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1:6-14

nam씨 2015. 12. 4. 22:58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1:6-14  사9:1-7,

이태리 알프스 산에 있는 한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당 안에는 사면 벽 둘레에 구약시대의 선자지들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면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큰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동상들 즉,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고, 그들의 눈은 갈보리 산을 향하여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여러 선지자 중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할 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이사야 7:1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라고 예언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9장에 가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참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한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오늘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참 빛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빛,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빛 은 물리적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화를 보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면 예수님 주변에 광채가 빛나는 후광을 보는데,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부르는데 곧 하나님의 빛을 말합니다. 요일1:5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빛을 안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약 본문 요1:9에서 세례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라고 증거 합니다. 모든 인생은 이 빛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거듭나서 영적인 눈이 뜨지 못하면 아무리 큰 빛이 눈앞에 와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세상의 거짓 빛을 향해 방황을 계속합니다. 세상의 현란해 보이는 '거짓 빛'들은 과연 어떤 것들입니까? 세상의 물질과 권세, 명예, 향락 등입니다. 그런 것들이 인생의 빛인 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을 합니다. 여름밤 밖에 백열전구를 껴 놓거나 모닥불을 피워 놓으면 이 빛을 향해 날 파리나 나방이 등이 밤새 몰려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충돌해서 죽었거나 불에 타 죽은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현란해 보였는데, 사실은 죽음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세상 거짓 빛을 따르는 자들의 결국입니다.

그러나 참 빛이 되신 예수님께로 나오는 자에게 생명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찬송가 52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의 작사자 아이작 왓츠 목사는 세계의 만왕들이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리스도는 그들을 다스리신다는 내용의 찬양입니다. 이 찬송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마도 식인종들이 살고 있던 남해제도를 다스리던 죠지 왕이 그의 백성들에게 새 헌법을 주고 이교도 정부에서 기독교 정부 조직으로 바꾼 축복된 일일 것입니다. 즉 1862년의 성령 강림축일에 통가, 퍼지사모아 등지에서 온 약 5,000명의 토인 들이 반얀 나무 밑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의 맨 앞에는 죠지 왕 자신이 앉아 있었고 그 죠지 왕의 뒤에는 많은 힘든 전쟁에서 왕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추장들이며 용사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연륜의 무게로 체구들은 구부정했고 눈은 침침해서 잘 보이자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크리스천이 된 기쁨과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차서 그들의 기쁨은 측량할 길이 없었고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찬송 햇빛을 받는 곳마다를 부르면서 예배가 시작 되었는데 이교도요 식인종의 어두운 세계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무상의 기쁨 속에서 드리는 이 엄숙한 예배에서 과연 아이작 왓츠 목사가 뜻한 이 찬송의 진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했습니다. 그날은 크리스천 왕과 크리스천 헌법 하에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참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께 경건 되게 예배를 드리는 첫 모임의 날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천국이 지상에 건설되는 영광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남해제도에는 무서운 식인종이 살고 있던 섬들로서 통가 도는 제일 사나운 섬이었습니다. 1821년 인근의 피지 도는 백인들의 선교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통가도의 토인들도 이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가도의 야만인들은 이 백인들의 종교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카누를 보내었으나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 카누를 타고 쏜살 같이 빠른 속도로 이 피지도 연안에 상륙했는데 그전과 같이 피지도 토인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성경을 사러 온 토인들이었습니다. 이 성경은 영어로 쓰여 저 있고 그 토인들은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데 이 한권의 성경을 사러 250마일(1,000리) 이나 되는 상상도 못할 먼 바닷길을 이 적고 나약한 카누를 타고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사나운 맹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 식인종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여 이들이 인간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 복음을 전한 주의 종들의 기쁨은 어떠했겠으며 복음을 통한 변화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했겠습니까? 더욱이 이날은 구원 받은 토인들의 왕인 죠지 왕이 백성들을 불러 모아 놓고 크리스천 왕국임과 크리스천 헌법을 선포하는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마다 이처럼 새로워집니다.

 

2.예수님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십니다.

구약 본문 사9:1-2에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했습니다. 여기 스불론, 납달리, 해변길, 요단 저편 등은 모두 갈릴리 지방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의 변두리로 늘 외국의 침략을 먼저 받고 이방인과 혼혈되어 고통이 가득하고, 같은 동족으로 부터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 유대인의 멸시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곳에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먼저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2절에 말씀처럼 큰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고통의 흑암도, 사망의 그늘도 다 물러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흑암은 인간 세상의 온갖 죄악과 고통, 미움, 질병, 갈등, 그리고 사망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빛은 이러한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생의 참 빛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인생의 참 빛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요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생명의 빛이 가득한 곳에 천국입니다. 계21:23~24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 그래서 천국에는 태양이 필요 없습니다. 햇빛이 없어도 예수님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미 내 안에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얻은 영생입니다. 다음에 창성과 즐거움을 더하게 됩니다. 사 9:3에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즐거움은 육체적인 즐거움과 환락의 세상적인 즐거움이 안인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는 진정한 영적 기쁨, 곧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에서 오는 거룩한 즐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노예 상태 가운데 있지 않게 됩니다. 사9:4에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했습니다. 눅4:18-19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이 말씀이 자기에게 응하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말씀처럼 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며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유 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참 소망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빛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신약 본문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든다면, 첫째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신분이 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입니까? 주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입니다. 즉 주님이 나에 대해 모든 결정권을 갖도록 나를 그분께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분이 결정 하시는 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욕대로 살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끌고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생각과 내 욕심과 내 영광을 따라 살게 되었지만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삽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 된 바울처럼 무엇을 하든,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삽니다. 에릭이라는 청년이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100m 단거리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많은 외신들도 이 청년을 주시하였고, 많은 팬들이 그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릭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지망생으로 신앙이 투철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기가 주일에 배정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에릭은 프랑스로 가는 배 위에서 배정 표를 받자마자 올림픽 선수단 단장에게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일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금메달을 위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릭은 100m 에서는 세계가 놀랄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국도 에릭에게 기대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에릭이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100m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올림픽 위원회에 건의를 해서 100m를 포기하고 400m로 자신의 종목을 바꾸었습니다. 짧은 거리, 짧은 시간동안 최대의 순발력과 최대의 운동력을 발휘해야 하는 단거리 선수에게 400m를 뛰라는 것은 결국 모든 경기를 포기하란 의미와도 같습니다. 이 사실이 영국 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에릭은 그 사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앙이냐? 명예냐? 영국과 전 세계에 이 청년의 무모한 결단에 대한 기사가 돌았습니다. 영국에서도 비난이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비아냥거렸습니다. 영국의 왕자가 와서 에릭을 달래 보지만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왕자가 달래도 변하지 않는 에릭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난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에릭의 누나는 에릭이 올림픽 대표선수로 프랑스에 간다고 했을 때 못마땅하게 여기며 만류했습니다.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육상선수로 뛰면서 금메달을 딸 생각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에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나, 난 하나님을 위해서 뛰는 거야, 난 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걸 느껴" 누나는 그 말이 허풍인 줄 알았지만 동생이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주일 경기를 포기한 것을 보고 동생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돌아왔습니다. 400m 트렉에서 몸을 풀고 있던 에릭에게 누나가 쪽지 한 장을 보냅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겠다." 사무엘 상 2장30절의 말씀입니다. 누나가 동생이 주일 경기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뒤따라 온 것입니다. 그 400미터 결승 경기 관람석에서 쪽지를 보낸 것입니다.

에릭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쓰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고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며 자기 자신의 달란트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결국 에릭은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누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영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이 난리가 났습니다. 드디어 자신을 부인하고 고통을 선택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명예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에릭은 그 올림픽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육상선수로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니 곧 귀국하라는 영국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계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수용소에서 하늘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금메달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부인하며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서 뿐만이 아닌 중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살면 손해 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더 사랑하시고 더 높여주십니다.

1924년 에릭이 당시에 올림픽 경기에서 했던 일을 배경으로 “불의 전차”라는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분 오스카상을 받은 유명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1.예수님은 참 빛이 되신 분이십니다.

2.예수님은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십니다.

3.빛 되신 예수님을 모신 자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