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지는 일곱 대접 4 (계 16:10-11)
부어지는 일곱 대접 4 (계 16:10-11)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 다섯째 천사의 대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계 모든 미혼 여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행진곡이 있지요? 바로 유대인 음악가 멘델스존이 작곡한 우리가 많이 듣던 결혼행진곡입니다. 음악에 조예는 없으나 듣고 또 들어도 그렇게 아름다운 곡일 수 없습니다. 그는 천재적 음악가로서 무려 17세 때 결혼행진곡이 포함된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꿈 같은 웨딩마치를 작곡한 것은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고통 없이 품격 있게 자라났을 뿐 아니라, 그의 나이 아직 어린 때 그에게 결혼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이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고통을 많이 겪은 음악가 모짜르트의 무겁고 장중하고 어렵고 치열한 음악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그 행진곡만큼 아름답기만 한 꿈일까요? 그런 면도 있지만 거기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은 더욱 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결혼의 의무를 70여 가지를 나열한 다음에 “이런 각오 없으면 결혼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결혼할 자격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 의무가 따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롬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한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될 때 기쁨은 물론 고통도 존재합니다.
여기 다섯째 대접 재앙은 일반적으로 적그리스도 나라와 그 권세의 쇠퇴를 말하지만,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대접이 바로 고난의 사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복된 면과 함께 우리에게 존재하게 되는 주를 위한 슬픔의 몸부림 같은 고통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럼 은혜를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 육신적이지 않게 됩니다.
10절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이 말씀은 옛날 바벨론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하다가 하나님이 치시므로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7년 동안 머리도 깎지 않고 밖의 이슬을 맞으며 짐승처럼 살았고 그리고 후대 벨드사살 왕 때 하나님을 조롱하다가 그 막강하던 나라가 멸망 당했습니다.
여기 짐승은 우리 육신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큰 틀에서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요. 본능의 존재입니다. 또 짐승의 왕좌와 나라라 했는데 그 왕좌와 나라란 육신이 인격을 지배하는 인격을 말합니다. 참고로 성령이 지배하면 신령한 사람, 육신이 지배하면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어두워지더라. 어두워진다는 것은 약해지거나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인간의 노년과 죽음을 저녁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탄을 어둠에 가두셨듯 표면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즉 은혜를 받으면 우리 육체는 그대로지만 우리 인격의 성향이 바뀌므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육신적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은혜와 성도의 경건으로 육신적인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육신적이지 않습니다.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즉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우리 안에 에서와 같이 들나귀처럼 육신적인 기질이 있을지라도 그 기세가 꺾이게 됩니다.
2. 중심에서 새로운 고통이 생겨납니다.
다시 10절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더라. 사람이 얼마나 아프면 자기 혀를 깨물까요? 그러므로 혀를 깨문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이 심하다는 것이고, 고통이 내 중심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다던데 무슨 마음 중심에 고통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성령으로 거듭 나고 은혜로 넘쳤던 바울, 그리고 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천국방문자 사도 바울이지만 그 마음에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향한 고통이었습니다. 고후11:27-28에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다음은 동족의 구원을 위한 고통이었습니다. 롬9:1-3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고전2:16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한 것처럼 은혜 받아 예수의 심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고통 말고는 없을까요? 또 있습니다.
3. 자기 육신으로 인한 고통도 있습니다.
11절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여기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했다란 비방하는 당사자가 땅의 존재라는 걸 암시합니다. 그리고 종기가 나오는데 종기는 몸속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입니다.
옛날에 종기가 많았는데 염증이 심해 한창 부을 때 얼마나 아픕니까? 요즘 감각이 무딘 노인들이 전자매트에 화상을 입어 썩어 들어가 종창이 생겨 고생하는데, 여기 종기란 성도가 변화를 경험했다 해도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모순적이고 짐승 같은 육체라는 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영혼이 탄식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받아 신유의 도우심은 있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짐승 같은 육체의 본능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합니다.
성군 다윗도 그 육체 때문에 간음죄를 범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물욕 성욕 명예욕 그런 것이 은혜로 통제되는 것이지 그 본능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 육체는 성도의 육체라도 가난이나 병고나 장애나 늙음 등의 환경적 제약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특징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훼방꾼이 안팎에 있으니 이것이 슬픔이요 고통이 됩니다.
이런 고통도 있더군요. 기독신문 대담에 어떤 분은 60대까지는 책상에 11시간 반 동안 앉아 성경 읽기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70대가 되면서 피곤하여 7시간 반 정도, 80대가 되니 더 줄어 6시간 반 정도만 책상에 앉아 있게 되어 다른 책을 볼 여유가 없어 이제는 성경만 본다면서 성경을 많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은 그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혹은 헌금하고 싶지만 물질이 없어서 조금밖에 못하는 심정이라면 얼마나 마음 아프겠습니까? 이건 헌신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은혜 받으면 남이 알지 못하는 이런 고통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이 고통은 고상하고 행복한 갈등이지만 이런 고통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섬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비방하는 짐승 같은 육체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수를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더 이상 육신적이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눈물짓는 거룩한 고통을 가진 가장 아름다운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