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일곱머리 열뿔짐승 2 (계 17:9-11)

nam씨 2025. 1. 17. 21:33

일곱머리 열뿔짐승 2 (계 17:9-11)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이 시간에 계속하여 “일곱머리와 열뿔짐승”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 괴물 같은 짐승이 육체의 본능과 인간의 완악한 자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괴물과 같습니다. 어던 동기가 주어지면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오늘은 일곱 머리 즉 육체에 대한 좀 더 보충적인 말씀입니다. 9-10절에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말씀합니다. 오늘 해석해야 할 말씀이 일곱 산과 일곱 왕입니다. 일곱 머리가 일곱 산과 일곱 왕이라.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3. 일곱 산이란 육체는 끊임없는 난제의 연속이란 말입니다.


9절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먼저 여자가 앉은 일곱 산, 이미 답을 알려 드린 대로 일곱 머리는 육체 혹은 육체의 본능을 가리킵니다. 이 육체가 일곱 산이란 말인데 육체가 왜 일곱 산일까요?


성경에서 산이란 어려운 난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슥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했습니다. 여기의 큰 산은 당시에 국가적 난제였던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한 산이 아니고 일곱 산입니다. 산이 난제라면 7은 완전수로서 영속성 있는 난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한 산을 치우면 다른 산이 다가오고 그 산을 치우면 또 다른 산이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본능이 그러합니다.


이 본능은 살아있을 뿐 아니라 각각이어서 대통령이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의 다섯 방백과 같이 도지사만 있지 대통령이 없는 것처럼 여러 본능이 한 인격체 안에 있지만 상황에 따라 이 본능이 주장할 때가 있고 저 본능이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배고픈 본능 겨우 달래놓으면, 배가 부르니 이제는 게으른 본능이 다가오고, 사람이 배부르고 게으르면 또 다른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본능이란 첩첩산중입니다. 하나 이겼어도 다 이긴 것 아니고 또 다른 것이 또 다가옵니다. 거의 불가항력적인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곱 산이란 그치지 않은 힘든 존재, 난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제의 일곱 산을 여자가 타고 있습니다. 이런 약점을 가진 육신의 본능을 세상정욕이 미혹하고 있으니 얼마나 심가가한 상황입니까? 이것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 우리 육신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이 죄 많고 험악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육신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잘못하면 믿음을 배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하셨습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을 멀리할 것 같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이 은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은혜 받고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도록,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 잘 섬기라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류대학 들어가지 못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일류 대학 가면 좋지만 얼마나 교만하게 되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육체를 가졌기에 어떤 때는 가난으로 어떤 때는 질병으로 어떤 때는 전쟁으로 어떤 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 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우리가 이 육체를 떠나 비둘기 같이 훨훨 날아서 저 바다 끝에 가서 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만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약점 많은 육체를 주셨을까요? 인간의 타락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약점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이런 육체 입혀놓지 않았다면 우리가 스스로 의롭고 스스로 잘 나서 다 하나님 노릇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12:7-9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육체가 있으니 더 회개하고 더 겸손하고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봉사하고 더 순종하고, 때로는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 산과 같은 육체의 대단한 난제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4. 그런데 이런 인간의 육체는 여러 지배의 과정을 거칩니다.


육신을 지배하는 왕이 많습니다. 10-11절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서는 일곱 머리를 일곱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일곱 산의 개념도 있고 일곱 왕의 개념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일곱이 아니라 일곱째 왕에서 여덟 째 왕이 나오니까 여덟 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곱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7의 의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왕의 7은 사역의 완전수이므로 절대적 권력을 의미합니다. 일곱 왕 모두가 다 절대적인 특성이 있어요. 그러므로 그 절대적 지배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일곱 왕이라 한 것은 마지막 여덟째 왕은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우리를 다스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때 천국의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일곱 왕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마치 옛날 스핑크스의 수수께기처럼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인간입니다. 어릴 때는 기어 다니다가 크면 두 발로 걷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으니 세 발로 걷는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으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10절에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했는데 이 여덟 왕들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면 먼저 다섯 왕이 동시에 다스리다가 망했고, 현재는 여섯째 왕이 다스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곱째 왕이 나타나 함께 공동통치하며 다스립니다.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했기 때문에 일곱째 왕은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왕입니다.


그런데 이 일곱째 왕에게서 마지막으로 또 한 왕이 나옵니다. 이 왕은 지난 시간에 설명한 대로 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지만 장차는 나타날 왕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으니 여덟째 왕이 누구인지 대충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동안 이 왕들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제 차근차근 설명하자면 먼저 다섯 왕은 은혜 받지 못했을 때 지배 받던 육신의 죄악된 욕망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수요 시험의 수요, 이런 고통과 시험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섯 왕은 우리가 은혜 받기 전에 우리들 지배했던 욕망의 왕들입니다. 수 10장의 아모리의 다섯 왕처럼 지금도 은혜 충만치 못할 때는 나타나기도 하죠(고전3:3).


그래서 엡2:3에 “전에는 우리가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섯 왕에게 지배 받다가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 나므로 그 육체의 욕망의 왕들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섯 왕이 예수님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인데, 육체의 욕망이 사라진 후에 현재 다스리는 여섯째 왕은 누구일까요? 우리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지배가 육의 욕망을 없앨을 뿐 아니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한 것처럼 현재적 지배는 바로 성령의 지배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왕은 숫자로 6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만드신 날이 여섯째 날인데 이처럼 이 시대 우리 영혼의 생기는 바로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계시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왕은 성령이십니다.


그럼 일곱째 왕과 그 일곱째 왕 속에서 나오는 여덟째 왕은 무얼까요? 먼저 7번과 8번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8번은 7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답부터 알려 드리면 7번은 육체의 생명이고, 8번은 사망의 세력입니다. 사망이 무엇인가? 생명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왕인 늙음이 우리를 지배할 때 여덟째 왕인 사망도 그만큼 우리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한 말씀이 바로 늙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즉 지상에 태어나 살아갈 때 성도의 육체일지라도 그 안에 또 하나의 세력이 서서히 그리고 반드시 그러나 길지 않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늙음의 세력입니다. 이건 7번 속에서 8번이 나왔다는 점에서 사망이 세력이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1:24-25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을 피할 자는 없으므로 그래서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늙음과 사망의 세력은 반드시 옵니다. 생명이 쇠한 만큼 죽음은 그만큼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와서 머물지만 잠시 동안이라, 즉 길지 않습니다.


성도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땅은 아무리 길어도 하룻길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 잠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노년기는 성령과 사망이 침투한 노구의 육체가 동시에 다스리는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고후4:16).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즉 사망이 멸망에 처해집니다. 고전15:26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한 것처럼 성도는 둘째 사망에 처해지지 않고 천국의 영광 속에 기다리고 있다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까지도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산으로 본 육체의 난제들이요, 또 왕으로 본 우리 지배적 인생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말합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 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전11:8-10).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은혜를 받아 죄의 지배에서 온전히 벗어나 성령 안에서 승리하며 살다가 우리 주님 오실 때 우리 육체까지도 새롭게 변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