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장10-17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 욥42장10-17, 행8:54-60
어느덧 2014년 마지막 송년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연말을 맞는 것처럼 우리는 종말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초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회(신약에만 318회)입니다. 인간처럼 식언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이 약속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셨습니다. 주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 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적이고,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따라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비웃고 조롱합니다(벧후3:3). 사단은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적이라고, 반문명적이라고, 반지성적이라고 비아냥거리도록 여론을 만듭니다. 피안주의니 현실도피주의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반성서적, 반 내세적, 반 종말적인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한 영특한 성주(城主)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도 많고 해서 별다른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다만 그 성 안에서 소문난 바보 하나를 곁에 두고 바보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루는 지팡이 하나를 그 바보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보다 더한 바보를 만나면 주어라.” 그 유명한 바보는 자기보다 더 못난 바보를 찾아 두어 달 동안 성내를 돌아다녔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성주가 병이 들어 거의 죽어가게 되었을 때 바보를 불러 작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와 헤어져야 되겠다.” “어디로 가십니까요?” “황천이란 곳으로 가야 한단다.” “영감께서 황천으로 가시면 언제쯤 돌아오시게 됩니까요?” “황천이란 곳은 매우 먼 나라이니 한 번 거기 간 사람은 옛적부터 다시 돌아오지 못한단다.” “그러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습니다요.” “이 바보야, 준비는 무슨 준비. 눈을 감고 다리를 쭉 펴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된단다.” 이 말을 들은 바보는 지팡이를 성주에게 도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십 리나 백 리를 가더라도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떠난다니, 주인님보다 더한 바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요?” 연말에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참 승리자는 처음 보다 끝이 좋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했어도 끝이 좋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에스겔33:12에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처음에 의인으로 살았어도 끝까지 의인으로 살지 못하고 도중에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게 되면 구원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고, 처음에 죄인으로 살다 회개 하고 돌이켜 의인으로 살면 처음 죄가 용서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아무리 믿음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잘 경외 하고, 봉사도 잘하고, 충성스럽게 믿음 생활 잘했어도 후에 미혹을 받아 바른 믿음에서 떠나거나 타락하여 죄 가운데 살면 처음 행한 믿음 안에서 의로운 삶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처음에 죄 가운데 살다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바르게 살게 되면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아니 하시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조카 롯이 삼촌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의 생업이 번창해지고, 기르는 짐승들이 늘어나자 종들 간에 목초지로 인한 다툼이 생기게 되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 때 롯은 먼저 좋은 곳을 택하여 갑니다. 창13:10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갈라 설 때 처음에는 롯이 선택한 곳이 훨씬 살기 좋고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점점 더 좋아지고, 풍성해지고, 존귀해 집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 점점 더 창대해 지고, 존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중심으로 선택하고 살았던 롯은 처음에는 좋아 보였으나 세월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재물을 약탈당하고,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주변의 악한 이웃과 환경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소돔 고모라가 불 심판을 받을 때 재물도 불타고, 천사의 경고를 어긴 아내마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모압,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과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사울 왕의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세상 중심, 물질 중심으로 욕심을 따라 교만하게 살았던 사울은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와 그 가문이 점점 기울게 되었지만, 믿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던 다윗은 점점 더 흥왕하고, 존귀해 지고, 그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출생하는 영광스런 가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보다 끝이 점점 더 좋아지는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2.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유형을 보면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타락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성경에는 “믿음이 파선 된 자” “성령으로 시작 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 “미혹 된 길로 가는 자” “세상으로 다시 돌아 간 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모습”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유형은 처음에 죄악 된 길을 가다가 돌이켜 회개 하고 바울처럼 새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욥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인 처음에 잘 시작하고 점점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1:1에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했습니다. 1:8에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욥을 시기하여 사단은 시험합니다. 보통 큰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들의 죽음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는 시험으로, 질병의 시험으로, 외로움과 멸시와 조롱의 불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사단의 기대와 의도와는 달리 믿음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욥기서에 나타난 욥이 보여준 더 좋은 믿음의 모습을 보면 먼저 자기 의가 깨어진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에게도 고난 받기 전에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은총 주시기 위해 때로는 바울처럼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시더라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다음에 욥은 회개를 통해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욥42:6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했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미국에 젠킨스 박사님에게 어느 날 죠지아 주에 있는 큰 술집 주인이며 도박장 주인이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그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자인 데 생활은 불행하였습니다. 박사님은 불행한 삶을 청산하기 위하 여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여 주었습니다. 성경도 읽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침 박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빛이 제 영혼에 가득 비쳐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제 마음을 바치고 그 분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비싼 고급 가구를 모두 실어 내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십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술을 팔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생각날 때마다 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팔아서 산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 집안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이나 자녀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깨끗하게 번 돈만 사용하겠습니다.” 회개는 형식적인 믿음이 참 믿음이 되게 하고, 죽은 믿음이 산 믿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욥은 끝까지 인내 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다 보면 수많은 시험과 유혹과 박해가 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믿음이 파선됩니다. 욥은 불시험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욥23:10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하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 했습니다. 그랬을 때 욥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그러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나중이 더 좋아졌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좋은 믿음가지고 갈수록 좋아지기를 기원합니다.
3.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온 스데반 역시 좋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더 좋은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좋은 믿음으로 인정받아 뽑힌 일곱 집사 중 하나입니다. 행6:3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로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도저히 그를 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돌을 들어 쳤습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그는 불쌍하고, 불행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행7:55-56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했고, 59-60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늘로 이어지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그는 인생 실패자요, 불행한 자일뿐입니다.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1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습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오,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 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도, 박해를 받아도 오직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주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끝이 더욱 은혜로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이 좋은 사람이 참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끝이 좋으려면 끝까지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이 좋으려면 반드시 하늘 소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과연 나는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 욥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끝이 더 은혜롭고, 잘되는 좋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