자”
3) 사랑 받기 합당하도록 신앙 훈련함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
4) 성화적인 모범임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가 6:8-9
8 (솔로몬)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원 문
8 המה םחשׁשׁ 쉿쉼 헴마(거기에 60명이 있다)
תוכלמ 멜라코트(왕후들이) םחנמשׁו 우쉬모님(또 80이 있다)
םישׁגליפ 필라게쉼(소실들이) תומלעו 와 알라모트(그리고 여종들이)
רפסמ ןיא 엔 미스파르(셀 수 없을 정도다)
9 איה תחא 아하트 히(오직 하나 뿐이다) יתנוי 요나티(나의 비둘기)
יתמת 탐마티(나의 완전한 자) איה תחא 아하트 히(오직 그 만이)
המאל 레임마흐(그 어머니에게 속하였고)
איה הרב 바라 히(귀한 자로다)
התדלויל 레욜라드타흐(그에게 그녀를 낳아준)
תונב הואר 라우하 바노트(여종들이 그녀를 보고)
הורשׁאיו 와예아쉬루하(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행복하다고 말한다)
תוכלמ 멜라코트(왕후들과) םישׁגליפו 우피게라쉼(첩들이)
הוללהיו 와예할렐루하(그를 칭찬하는도다)
스 토 리
왕궁에는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했지만
술람미처럼 왕의 배우자와 왕후로서의
구비조건인 완전한 아름다움과
인품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이런 술람미의 영광은 그를 낳아 준 어머니에게 돌려졌다.
어머니가 태 중에서부터 외동딸처럼 얼마나 귀히 기르고 곱게 가르쳤으면
이토록 손색이 없을까 하는 칭찬이었다.
시녀들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천부적인 것으로 보고
술람미를 부러워하였다.
이러한 인정은 그녀의 경쟁자인 왕후와 비빈들도
이미 인정하고 칭찬하는 터였다.
그 뿐 아니라 술람미의 왕후로서의 훌륭함은
온 나라의 백성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강 해)
이 시간에는 ‘왕후의 아름다움’ 세 번째 시간입니다. 본문 중의 8-9절은 솔로몬의 말입니다. 그런데 9절의 왕의 칭찬 속에는 직접적인 칭찬과 왕궁의 많은 시녀들과 왕후와 비빈들의 칭찬을 인용하는 간접적인 칭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칭찬이 결코 자기 주관에 머물지 않고 자타가 공인하는 객관적인 시각임을 보여주며 나아가 술람미의 뛰어난 왕후로서의 모습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먼저, 솔로몬의 직접적인 칭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9절에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여기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라고 한 것을 보아 이는 솔로몬 통치의 초반을 암시합니다(Redford, Lange, Delitzsch). 왕상11:3에 보면 솔로몬에게는 칠백 명의 후비와 삼백 명의 빈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천 궁녀가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 ‘왕후’(תוצלמ 멜라코트)나 ‘비빈’(םישׁגליפ필라게쉼)이나 ‘시녀’(תומלע 알라모트=‘처녀들’(사7:14))는 모두 복수형태의 단어들로서 그 수효가 많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솔로몬 왕은 술람미의 왕후로서의 아름다움을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왕은 술람미를 다른 왕후들과 비교하여 그 아름다움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교법적인 문장은 백성들 중에서도 뛰어난 택함을 받은 그들보다도 더 뛰어난 술람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아하수에로의 왕후로 간택되기 위해서 나라 중에 뽑힘 받아 준비하는 후궁들 중에서 에스더가 가장 뛰어났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솔로몬이 말하는 하나 뿐인 왕후란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는 호칭에서 암시되듯 누구보다 더 깊은 애정과 부부생활의 절정을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왕후들의 대부분이 애정으로 비롯되지 않고 정략으로 결혼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이 이방 공주들로 자라온 배경이 궁궐의 엄한 예법에 배어 있었으므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부부생활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결혼이었기에 그 동기에 있어서나 정서에 있어서 다른 왕후들을 능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직 율법에 매인바된 신앙생활은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롬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은혜로 비롯된 복음으로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3:16-18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지 살펴보시고 주의 영으로 주님의 가장 뛰어난 왕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약 네 종류의 신자를 발견합니다.
1. 시녀 같은 성도입니다.
여기 ‘시녀’는 원문에 (תומלע 알라모트)로서 ‘처녀들’을 의미합니다. 처녀란 남자를 알지 못한 순수한 상태입니다. 이 처녀라는 용어에는 긍정과 부정 두 면이 있는데 긍정적인 면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순수성의 측면이요, 부정적인 면은 아직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미숙함을 보이는 측면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지만 아직 왕의 깊은 사랑과 그 삶에 참예함을 모릅니다. 술람미로 치자면 아가서 1장 초반부에 해당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예루살렘 성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24:3 이하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그리고 계22:14-15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2. 비빈 같은 성도입니다.
‘비빈’(םישׁגליפ 필라게쉼)은 ‘첩들’이라는 뜻으로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나 왕의 부인의 위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비빈은 왕의 사랑을 알고 부분적으로 그 삶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이 비빈에게는 간혹 찾아오는 것처럼 비빈 같은 성도는 아직 영적인 경건한 삶이 일상화되어 있지 못합니다.
3. 왕후 같은 성도입니다.
왕후는 그리스도의 삶에 깊이 동참할 줄 알며 따라서 그의 높아지신 삶을 입어 하늘에 속한 영광과 능력과 인품과 위엄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낮아지신 삶이기에 거기 동참함이란 내가 죽고 주님께 순복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충성함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신앙은 기치를 벌인 군대와도 같이 굳세고 용맹한 전사와 같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처럼 어떤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4. 왕후 중의 왕후의 수준의 성도가 있습니다.
모든 왕후들보다 더 뛰어난 술람미 왕후의 수준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답이 9-10절에 있습니다.
1) 순수한 동기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9절에 “나의 비둘기”라 했습니다.
‘비둘기’(הנוי 요나)는 짝에 대한 충실함이 그 특징입니다. 이는 다른 처첩들과는 구별되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정략적인 외교의 산물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혼인외교를 통하여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왕상3:1). 그러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지모지략은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타락시켰고 그의 통치기반을 더욱 약화시켰습니다(왕상11:1-13).
그러나 술람미만은 혼인외교가 아닌 순수한 사랑에서 출발한 결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의 조강지처와 같은 아내였습니다. 이 조강지처라는 점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점입니다. 그래서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5:18-19에서 조강지처에 대한 교훈을 합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이처럼 일반적으로 남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부인은 청춘에 취한 그 조강지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이미지가 뇌리에 각인 되는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 동창도 초등학교 동창이 제일이고, 교육도 현대에 와서는 교육도 태아와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강지처는 계산하지 않고 다투거나 합당치 않아도 참고 일생을 남편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그래서 조강지처를 버린 남편은 비난을 받으며 그랬다가도 늙으면 결국 본 아내를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내가 제일이다. 이제 더 이상 이 만한 사람은 못 만난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술람미가 이 조강지처라는 점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입니다. 왜냐하면 술람미는 순수한 사랑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혹자 중에는 자녀를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혹은 평안하기 위해서 자신의 육신적인 목적을 위해서 신앙 생활합니다. 그러다가 참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으나 우리의 신앙의 동기는 순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무슨 일이 있으면 끝내는 그만 두고 맙니다. 이것이 솔로몬으로 치자면 정략결혼입니다. 제자들도 초기에는 동기가 바르지 못해서 믿음이 깊이 들어가지 못했고 유다 같은 사람은 결국 예수를 파는데 까지 나갔습니다. 욥이 왜 승리했습니까? 까닭 없이 주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왜 승리했습니까?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역시 조건에 붙잡히지 않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견고할 뿐 아니라 오직 성령의 우러나는 참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성령으로 주님의 중심을 이해하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나의 완전한 자”라 했습니다.
여기 완전한 자란 다른 곳에서 솔로몬이 사용한 용례를 보면 일치점에 도달한 자를 가리킵니다. 왕상8:61에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에서 완전한 자란 5:2에 암시되어 있듯이 남편과 몸과 마음에서 일치가 된 아내입니다. 술람미는 남편의 최고의 관심인 하나님을 경외함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 소원과 고통과 슬픔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왕후들은 그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들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라는 것은 왕비가 많았지만 이상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아내는 술람미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성도야말로 참으로 귀한 성도입니다. 자녀가 많아도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자녀 그 자녀가 최고입니다. 그런데 초기의 어린 제자들 보세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다고 해도 누가 큰가 자리다툼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주님은 부르짖으시는데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주님의 마음을 아는데 까지 자라지만 주의 마음을 알지 못할 때 얼마나 주님의 마음 섭섭하시겠습니까?(벧후3:18)
참고로 이방신에 넘어간 때가 솔로몬의 노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왕상 11장을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했습니다. 인간의 꾀를 사용하는 지혜의 타락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교훈합니다. 영적 비유에서 보면 주님을 따른다고 하나 아직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한 동기라면 우상의 동기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라면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명예 성공 형통 권세 물질 등 다른 우상을 구하지 말고 오직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완전한 자라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3) 사랑 받기 합당한 신앙적 훈련을 계속하는 성도입니다.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했습니다.
여기 외딸과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는 동의어로서 서로 보충 혹은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8:8에 ‘누이’가 있는 것을 보아 술람미가 외딸인 증거는 희박하지만 시문학적인 표현으로는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 만큼 특별한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술람미를 우회적으로 칭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일찍부터 그러한 사랑보다는 부모를 잃고 오빠들에 의해 엄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릴 때부터 오빠들의 숨은 계획에 의한 왕후로서 준비였습니다. 당시 왕위를 계승할 왕자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양육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왕후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는 것이므로 태중과 유아에서부터는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는 어릴 때부터 준비되었습니다. 마치 에스더를 어릴 때부터 왕후를 목표로 양육시켜 준비한 사촌 모르드게의 숨은 노력과도 같이 술람미에게도 그의 오라버니들을 통한 양육이 있었습니다. 술람미는 비록 알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었으니 어느 누가 술람미를 모방할 수 있겠으며 그보다 나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략적으로 갑자기 왕후로 선택받은 사람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로와 딸과 같이 대부분 공주들로서 술람미처럼 섬김과 봉사를 알지 못하고 고난받는 백성들의 슬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술람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라는 표현은 과연 그렇다기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랐고 나아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것이라는 시문학적인 칭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일등 왕후로 삼으시기 위해서 지금도 쉬지 않으시고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아직 신자이기 전에도 자기 택한 자녀인지라 훈련시켜 오셨고 부름을 받은 후에도 훈련시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성훈련 교재라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고 소개합니다. 이 소개에는 지금도 전에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계시며 장차 온전히 온전케 하실 것이며 이 일은 결코 불가능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혹시 성화되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이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는 본문처럼 어미 되는 교회를 통해서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했습니다. 혹은 어떤 학자는 “어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총 망라한 은혜를 가리킨다”(Watchman Nee)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연단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욥7:17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했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들을 온전케 하사 그리스도의 완전한 왕후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연단의 특별한 양육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랑 받기 합당한 신앙적인 훈련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4) 하늘의 속성으로 충만한 성화적인 모범을 가진 자입니다.
9절 하반절에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했습니다.
여기 솔로몬은 술람미를 경쟁 관계자들의 칭찬을 통해 간접적으로 칭찬합니다. 이는 자기의 칭찬이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고 했다는 것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이 천부적인 것임을 묘사합니다. 왕궁의 여인들은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점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그 부러움을 한 마디로 복된 자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본 유대의 여자들이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에게 복된 자라고 했던 것과 흡사한 표현입니다(눅11:27). 예를 들면 아무리 바르고 꾸며도 부모가 잘 낳아 준 것만큼은 못합니다. 오늘날 성형수술이 발달되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성형수술은 그렇다 치고 마음과 습관과 재능까지 어떻게 성형수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술람미에게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는 자임을 시인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아름다움이란 율법의 의로 꾸며진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충만한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이어야 합니다. 새 창조에 속한 것은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뿐이라는 것은 단일한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애정에 이른 자는 하나님께서 모두가 하나 뿐인 자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고전9:24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 뿐인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주님의 신부입니까? 백성 같은 신부입니까? 시녀 같은 신부입니까? 비빈 같은 신부입니까? 왕후 같은 신부입니까? 왕후 중의 왕후 같은 신부입니까? 왕후 중의 왕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삶에 깊이 연합되어서 모든 성도들의 부러움이 되고 우리 주님의 제일 가는 왕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