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큰 음녀의 정체 5 (계 17:6-7)

nam씨 2025. 1. 2. 13:49
 
 음녀의 정체 5 (계 17:6-7)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이 시간에도 “큰 음녀의 정체”라는 제목으로 계속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막에 거하며 거룩한 삶을 갈망했던 사막의 교부 중의 하나인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까?”



그러자 마카리우스는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들아! 라고 욕을 해보아라.” 제자들이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훌륭한 분들이여 라고 칭찬해 보아라.” 또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답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모진 비난을 받아도, 극진한 칭찬을 들어도 말이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시험에 넘어뜨리는 사탄 마귀와 세상도 문제지만 그걸 물리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죽지 못한 우리 자신들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 여자가 탄 일곱 머리 열뿔 가진 짐승의 비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 계속하여 큰 음녀 즉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18. 세상은 성도나 주의 종들까지 시험들게 하는 흉악한 것입니다.

6절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여기 요한이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겼던 것은 왜 그랬을까요? 여자가 성도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피는 생명인데 성도들의 피에 취했다란 곧 큰 음녀에게 그 생명이 그만큼 수없이 먹혔음을 의미합니다. 모기가 피를 빨아먹고 그 무게에 날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여자는 피에 가득 취해 있었습니다. 그 피는 먼저 성도의 피였습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함을 입은 모든 백성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이제 부르심을 받은 초신자도 있겠고, 이미 믿어 상당한 거룩함에 이른 성도도 았습니니다.


그래서 고전1:2-3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도 취했는데 예수의 증인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행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크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도저히 이 세속의 음녀에게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환상 그대로 순교의 피로 보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성도와 예수 증인들의 생명을 얼마나 빨아 먹었든지 그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에서 구속받은 성도요, 죄와 타협할 줄 모르는 새 생명을 가졌고, 성령 안에서 거룩함을 입었으며,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는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날마다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이요, 천상천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로마의 왕 같은 폭군도 아닌 이 여자에게 무수히 당했다는 것은 기이히 여기고 또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성도나 주의 종들을 영원히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성도들에게 늘 시험의 원인이더라는 뜻입니다. 그토록 귀히 쓰임을 받던 일군들도 조금 방심하는 순간 이 세속에게 끌려 넘어지거나 마음으로라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여차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하고, 또 여차하면 주의 종들도 넘어지고, 좌절하고 그 충만하던 그 영적 생명력과 입은 거룩한 영광까지도 시들게 하고 맙니다. 그것은 아직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 벗으면 그 땐 사탄의 시험은 없어요.



그래서 고전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리고 벧전1:17에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셨습니다. 잠7:25-27에도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만 25장을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왕 발락의 궤계에 빠져 우상을 숭배하고 행음할 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습니다. 이 때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나서서 이 염병을 멈추는데 어떻게 합니까?


시므온 지파 지도자 시므리가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올 때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7-8절)습니다.

여기 염병은 창자에 염증이 와서 고열을 나타내는 병입니다. 이처럼 세속의 열병이 걸려 신음하는 사람 있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 열병은 아론의 증손자 비스하스가 창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의 여인의 배를 찔러 죽이자 그친 것처럼 성령으로 세상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그칩니다. 빌3:19에 “그들의 신은 배요” 그랬듯, 성경에서 배는 욕심과 욕망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부릅니다. 마치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과 같이 1차에 다 돌아오지 않고 3차에 걸쳐 포로에서 귀환합니다. 제1차 포로귀환(B. C. 537)과 2차 포로귀환(B.C. 458)과 3차 포로귀환(B.C. 444)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이방인과의 통혼을 끊고 율법 교육을 통한 백성들의 신앙 교육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며 영적부흥을 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온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도 세상 줄 놓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니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세상 틈 타면 우리 생명 다 잡아먹는 것입니다.

19. 세상은 인간의 약점을 타고 역사합니다.


7절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여기 음녀가 탄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짐승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동일하다, 많은 위성국을 거느린 공산주의다, 세상적인 권세다, 부흥로마제국 또는 십 연합국이다, 큼 음녀가 적 그리스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종교 통일할 것을 말한다, 천주교와 로마제국과의 연합을 말한다, 역사 속에 나타났던 적그리스도의 핍박행위를 가리킨다." 등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대부분은 계시록의 중심에서 벗어난 생각들입니다. 계시록은 그걸 말씀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우리 믿음과 영적체험 등을 설명하는 영적교과서라는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어떤 신앙 이야기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세요.


그러므로 7절의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은 먼저 여자가 탔다는 점에서 즉 세상이 사람들을 타락시키려고 이용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이 사람들을 타락시키려고 늘상 이용하는 괴물과 같고 짐승과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입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이 우리 인간의 최대의 약점인 육체의 본능과 자아를 타고 활동함을 말합니다. 세상이 인간의 이 약점을 타고 활동합니다. 이들은 짐승이니 우리 육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머리의 7은 완전수로서 일곱 머리는 전지성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대상이 짐승이라는 점에서 가르쳐줄 필요가 없는 육신의 어떤 능동성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본능의 특징입니다. 본능은 가르치지 않아도 젖을 빨고 아프면 울고 척척 잘 행합니다.



그런데 머리가 여럿이듯이 각각의 본능마다 그 주관이 다릅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처럼 식욕 성욕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소유욕 생명욕 기타 모든 탐욕 등 그 본능의 머리가 다릅니다. 즉 명예에 대한 욕심은 없어도 물질욕이 많을 수 있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자 청년 다른 욕심은 없었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본능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내신 것이지만 세상이 그 욕망을 충동질해 이용한다면 죄가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강력한 브레이크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지켜 소원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고전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했습니다.

그럼 여자가 탄 짐승은 열 뿔 짐승은 무엇일까요? 이 역시 짐승이니 우리 육체에 속한 그 무엇입니다. 그리고 뿔이라 했으니 뿔은 권세 권능 힘 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왕적인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열 뿔이니 10은 부족하지 않은 만수로서 자유의지와 같은 자행자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 뿔은 인간의 자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전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핍박을 많이 받았지만 참고 그들과 싸우지 않았단 말입니다. 법대로 감정대로 했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지만 주의 은혜로 절제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다 뽑아버려서 뿔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인간의 본능과 자아와 같은 약점을 이용하여 성도도 넘어뜨리고 시험들게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짐승과는 달리 존엄하지만 그러나 짐승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 육체란 바울신학에서 죄의 옛사람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렘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했습니다. 만물보다 더 부패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모든 짐승의 악한 본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박군의 마음이라는 그림에서 보듯 뱀처럼 사악하고 염소처럼 완악하고 공작같이 교만하고 돼지처럼 욕심 많고 이러한 마음의 종합판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점을 먼저 깨닫고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늘 근신하며 은혜 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계시록에서 비밀 아닌 것이 없는데 여기서 비밀을 강조할까요? 그것은 이 괴물에 대한 비밀도 수수께끼지만 나아가 이 모든 것은 우리 신앙 상태를 측정하는 도구로서의 신비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꾸 마음이 완고해지고 짐승 같은 성향이 나타나거든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큰 음녀라 칭하는 세속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도 생명도 능력까지도 잡아먹는 세상의 정체를 알았으니 우리 모두 항상 근신하며 깨어 믿음 생활하여 의인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어 세속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