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큰 음녀의 정체 2 (계 17:3)

nam씨 2024. 12. 5. 16:08

큰 음녀의 정체 2 (계 17:3)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이 시간에 “큰 음녀의 정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미생물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의 의학자  파스퇴르는 전염성 질병의 원인이 병원성 미생물이라는 학설을 완성한 위대한 사람입니다. 세균의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인 1881년 5월 5일, 파스퇴르는 양 각각 24마리씩, 염소 각각 1마리씩, 소 각각 6마리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구룹에 백신을 주사했습니다. 그 백신은 약하게 만든 탄저균 배양액이었습니다.


12일 지난 17일에는 이 동물들에게 좀 더 강한 탄저균 배양액을 접종했고, 31일에는 두 그룹 모두에게 병독성이 강한 탄저균 자체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백신 접종을 받은 동물 구룹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그룹의 양과 염소는 대부분 탄저병에 걸려 죽었고, 소들까지도 심한 열병 증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탄저병 예방 접종의 가치가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세상의 죄도 추상명사라서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미혹하고 치명적인 범죄를 불러오고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죄인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심히 악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큰 음녀의 정체 즉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7. 세상 때문에 광야의 연단이 주어집니다.


3절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갔나요?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전능하신 성령께서 데려 가셨으니 아니 갈 수 없습니다. 가서 보니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가 거기에 떡하니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이미지입니까? 광야의 연단을 보여주는 참으로 오묘한 그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랬습니다. 마4:1-2에 “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그랬고, 눅4:1-2에도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했습니다. 성령께서 시험의 광장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십니다. 사탄의 시험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세상적인 것들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는 붉은 빛 짐승이 여자를 태우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여자는 큰 음녀로서 바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타락시킬 세상이나 세상 죄를 가리킵니다. 여자를 태우고 있으니 문제예요. 이것을 떨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의 연단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백성들에게서 죄를 책망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눅3:8-9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두려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11-14절) 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연단과 시험과 회개를 위한 장소요, 불신앙과 세상 죄를 떨어내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기까지 이 고난의 학교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광야 40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불신적이었고 악했기 때문에 40년 간 애굽 냄새 물씬 풍기는 불신앙의 세대는 다 죽고 신세대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옛 사람 다 죽고 새 사람 만드는 곳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큰 음녀를 등에 태운 붉은 빛 짐승의 모습은 바로 세상을 떨어버리지 못해 연단 받고 있는 아직 육신에 속한 성도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8. 세상은 인생의 육신적인 것을 타고 활동합니다.


다시 3절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럼 여자가 탄 붉은 빛 짐승은 무엇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이 붉은 빛 짐승은 우리 인간의 육체나 육신적인 것을 말합니다. 짐승이 육체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붉은 빛 짐승의 일차적 의미는 인간의 청춘을 말합니다. 이처럼 세속이란 인생이 생존해 있을 때 특히 청춘의 시기일 때 더욱 관계가 깊습니다.



그래서 전11:9-10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했고,

딤전6:11-12에 젊은 디모데에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청춘이 시들면 미혹의 힘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요일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갑니다. 청춘이 시들면 낙도 없고 소욕도 그치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말하는 것도 일도 나들이도 만사가 다 귀찮아집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세상은 인생을 더 이상 미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노년이 되어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해석은 육신이 아니라 육신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해 육신적인 것, 그러니까 청춘이든 노년이든 육신적일 때 세상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일 때만 죄가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14-15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죄는 오직 육신적인 사람만 지배합니다. 그러니까 붉은 빛 짐승만 여자가 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붉은 빛 짐승 즉 육신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 중에 에서가 되면 안 됩니다. 에서가 세운 나라가 ‘에돔’인데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영이라면 에서는 육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에서는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받는 축복은 없습니다.


창27:38-40에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세상 죄는 바로 은혜 받지 못한 자 즉 육신적인 사람을 타고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탈출하고 죄 짓지 않으려면 은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지배하던 음녀는 어디로 사라진지 모르게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기 전에는 광야의 연단은 끝나지 않습니다.



9. 세상은 말씀으로 새로워지지 않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다시 3절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여기 괴물과 같은 붉은 빛 짐승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흉악한 짐승의 모습은 바로 육신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은혜 받아 새로워지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지만 은혜 받지 못하면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괴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육신적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먼저, “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란 신성모독죄를 가리킵니다. 신성모독이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동등이라고 말씀하자 유대인들이 그걸 하나님을 모독한 죄라고 했습니다.


요5:18에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시니까 잘못이 없지만, 문제는 붉은 빛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 된 죄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이비 이단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노릇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복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내 주관대로 살고 내가 대접 받고 내가 영광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아직 말씀을 모르는 육신적인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그 괴물은 “일곱 머리”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둘만 되도 놀라운데 일곱이니 대단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7은 사역의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머리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행하는 본능의 능동적인 속성을 가리킵니다. 이 본능이 영의 본능이라면 좋겠지만 육의 본능으로만 사니 얼마나 문제입니까? 본능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사는 것은 죄가 됩니다. 아무리 본능이 있어도 말씀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고전4:6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했고, 유1:10-11에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했습니다.


그리고, “열 뿔이 있으며” 뿔은 권세나 주관을 말하며, 열 10은 십진법에 있어서 만수입니다. 즉 열 뿔은 말씀을 벗어나 자기 주관, 자기 마음대로 행하려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뿔 두 개 달린 염소도 대단한데 뿔이 열 개 달렸으니 누가 그 고집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순복하지 않는 그 완악한 모습이 바로 뿔 열 개의 자아입니다.



이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광야에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여 성령 충만할 뿐 아니라 성경을 읽어 말씀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광야는 기도하고 성경 보며 새롭게 회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죄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도 못 박았을 뿐 아니라 세상도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세상에 볼 일 없고 세상도 나에게 볼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죄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 떠나면 우리는 육신적인 사람이 되어 세상이 우리를 지배할 수밖에 없고, 또 다시 광야의 연단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광야의 흉악한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탄저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죄상 죄입니다. 탄저균은 육신만 죽이지만 죄는 영원히 육신과 영혼까지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패역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광야의 붉은 빛 짐승처럼 세상을 태우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변화되어 고난의 광야에서 속히 벗어나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 신부라 제사장이라 부르심을 받는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