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지는 일곱 대접 2 (계 16:4-7)
부어지는 일곱 대접 2 (계 16:4-7)
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이라는 제목으로‘연단이 주는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골수분자라는 말을 쓰는데 골수분자(骨髓分子)란 ‘조직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성원으로 철저한 충성을 바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 용어를 “뼈 속까지 그런 사람” 대략 이런 내용으로 풀어쓰고 있습니다.
봉민근 작가가 쓴 “뼈 속까지 예수쟁이 이고 싶다.”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뼈 속까지 예수쟁이 이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삶의 목표가 오직 주님의 칭찬만을 사모하는 자 되고 싶다.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 오직 예수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 분이고 싶다. - 주님이 언제나 나의 마음 나의 생각 속에 분초마다 거하셔서 기쁨도, 아픔도 슬픔도 함께 누리며 사는 자 되고 싶다.”
정말 뼈 속까지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일생 예수가 나의 전부가 되어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웃고 예수 때문에 울고 예수 때문에 죽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셋째 천사의 대접재앙을 통해서 그런 은혜를 갈망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천사가 붓는 대접은 무엇일까요?
1. 연단의 깊이가 더해지면 말씀의 삶으로 변합니다.
4절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셋째 대접은 강과 물 근원에 쏟아지고 그 물들이 피가 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시록의 특징과 같이 환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강과 물 근원 즉 강과 샘에 대접을 쏟으니 그 물들이 피가 되어 흐릅니다. 전에는 그냥 물이었지만 이제는 피가 되어 흐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볼 때 무엇의 변화일까요? 성경에서 물은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강과 물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우리 마음과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강물과 샘들이 대접재앙을 받아 피로 변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더 귀한 것입니다. 물은 아무나 줄 수 있지만 피는 아무나 줄 수 없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피가 섞이면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그냥 물이 아니라 피입니다.
마치 예레미야의 탄식과도 같습니다. 렘9:1에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이 예레미야의 눈물은 보통 눈물이 아니라 피와 같은 피눈물입니다.
눅22:44에도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위대한 것도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단의 깊이가 더해지면 지식으로만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해 지키는 말씀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히13:11-13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히5:8-10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이렇게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징계의 채찍은 우리 뼛속 깊이 그 교훈이 파고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배운 사람과 그냥 지식으로 배운 사람과는 의식적 차원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625를 체험한 세대와 체험하지 못한 전후세대와의 전쟁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처럼 연단은 죄를 철전지 원수로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길바닥도 돌밭도 가시덤불로 덮인 밭이 아닙니다. 30배 60배 100배로 결실 맺는 마음의 옥토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눅8:15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에 대한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셋째 대접도 6절에 언급되듯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 죽게 됩니다. 이런 일이 우리 마음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 성도와 선지자를 죽인 원수는 멀리 찾을 필요가 없이 바로 우리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마음의 거룩이 성도요, 마음의 말씀이 곡 선지자입니다. 그동안 이 악한 생각들이 마음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고 좋은 생각을 죽였습니까?
마13:18-22에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그랬습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요8:37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으면 우리 마음의 좋은 말씀과 생각들을 죽입니다. 믿음을 죽입니다. 믿음의 선한 생각이 깃들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고난의 연단을 받고 보니 그런 악한 생각이 심판을 받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잠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한 것처럼 마음 통제하기가 어렵지만 심판의 두려움 앞에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경건이란 거룩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면에서는 성령의 은혜로, 다른 한 면에서는 경건의 두려움으로 우리 신앙의 틀이 잡혀져 갑니다.
2. 연단은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게 합니다.
5절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여기 "물을 차지한 천사"라 했는데 물이나 넓게는 사상 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탄의 지배가 아니라 천사의 지배라는 점에서 좋게 해석해야 할 부분입니다. 즉 대접재앙의 은혜로 생각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물을 차지한 천사”라는 문구는 중동지역에서 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이삭도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려고 해서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을 때 남북 이스라엘은 기브온못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습니다(삼하2:13). 메롬 물가의 전쟁도 그렇고 물 때문에 국가 간의 전쟁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을 차지한 천사”란 전에는 우리가 사탄에게 생각을 지배 받았다는 의미도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엡2:2-3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숙원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줍니다. 즉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의 어리석은 생각을 처단하기를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연단의 징계를 받고는 어리석은 생각이 달아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잠19:25에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했고, 잠22:15에도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들이 하나님 나라의 아이들인 우리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3. 연단은 육신의 생각을 처단하게 합니다.
6절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여기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라 했는데 이들은 순교자들입니다. 역사 속에서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 지키다가,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도와 선지자 역할을 하는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은 거룩함과 믿음을 고수하려고 할 뿐 아니라, 바로 살아야 한다고 우리 속에서 외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신에 처하여 얼마나 그 소리를 죽였습니까?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자는 다름 아닌 완악한 우리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연단의 사랑을 받고 보니 마음에 경건함이 깃들어 반대로 우리 안의 거짓선지자인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불신앙의 악념들을 처단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4. 연단은 육신의 생각들을 온전히 불태우게 합니다.
7절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6절은 물을 차지한 천사의 찬양이고, 7절은 제단이 그 찬양을 받아 동감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했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여기 제단에 대해 번제단인지 분향단인지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사야를 핀 숯으로 거룩하게 한 제단을 연상하게 합니다. 번제단의 경우 죄악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분향단은 기도의 상징이지만 기도하다 보면 죄악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제단에서 온갖 추한 것들이 온전히 불살라져야 합니다. 이 역시 연단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징계의 연단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함으로 우리 안의 악한 것들을 처리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12:10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이시”라고 한 것은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은혜를 찬양한 것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죄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주시고 또 강한 섭리의 손길로 지금 이 시간에도 연단하시므로 우리를 거룩에 참예하게 하시니 그것이 바로 전능이십니다.
그래서 막10:27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신 것이고, 슥4:6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뼛속까지도 죄인인 우리들에게 은혜 주셔서 뼛속까지도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주셨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은혜에 참예하도록 전능의 손길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고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거룩을 이루어 나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