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사사기

가시와 올무가 된 이유 삿21-10

nam씨 2015. 9. 5. 21:33

 

 가시와 올무가 된 이유 삿2:1-10, 딤전6:3-10

마귀는 언제나 그럴듯하고 아름답게 포장하여 인간을 꾀어내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술이나 담배 광고를 보면 압니다. 그들은 술이 낭만과 직결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입니다. “술 없이는 못살아.” “술 없는 인간관계가 무슨 관계냐? 술 없는 사업, 술 없는 연애, 그건 말도 안 된다!” 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술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례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고의 30% 이상, 범죄의 40%, 질병의 28%에 해당하는 원인이 술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외국 잡지 표지 뒷면에 실린 담배 광고를 보면 카우보이가 말을 타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봅니다. 그 광고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남자는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담배를 피울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남자는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진정한 남자다움이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요? 그러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인가요?

광고에 등장해 말 타고 담배 피우며 폼 잡던 그 남자는 결국 폐암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악한 마귀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우리를 속이는지, 우리는 모든 것의 이면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마귀는 그 속에 독이 묻은 칼을 숨겨 둡니다. 그것이 가시와 올무가 되어 일생을 괴롭힙니다. 마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고 속이고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가시와 올무가 된 이유”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시와 올무가 된 이유는

1.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좋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1)가나안 족속과 화친 조약을 맺은 것은 자기 좋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받은 또 하나의 사명은 가나안 족속과 화평조약을 맺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화평 조약을 맺은 것은 본문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거민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고 하였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복의 대상이요, 죄악이 관영하여 멸망 받을 자식들이니 그들을 살려두게 되면 그들의 악한 영향을 받을 것을 아시기에 모두 내어 쫒고, 멸하라 하신 것인데, 그들은 기브온 족속에게 속아서 화평 조약을 맺게 되었고, 가나안 족속의 일부가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종이 되어 노역을 하게 됨으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크게 흔들렸고 신앙이 흔들리자 저들의 삶도 흔들렸습니다. 가장 심각한 흔들림은 그들이 점령한 가나안 지역의 신들을 그들도 본받아 자연스럽게 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 행했던 죄와 못된 습관들은 단호히 끊고 버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결하게야 살아야 하는데,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여 사는 모습과 같습니다.

2)그 일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시와 올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현지 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그들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옆구리의 가시가 되고 그 신들이 올무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김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울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삿2:15절에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그들의 인생이 괴로운 인생이 될 것이라는 선언과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으로 인해 울게 된 것입니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명을 잃는 괴로움, 자신이 힘껏 모아놓은 재물을 모두 잃는 괴로움, 억압과 핍박과 착취당하는 괴로움, 질병과 전염병과 가난과 굶주림의 괴로움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런 삶이 평생 따라다닌다고 하는 데,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를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보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들이 왜 울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의 좋은 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통곡으로 맞혀야 합니다. 이것이 우는 삶입니다.

3)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맞추어 산다면 그런 사람은 그 미래를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하며 꿈꾸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을 위한 기초가 있습니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고, 모든 여정 속에서 그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낮에는 서늘하고 밤에는 따뜻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도와주시고, 그들을 정복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며,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현재의 땅에서 살게 해주신 분이 그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전에 누렸으며,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누리게 될 모든 것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또 앞으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이 출발점, 이 기초위에 여러분의 삶을 이룩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믿을 때에 내가 지금이라도 말씀에 불순종하고 나의 좋은 대로 행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주신 그 모든 것을 언제라도 또한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라고 해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 분을 부인하라고 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의 미래가 그 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요, 그 길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을 받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알고 억지로 순종하여 살려고 하면 신앙생활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 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그 일이 쉽고, 즐겁습니다. 성질이 급하고, 항상 남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아침 출근할 때에도 아내에게 “오늘 이 옷들을 전부 세탁해서 다려 놔”, “매일 내가 퇴근하자마자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둬” 등 수많은 요구로 그녀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그런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삶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감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을 그렇게 비참한 결혼 생활을 참아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그녀는 아주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의 요구대로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습니다. 그녀는 두 번째 결혼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전 남편의 요구 사항들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고, 그 내용들을 다시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요구들은 모두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위해 하는 일들이었고, 오히려 그녀는 지금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한가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일했지만, 지금은 자신이 원해서 즐겁게 일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할 때 주님께 순종이 강요나 협박을 받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속 열망에서 울어 나와야 합니다. 그 때 믿음생활이 즐겁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내 좋은 대로 행하여 결국 가시와 올무로 우는 자가 아니라 기쁨으로 주님께 순종하여 항상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돈을 사랑하여 부 하려는 욕심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1)탐심은 만족을 모르는 큰 병입니다. 자신의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영양분을 섭취하면 만족감, 포만감을 느껴야 하는데, 먹을 만큼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서 계속해서 음식을 섭취하는 폭식증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폭식증이 있듯이, 심적인 폭식증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심적 폭식증인 탐심은 자기를 망치는 심적 병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병입니다. 먼저 탐심에 빠지면, 물질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하고, 명예, 권세에 집착하여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또한 탐심에 빠지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에도 또 다른 것을 취하면 그때에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탐심은 계속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마치 신기루를 쫒아가는 것처럼 계속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이 탐심입니다.

이 탐심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인간관계가 깨어지게 되고, 모든 것이 막히게 됩니다.

2)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골 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했습니다. 탐심에 빠지면 물질이 자신의 신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돈이 하나님 보다 윗자리를 찾지 하고 있어 탐심에 빠지면,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물질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목적 자체가 되어 버린 물질에 눈이 가려져 주위의 사람들을 자신의 탐심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또한 물질에 눈이 가려져 우리 삶에 귀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영원을 보지 못하고, 영원한 상급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을 만들어 버립니다.

탐심의 해악성은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 삶을 총체적 난국에 빠뜨리고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체적 병에서도 합병증으로 몸이 총체적으로 어렵게 되듯이 탐심도 우리 삶을 총체적 난국으로 몰아가는 위험이 있습니다. 물질적 탐심에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성적 타락을 가져오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실패를 가져옵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과 5절을 보면, 음행과 돈을 사랑하는 죄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음행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함께 다루는 이유는 이것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탐심의 해악성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것을 떠나 근심과 염려의 삶에 사로 잡혀 살게 합니다. 결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3)탐심의 결과는 패망입니다. 신약 본문 딤전6:9-10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했습니다.

탐심의 해악성은 자신의 탐심에 자신이 걸려 넘어져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리는 인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탐심에 빠지면 온갖 부패에 빠져 결국 낭패를 당합니다. 마치 자동차가 과속을 하다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수렁에 박혀 폐차가 되듯이, 인생이 탐심에 빠져 버리면 패망이라는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탐심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간, 아합, 여로보함, 사울, 발람, 게하시, 가롯 유다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탐욕에 이끌린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15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보다 물질 사랑하는 탐욕의 우상 숭배 하다 패망하는 자 없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3.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돈의 매력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自足)이란 원어로는 “스스로와 맞춘다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자기 분수를 알고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우리의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입니다. 서신서 본문 딤전6:7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하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족하는 생활의 기준을 두 곳에 두고 있습니다. 곧 먹을 것과 입을 것인데 이것들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자족하는 생활에 필수적인 최저조건입니다. 우리의 한 생애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생활은 나그네 생활입니다. 나그네 생활은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조건만 채워지면 만족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잠30:7절에서 야게의 아들 아굴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기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인다운 생활의 기준인 것입니다. 이 조건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줄로 여기는 생활이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자족하는 생활입니다.

2)성도에게는 자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족해야 할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경영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뿐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헛되지 아니한 것 한자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욥의 고백처럼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나로부터 취하시는 것은 오직 내 영혼과 내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행한 일이 따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과연 어떻게 인정을 받고, 어떻게 평가를 받을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자족하는 생활을 즐겨 할 수 있지만 이 같은 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헛된 세상일 때문에 항상 목말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4:12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활 방법으로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할까요? 어떤 방법으로 자족하는 생활이 가능할까요?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마6:31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 ·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말씀에 순종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필요한 모든 것은 주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생활이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성경적인 비결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제일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탐심에 빠지지 않고 경건한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가시와 올무가 된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좋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1)가나안 족속과 화친 조약을 맺은 것은 자기 좋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2)그 일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시와 올무가 되었습니다. 3)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최선의 길임을 명심하는 성도가 됩시다.

♣.돈을 사랑하여 부 하려는 욕심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1)탐심은 만족을 모르는 큰 병이요, 2)우상 숭배요, 3)탐심의 결과는 패망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성도에게는 자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3)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