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자랑Ⅰ (아 5:8-9)
남편 자랑Ⅰ (아 5:8-9)
= 임재 경험론 =
요 약
영적 생활의 큰 만족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면 먼저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은 성도와의 영적 교제도 유익하다. 특히 성도는 지체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만족을 얻는다. 다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남들은 임재 의식을 누리며 사는데 내가 누리지 못한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해야 한다. 이 점이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설 명
1. 배 경
술람미가 만족을 얻지 못하여 방황하는 장면이다.
2. 적 용
(진단) 함께 만족함에서 합격하는 방법은 없나요?
(해결) 일방의 테크닉으로는 부족하고 양방의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3.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면
1) 믿음으로 누리라.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 왕을 찾아오도록 맹세시키나 그는 잃어질 존재가 아니다.
2) 성도의 교통도 유익하다.
8절하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 하려무나”
: 자기보다 지위가 낮지만 부탁한다.
3)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 성적 갈망이 유별난 여자라는 뜻으로
그녀의 테크닉의 부족함을 우회적으로 시사한 말이다.
4. 적극적인 기도생활로 성령 충만해야 한다.
9절하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 남편이 얼마나 유별나게 잘해 주기에 그토록 사모하는가
하는 뜻으로 역시 그녀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함이다.
아가 5:8-9
8 (술람미)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9 (예루살렘 여자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원 문
8 םפתא יתעבשׁה ‘히쉽바티 에테켐(내가 너희를 맹세케 하노라)
םלשׁורי תונב베노트 예루솰라임(예루살렘의 딸들아)
ואצמת־םא 임 팀체우(만약 너희가 찾으면)
ידוד־תא 엩 도디(내 사랑하는 자를) ול ודיגת־המ 마 탁기두 로(그에게 말하라)
הבהא ילוחשׁ 쉐홀라트 아하바(상사병이 걸렸다고) ינא 아니(내가)
9 ךדוד־המ ‘마 도데크(네가 사랑하는 자가 무엇이냐)
דודמ 믿도드(다른 사랑하는 자보다(나은 것이)) הפיה 하야파(아름다운 여자여)
םישׁנב 반나쉼(여인 중에서) ךדוד־המ 마 도데크(네가 사랑하는 자가 무엇이냐)
דודמ믿도드(다른 사랑하는 자보다(나은 것이))
הככשׁ 쉐카카(이와 같이 참으로) ונתבשׁה 히쉽바타누(너는 우리에게 맹세하라)
스 토 리
성생활의 부조화로
두 사람에게는 갈등이 생겼다.
소극적인 아내로 말미암아 만족치 못하는
남편은 물론 술람미 역시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체
자기의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욕구 불만에 걸린 그녀는 시녀들에게 왕을 만나거든
왕후가 상사병이 났다고 아뢰라고 부탁하였다.
내막은 물론 경험조차 없는 시녀들에게는
지극히 금실 좋게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부부지간에
남편이 그리워 상사병이 난다면
왕후가 성적인 면에서 유별난 여자이거나
왕 역시 아내를 사로잡는 특별한 남자일 것이다.
그래서 시녀들은 흥미로운 듯 당신의 님이 다른 이의 님보다
능가하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부탁하느냐고 은근히 물었다.
(강 해)
오늘은 “남편 자랑”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은 술람미가 남편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남편에 대해 실망하여 상심한 상태를 시녀를 빌어 묘사한 내용입니다. 대략 본문의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이미 지난 시간에 언급한 대로 성생활의 부조화로 두 사람에게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즉 소극적인 아내로 말미암아 만족치 못하는 남편은 물론 술람미 역시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체 자기의 갈망을 채우지 못하는 남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욕구 불만에 걸린 그녀는 시녀들에게 왕을 만나거든 왕후가 상사병이 났다고 아뢰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무 내막을 모르고 있는 시녀들에게는 지극히 금실 좋게만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부부지간에 남편이 그리워 상사병이 난다면 이것은 분명 왕후가 성적인 면에서 유별난 여자이거나 왕 역시 아내를 사로잡는 특별한 남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술람미의 잘못과 의도를 모른 체 흥미로운 듯 말을 바꾸어 당신의 님이 다른 이의 님보다 능가하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부탁하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왕실의 정사 문제가 이제는 시녀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술람미가 남편을 자랑하게 되는 동기가 되고 이 자랑은 문제점을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시킵니다. 오늘은 술람미가 상사병이 나서 왕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임재 의식은 믿음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8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했습니다.
여기 “부탁한다”(עבשׁ 솨바)는 ‘맹세하다, 언약을 맺다, 서약하다, 엄숙하게 맡기다’ 등의 뜻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여자들이 반문하는 “부탁하는가” 역시 앞 절과 같은 맹세형의 의문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탁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면적으로 암시하는 바는 술람미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입니다. 즉 부부생활의 불만족과 성적인 거절은 이러한 상처를 낳게 됩니다. 많은 불화의 원인이 이러한 불만족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남편은 초기에 아내의 거절과 무관심으로 만족을 갖지 못했고, 아내는 남편의 후기의 거절과 배타성으로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잘못은 아내 쪽이 더 많습니다. 아가서 후반부에 나오지만 아내의 단순한 적극성 정도가 아니라 아내에게도 남편처럼 세심한 테크닉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술람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남편 탓으로만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녀들에게 맹세시켜 반드시 남편을 찾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남편을 찾게 한다란 이 역시 시문학적인 은유로서 남편의 양기를 돋기 위한 어떤 보약이나 특별한 처방을 지시함을 묘사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임재 의식을 느끼지 못할 때 그 충격은 큽니다. 주님의 임재적인 축복이 너무나도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남에게 이 임재를 한 시간만 양보한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크게 양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그 임재가 영원히 떠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임재의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주님은 그 느낌이 어떻든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임재 의식을 통하여 우리들을 훈련시키심은 사실이지만 나아가서 성도는 임재가 느껴지든 그렇지 않든 주님의 사랑하심은 변함없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고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에게도 그 임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셨고, 고전1:30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46:3-4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말씀에 설 때 그 임재는 이제 의식되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전에서 한 날이 세상의 천 날보다 좋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거룩한 두려움이 생길 만큼 자기에게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성전에 준한 경외의 삶을 영위할 때 주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2.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8절에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은 성도의 교제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온 성도이기는 하나 술람미와 비교할 때는 아직 영적으로 덜된 신자들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강하게 그들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녀들의 도움이 없이는 왕비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영적인 교통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수준을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즉 신앙적인 수준이 높으면 그렇지 못한 지체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영적 수준이 높으면 도울 수 있는 면이 더 많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낮은 수준일지라도 말씀의 지식이나 달란트 등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남보다 월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른 막대기와 같은 우리라도 신령하게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험과 실재의 차이, 이론과 실재의 차이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경험은 높은 수준을 경험한 적이 있을 수 있지만 나의 영적인 수준은 아직 낮을 수 있고 혹은 영적인 수준은 높은데 말씀의 지식은 부족할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영적인 수준을 떠나서 지식이든 물질이든 능력이든 무엇이든 달란트적인 측면에서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지 배우고 도움을 입을 수 있으며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마치 술람미의 당부가 맹세적으로 강한 것이었듯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생명처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도의 교통은 너무나도 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성도의 교통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직접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깨달음이 10%라면 설교를 주축으로 한 성도의 교통으로 깨닫고 받는 부분이 90%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지체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도 근원적으로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교회에 나와서 배우고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타 지체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스스로 존재할 수도 큰 일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심령이 답답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교회 장로님이 지나가시는 중이었는데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데 저의 심령이 마치 얼음 냉수 마시는 것처럼 해방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통으로 인한 임재 의식의 축복입니다. 한 번은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 댁에 놀러가서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왔는데 함께 대화만 나누어도 저에게 얼마나 강한 신유의 능력이 임하는지 놀랐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영혼의 풍요로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울까지도 변화시킨 사무엘의 라마나욧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홀로 서려는 무교회주의자들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취약합니다. 그러므로 방황하지 말고 겸손히 예비하신 지체와의 아름다운 교통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3.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 임재를 느낍니다.
9절에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부릅니다. 이 칭찬은 상대적 의미에서 왕후가 성적인 면에서 유별난 여자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칭찬은 진정한 칭찬이라기보다 술람미의 테크닉의 부족을 시녀들의 무지를 들어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는 자신이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남편이 성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자기를 만족하게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저자는 시녀들을 통해서 왕후가 유별난 여자라고 함으로 문제점이 술람미에게 있음을 완곡하게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정상적인 부부에게 상사병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주님의 임재 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가서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적극적인 영적 생활의 부족입니다. 정상적인 기도 생활을 한다면 진정한 평안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48:18에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했습니다.
4. 적극적인 기도생활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9절 하반절에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했습니다.
당시 솔로몬에게는 많은 왕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중”이라는 표현이나 “남의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은 당시의 배경을 시사합니다. 아6:8에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로되” 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예표적인 면에서는 이해되지만 윤리상으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즉 다른 많은 솔로몬의 왕후들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술람미 만이 상사병에 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에게 그 남편이 그 남편인데 술람미에게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길래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더구나 누구보다 솔로몬이 가장 총애의 대상인데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 부부생활의 내막을 모르고 또 혼인을 경험치 못해 보았으며 왕을 흠모했던 대상으로서 이 반열에 들어간 술람미를 지극히 부러워하는 입장에서 사랑의 병이 든 술람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술람미 왕후에게만은 그를 사로잡는 무언가 특별한 면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시녀들은 왕후에게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반문했습니다.
이 시녀들의 질문은 술람미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습니다. 즉 그녀로 하여금 남편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아니라 이제 그 관심이 남편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시녀들에게 남편의 여러 가지 점을 자랑하다가 거기서 문제의 해답을 찾습니다. 즉 그렇게 지혜로우며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훌륭하고 건강한 남편이라면 그 남편이 갔으면 어디 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토록 건강하고 인격을 갖춘 남편이라면 곧 다시 회복하여 자기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남편이라면 혹시 나에게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처럼 좋으신 신랑 예수님이 가셨다면 어디를 가셨겠습니까? 가신 것 같아도 우리 안이요 느낌이 떠나도 우리 안이요 그 분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아내를 잊지 않는 것처럼 주님도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묵상해야 합니다. 즉 그는 진실로 선하시기에 결코 나를 떠나시지 않으시고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임재적 의식이 없음은 전적으로 내 잘못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이고 부족한지 깨달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깨달아야 할 점은 주님을 만족케 하려할 때 주님도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에게 불만이 존재한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회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의 회복도 이루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영의 만족을 얻지 못하신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임재하심을 믿음으로 받고 성도의 교제인 충실한 교회생활과 적극적인 영적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행복한 주님의 임재의 경험은 자연스런 일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