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머리 열뿔짐승 3 (계 17:12-13)
일곱머리 열뿔짐승 3 (계 17:12-13)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이 시간에 계속하여 “일곱머리와 열뿔짐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릴 때 생명과 가장 큰 보물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참 복이 있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일곱 머리를 통해서 육신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제 열 뿔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열 뿔이 인간의 완악한 자아를 말씀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시간에는 자아처리론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에 열 왕이 나옵니다.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열 뿔은 곧 열 왕이라. 열 뿔이 자아인데 열 왕이란 뭘까요? 자아의 특성을 좀 더 설명한 것입니다. 즉 10은 구비수요 만수로서 부족하지 않는 수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자아란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인 권세를 뜻합니다. 그런데 열 뿔을 열 왕이라 한 걸 보니까 보통 권세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아주 교만하고 방자하고 자유분방하고 자기가 법이고 이기적이며 호사스러운 독재자였던 아하수에로 같은 왕을 말합니다.
자아는 조금 부족해야 정상입니다. 가령 야곱이 환도뼈가 온전할 때는 자행자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부러진 다음에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지으실 때도 혼자로서는 부족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요즘 여성들이 돈도 있고 부족함이 없으니까 굽히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가정생활 불가능합니다.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서로 이렇게 되어야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 없이는 온전할 수 없도록 창조 되었기에 하나님께 전적 의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열 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열 왕은 타락한 자아입니다. 올바른 자아는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는 겸손한 자아지만 타락한 자아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내 주관대로 자행자지하며 살려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벧후2:10에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 그랬습니다. 자아가 더 발전하면 이렇게 악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세 종류로 구분한다면 육에 속한 자연인(고전2:14, 유1:19), 주님을 믿지만 나를 내려놓지 않은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3:1), 나머지 하나는 성령을 따라 사는 거룩한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고전3:1). 여기서 육을 따라 살면 육에 속한 사람, 성령을 따라 살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울 같이 완고해서는 안 됩니다(삼상15:23) 사울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을 때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못하여 자기를 위하여 군대를 만들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국가를 대혼란에 빠뜨리고 사무엘이 기다리라는 7일을 참지 못하여 석양에 제사를 드리고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기념비를 세우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열 왕이란 자행자지하는 타락한 자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아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1. 자아는 환경이 좋으면 그 세력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12절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왕이지만 처음에는 나라가 없는 상황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완고한 독재자 아하수에로 같은 왕일지라도 나라가 없으면 무력할 것입니다. 사울도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으나 그 때부터 제비를 뽑고 또 공식적으로 대관식을 행할 때까지 통치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없으니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윗 역시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고, 사울이 죽자 왕이 되지만 유대지파의 왕만 될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삼하5:4-5에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소년 다윗이 20세에 기름부음을 받아 온갖 연단을 받다가 30세에 유다의 왕, 37세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3년 반 동안의 왕권과 같이 우리 자아가 역시 보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자아란 강하게 드러날 때가 있고 힘을 쓰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지만 성장과정이 좋았거나 어려움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면 자아의 세력이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습니다.
갓난아이들도 어려서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나 한 두 살만 되도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막무가내 고집 부리고 죄를 행하는데 이르기까지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아주 어리거나 환경이 좋으면 나라 없는 왕처럼 미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유순한 것 자체도 일종의 자아일 수 있습니다. 결코 누구든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 처리된 자아는 나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2. 자아는 육체나 환경과 결탁될 때 크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2절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자아가 항상 미약한 건 아닙니다. 언제 자아가 강하게 나타납니까? 여기 “짐승으로 더불어” 라고 했듯이 육신의 소욕과 세상의 환경과 유혹과 결탁했을 때입니다. 그 이전에는 자아가 있어도 그리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감동 혹은 상처를 받았다든지 어떤 동기가 주어졌을 때 그 자아는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고치기가 매우 힘듭니다.
제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부드럽고 평범한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가 수백만 명을 죽게 했던 전쟁의 주범이라는 느낌을 전혀 갖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서정적입니다.
그가 그린 풍경화에는 주로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호수나 중세풍의 고성들이 등장합니다. 대포나 창칼 등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나라가 주어졌을 때 그의 광기는 100%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민주국가에서 사니까 그렇지 통치자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진다면 그 역시 히틀러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민주가 좋은 것 같아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민주가 되어야지 무엇을 해도 잡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멸망할 사회입니다.
그런데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어요. 즉 자아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특수환경을 통해서 우리 안의 잠재한 자아를 노출시켜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게 하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율법 앞에서 죄인임이 노출되고 광야의 악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약점이 드러났듯 우리 자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위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록된대로 라는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기 때문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며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자행자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가지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타락한 자아가 아니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 자아의 모본이 되셨습니다.
여기 들짐승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붙여주신 악의 파트너를 가리킵니다(시57:4). 사탄의 사자나 가시로 지칭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견딜 수 없는 악의 환경과 사단의 충동질이 있을 때 자아는 더욱 드러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의에 숨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화의 과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나약과 사악성은 드러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범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엎드려 부르짖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을 원망하지 말고 더욱 은혜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아의 세력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 한 동안, 일시 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했습니다. 자아가 제대로 나타나면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태어나면서부터 술수를 부리며 태어난 태생적인 자아의 사람 야곱도 하나님이 주시는 혹독한 연단의 환경 속에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부수어졌습니다.
모세도 애굽의 왕자로서 한 동안 자기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려 했지만 40년의 연단 속에서 이제는 두 손 들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벧전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대한 연단의 맷돌 속에서 부스러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평범하지 않을수록 더 처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고 가방끈 길고 돈 많고 권세와 능력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처리하기 힘듭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주장이 더 강하고 하나님께 좀체 순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적당히 생긴 것도 감사한 일이고 평범하게 하신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든 사람에게든 죄 말고는 수납의 여지를 갖고 말해야지 딱 잘라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청년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자아가 너무 강하니 도와줄 수가 없어요. 안 되는 걸 끝까지 고집한단 말입니다. 그 때는 그가 절망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상식도 없으면서 항상 혼자 결정해놓고 기도해 달라. 기도를 부탁하니 믿음 좋은 것 같아도 고생길이 환한 자아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쭈어야지 그런 자아는 더 늦기 전에 더 망하기 전에 어서 절망하여 두 손 드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는 것이 그를 돕는 길입니다.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통 속에 버려둘 수밖에 없지만 그 날이 머지않아 온다는 말씀입니다.
4. 자아의 세력은 더욱 악을 기승하게 합니다.
13절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이와 흡사한 말씀이 계13:15에도 나왔습니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더라. 여기 13장의 권세는 전후문맥을 볼 때 세상의 권세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사로잡히면 어떤 사람도 세상사람이 안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세상 권세가 강합니다. 멀리 피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모방한 것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한 번 하나님께 붙들리면 아무리 피해도 예수의 사람이 안 될 수 없는 그 권세와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13절은 자아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아에 사로잡히면 아주 심각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의 온갖 잘못은 그의 기본이 겸손에서 떠나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기본이 잘못되니까 하는 일마다 다 잘못되었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실패하게 합니다. 죄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거짓선지자 적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잘못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이라는 자도 다 교만의 열매입니다. 그 세력이 워낙 강해서 능력과 권세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성령 아래 있을 때는 짐승 같은 육체라도 양과 같이 순종하지만, 율법 아래 혹은 자아 아래 있으면 염소와 같은 본연의 죄악성이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도저히 가눌 수 없거든 겸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의 괴물 같은 몸과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이걸 잘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남은 숙제입니다. 들짐승과 광야 같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더 하나님 앞에 순복하라고 그렇게 하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자아의 괴물이 꿈틀거릴 때 낙심하지 마시고 더욱 자기를 낮추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여 보석처럼 다듬어진 귀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