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사도행전 26:19-29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사도행전 26:19-29
'자존심'을 국어 사전에서는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가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좋은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좋은 이미지의 자존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의 탁월한 문학자 중의 한 분인 이은상 씨는 자존심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자존심이란 결코 배타가 아니다. 또한 교만도 아니다. 다만 자기 확립이다. 자기 강조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비로소 얄미운 아첨이 있다. 더러운 굴복이 있다. 넋빠진 우상 숭배가 있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존심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아첨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 자존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안에서는 왕자처럼 처신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어느 성경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바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경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과 총독, 그리고 많은 고관들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두 팔을 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아그립바 왕에게 응수한 바울의 이 한마디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다른 말로는 더 이상 멋있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바울은 특별한 혐의 사실도 없이 2년이 넘도록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의 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울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려고 백방으로 애쓰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로 인해 유대인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총독 베스도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을 석방하자니 유대인의 감정을 건드릴 것 같고, 그대로 가두어 두자니 별다른 혐의 사실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바울은 자신이 무혐의 처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로마 황제로부터 직접 재판을 받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여 로마의 최고 법정에 상소를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죄수를 황제 앞으로 보내려면 뚜렷한 죄목이 첨부되어야 했던 당시 관례로 보아 바울은 총독에게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묘한 정치적 사건으로 고심하던 그 때, 총독은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의 통치자로 있던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동생의 내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과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릴 작정으로 다시 공판을 열게 되었으며, 본문이 바로 그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먼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만났으며, 무엇때문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문을 엽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드디어 그가 증거하고자 했던 핵심,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소망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총독 베스도는 참지 못하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기세에 바울이 압도당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25절).
그리고는 바울은 확신에 찬 시선을 이제 아그립바 왕에게로 돌렸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먹었던 대상은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습니다. 총독에게는 지난 번 재판에서 이미 할 이야기를 다 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왕과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를 향하여 복음 증거를 계속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선지자를 믿으며 예수의 이야기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구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장차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인류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는 구원자가 되신다고 분명히 예언했습니다. 왕이여, 보시옵소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삼 일만에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야입니다. 왕이여, 이 사실을 좀 더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시면 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하는 도다." 이 때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형편없는 것이라고 얕잡아 보는 멸시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네가 몇 마디의 웅변으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아냥대는 것입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정도에서 그만 입을 다물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절).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요. 여기에서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한마디는 사도 바울의 자존심을 통쾌하게 대변할 뿐만 아니라 함축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왕이여, 당신은 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의 승자는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하는 의미가 들어 있고, "예수 없는 왕자보다도 예수 있는 죄수가 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하는 메시지도 들어 있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에게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왕이고, 또 한 사람은 죄수입니다. 화려한 자주색 왕복을 걸친 자와, 쇠고랑을 차고 냄새나는 죄수복을 입은 자가 지금 대면하고 있습니다. 왕의 곁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버니게가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온 몸을 치장하고 앉아 동정과 경멸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바울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진홍색 정장을 차려입은 총독과 행정 장관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기라성 같은 장교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화려한 신분에 속하는 그들은 권세와 부를 소유하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를 그 누구보다 많이 터득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서 재판정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들이고, 바울은 이미 50대를 바라보는 장년입니다.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는 처지인지라 바울이 기가 조금 꺾였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비굴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왕을 부러워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때 냉소하는 병적인 무엇이 그에게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는 끝까지 떳떳하고 의연했습니다.
자존심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바울이 이렇게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배후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자마자 그는 밑바닥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변화요, 패러다임의 변화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부귀 영화를 보는 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예수를 발견한 다음부터 그는 누구를 보아도 당신도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왕자처럼 살았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거지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느 정도로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인가를 성경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지요? 또 고린도전서 7장 7절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믿고 아름답게 변화된 처녀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예수 잘 믿는 처녀들이 결혼하기 어려운 세상인데 그 당시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혼기가 찬 처녀들이 결혼을 해야 하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하나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바울에게 상담을 해 왔습니다. 이때 바울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하는 중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처방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그는 믿음 좋은 처녀들이 할 수 있으면 자기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존심입니까? 우리가 그 수준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봅니다.
세상 부귀영화는 헛되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과 같은 자존심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을 봅시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노라." 현대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다 내버렸다." 이처럼 예수 믿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디모데전서 6장 7-8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는 굳이 세상 부귀 영화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성철 스님은 평생을 바쳐 진리를 추구하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선 구도자였습니다. 그가 만약 예수를 알았더라면 그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초등학생의 교과서를 비롯해서 몇 트럭 분의 책을 실어 날라다가 읽으며 그 깊은 산골에 있는 절간에서 세상과 사오십 년을 단절하고 벽을 쳐다보며 도를 닦았답니다. 그리고 그가 터득한 도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였습니다. 결국 인생은 그저 인생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반드시 도를 닦아야만 터득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란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당시 황제였던 루이 16세는 하루아침에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제 단두대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그는 손톱이 뭉개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벽에다 이런 말을 썼다고 합니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조금이나마 깨어있는 사람은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며 부귀 영화가 한낱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기뻐해서 스스로 그 속에 깊이 빠져든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과소비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과소비를 합니까? 그들의 소망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가장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귀 영화가 헛된 것인 줄 알지만 이것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자조 섞인 소리를 하면서 거기에 목숨을 겁니다. 여전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도리가 있나요? 그들은 부귀 영화의 허구성을 알면서 속는 자들이요, 속는 줄 알면서 더 몰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부귀 영화가 얼마나 헛되고,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분명하게 깨달은 자들입니다. 검은색이 검다는 것을 쉽게 알려면 그 옆에 흰색을 놓고 비교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검은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사야 51장 6절을 흰색으로 주셨습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여기까지는 검은색입니다.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흰색입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서 알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마음을 주어야 할 것과 주지 말아야 할 것, 부러워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헛된 것을 손에 쥐고 아옹다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를 모른 채 헛된 것에 속아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바울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가진 의와 평강과 희락 둘째로, 우리가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다 쏟아 부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세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러분, 먹고 마시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왕하고 견줄 만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그에 비해 바울은 떡 한 조각으로 겨우 연명하는 죄수 신세가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마음의 평강과 세상 사람이 모르는 희락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7세에 왕이 된 아그립바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마음을 조리며 살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좌를 넘보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중상모략을 해서 그를 제거해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자유함이 있을까요? 무슨 대단한 기쁨이 있을까요? 버니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왕의 누이동생이지만 이미 몇 차례의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와 오빠에게 얹혀 사는 처지였습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었을까요? 왕비의 옷을 걸치고 진수성찬을 먹는다고 그 마음에 진정한 삶의 기쁨이 있었을까요? 더욱이 당시 세간에는 오빠인 아그립바 왕과의 사이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 그 뿐인 줄 압니까? 로마 황제가 여행을 왔을 때 그를 유혹하여 황제의 정부로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자유함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는 믿지 않고 겉만 요란하게 꾸미는 사람들을 볼 때 자기에게 있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긍지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우리는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분은 나이가 많은 것 때문에 소망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또 어떤 분은 새벽부터 밤까지 땀을 흘려 수고하지만 한평생 가난의 질고를 뛰어넘지 못하는 절망과 답답함에 싸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은혜, 곧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골고루 받았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의 염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은 모든 것이 주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도, 내일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가 있고 그 자유로 인해 누리는 심령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이 자유함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긍지를 가지고 그들과 대면할 수 있었고,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
셋째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세에서 영원히 누릴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실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생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즉 왕이 되어 한평생을 희희낙락하면서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문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이 영생만 소유한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인생을 살더라도 후회할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은 너무 소중한 것이라 세상의 다른 것은 다 포기할지라도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아그립바 왕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영원토록 후회하는 패배자가 되어버립니다. 무슨 일이든 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느냐에 따라 한 인간이 잘 살았느냐, 잘못 살았느냐 하는 인생의 질이 결정됩니다. 한번 태어난 목숨은 언제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끝이 좋으려면 영원히 누릴 영광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끝을 좌우하는 권세를 가진 예수를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서 뭐라고 하십니까?"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예수님을 붙들고 영생을 소유한 자는 끝을 바로 잡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인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남자는 67세이고 여자는 75세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부인의 나이보다 다섯 살 이상이면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부인 혼자 12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는 계산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예전에 평균 수명이 41세일 때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41세에 죽으나 67세, 혹은 75세에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저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목사님과 함께 비행기의 2등석을 탄 일이 있습니다. 의자와 의자 사이가 넓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스튜어디스도 얼마나 친절하게 잘 섬기는지, 열 몇 시간을 오는데도 3등석에 앉아서 올 때보다는 피곤도 덜하고 기분이 훨씬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비행 청사에서 입국 수속을 받느라고 줄을 서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옆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니까 그분이 나를 향해 씩 웃는 것이었어요. 나도 따라서 씩 웃었어요. 2등석에서 열 몇 시간을 쾌적하게 여행한 사람이나 3등석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비행기에서 내리고 보니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서 나오는 쓴웃음이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그립바와 같은 팔자 좋은 생을 살다가 종착역에 서는 사람이나, 거지 나사로 처럼 힘겹게 살다가 종착역에 서는 사람이나 돌이켜 보면 다를 것이 없어요. 굳이 다른 것을 찾는다면 편히 산 사람이 배가 좀 더 나왔다거나 주름살이 덜 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마지막에 영생을 붙들었느냐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붙들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바울이 볼 때 아그립바 왕은 끝을 잘못 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왕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잠시 죄수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잠시 왕으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죄수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므로, 바울은 자신의 결박당한 것 외에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바울과 같은 자존심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 살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은 아그립바와 버니게를 부러워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모신 당신 자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쇠사슬을 차고 외로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초라하게 보입니까? 당신은 어딘가 잘못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인생을 향해서 비굴하게 구걸하는 자와 세상 부귀 영화를 하늘의 영광보다 부러워하는 자가 있다면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그 능력으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증거 하던 바울의 그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