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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nam씨 2024. 10. 4. 20:38

사도신경 강해 - 임영수 목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

 

 

요일 4 :7~15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말씀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첫 번째 고백의 명제인 하나님과 관련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 여권신장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분은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 하나님이냐, 어머니 하나님도 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의에 대해 저는 반박하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 있어서, 그 교제는 주인과 종, 왕과 신하, 기업주와 노동자, 장교와 사병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 질서에서 생겨난 기능적 역할들입니다. 이러한 관계에는 친밀, 사랑, 생명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표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주장, 요구, 경계, 이익추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는 유보의 장벽, 숨긴 것, 일방적인 요구, 강요된 복종, 체념,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 성공을 위한 인연 맺기 같은 것들이 개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친밀함, 사랑, 자족, 희망, 신뢰, 생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교제에서 경험하는 결핍, 고갈, 갈등, 무의미, 무시당함, 상호 의존성, 불만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은 생명,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중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가 있습니다. 작가는 그 소설에서 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애틋한 '부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순수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새끼를 돌보는 가시고기"로 상징화시키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는 아들과 아버지를 맺어주는 본질적인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명예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요즈음처럼 상하고, 왜곡된 부성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은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아버지 상 때문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왜곡된 아버지 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하나님 안에서 참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의 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자리가 어디인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Fatherhood)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친밀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신 호칭의 기원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연구결과 그러한 호칭은 옛날 아람 사람의 가정에서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임을 찾아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서먹서먹한 거리감, 이질감도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가깝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조금도 거리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 분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면서 우리에게는 아주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대부분 이방신들은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분으로 인해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것을 담기 위한 포기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셋째,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용서는 우리를 옛것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용서는 용서받은 우리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게 하는 용서입니다. 이웃에 대해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하는 용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용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는 용서입니다. 그분의 용서는 새 삶을 만들어 가는 용서입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도망하여 숨어버린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다섯째, 십자가에서 우주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버지는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면서 세상에 있는 자녀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얼굴과 눈을 마주 대해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자상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29~30)

이 말씀은 아주 세심한 아버지의 사랑, 돌보시는 아버지의 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기원, 원천, 목적이 그 분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육신의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 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데 대해, 그 전능의 뜻을 마술적 힘, 분노와 의분의 힘, 강압적이고 파괴적인 힘으로 이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나에게 있는 이러한 고통을 그대로 방관 하십니까? 당신은 너무 무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나쁜 사람들을 왜 한꺼번에 때려 부수지 않으십니까? 전능하신 아버지는 제가 고통스러워 할 때 너무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이해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아버지의 전능은 악한 사람을 때려 부수는 전능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시는 전능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드러낸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고통을 무엇이나 없애 주시는 전능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드리게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치유해 가는 전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의 전능은 우리를 폭력, 증오, 파괴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전능입니다. 폭력, 증오는 전능이 아니라 약함, 비열함, 열등감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그러한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파괴적이며 냉혹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하는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체념, 운명론, 절망으로부터 동터오는 새로운 희망의 아침을 보게 하는 전능이십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타락한 세상을 보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시고, 유지해 가는 전능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한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이해해 갈수록, 조급함, 과격, 흥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내, 소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인도의 '간디'의 비폭력도 그 근원을 캐보면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총, 칼, 폭력 대신에 '비폭력'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윤리관은 전능하신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는 자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전능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에 자신을 위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보기하지 않는 그 근거도 역시 아버지의 전능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짐을 지고 가면서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은 그 분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주일에 말씀드린 양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를 낳은 부모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이를 내다 버리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전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레나 마리아를 인간의 최악의 불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환상, 영웅심에 사로잡혀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에 있어서 진지합니다. 끈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왜,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한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아-멘 합니다. 만약 전능하신 아버지가 히틀러나 변덕스러운 마술사라고 할 때 우리는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의 믿음의 관점을 매 순간 순간 바르게 세워가면, 이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다 진지하게 대면해 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요했을 때,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를 군중들 앞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을"(Ecce homo)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 아버지를 보라." "너희들의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입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분을 보라." 그 전능하신 분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요 19:4)

 

사도 요한은 이 아버지는 사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사랑에 묶여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고 사도는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한계 가운데서 전능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파괴와 분열이 아닌 지속적인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범죄한 인류에게 파멸이 아닌 다시 사는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는 길이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와 깊은 교제를 원하십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를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시 104 : 24 ~ 31 설교자 : 임 영 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오늘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J.M. 로호만(Jan milic Lochman) 교수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총괄하는 하늘과 땅이다. 그래서 세계가 있다. 세계는 전능하신 아버지 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는 혐오스럽고 속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적인 창조, 선한 창조이다. 창조자의 관점에서 창세기의 보고가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듯이,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창 1:31)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다 비신화화 하고, 모든 가치와 상태의 절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신격화 하거나, 그것의 가치나 조건을 절대화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것 자체가 영원하거나 절대적인 것,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창조된 세계는 무질서하게 변덕스럽게 자기들 멋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전체의 시간을 지배하면서, 형성하면서, 목적을 결정하면서, 완성하면서 그 모든 것을 포괄해 가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창조는 그것 자체로서 마지막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습니다.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 깊이 탄식하면서도, 희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최초의 세상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그 한 날이라는 목표로 향해 계속 형성되어가며, 완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그 분에 대한 응답, 그 분의 영광과 승리에 대한 찬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서에서 보여주는 희망은 창조된 세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죄로 이 창조된 세상이 한없이 피폐해지고, 파괴되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노아 시대에 있었던 하나님의 홍수 심판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사람들의 죄가 세상에 가득함과 그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창 6:1-8)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심판 그 자체보다도 그러한 심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넘어서 새로운 창조에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돈의 대지 위에 무지개는 바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두움 가운데서 그러한 하나님의 희망을 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며 그 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다음 우주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다 포괄합니다. 천지라는 말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땅은 실제로 존재하면서 보이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은 천상 세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천상 세계에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에는 철학적인 이념과 신화의 세계, 초자연적인 힘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창조주로서 하나님 고백은 이러한 모든 것들도 역시 피조된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창조에 대해 우리의 눈을 새롭게 열어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는 이 땅 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창조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도 포함합니다. 심지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되고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는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후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 (벧후 3:12-13)

 

이 땅위에 모든 것이 다 녹아 없어져 버릴 때 하나님의 창조는 끝이라고 단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창조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들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고백은 창조에 대한 그러한 제한된 인식에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시키므로, 교회에서 조차 눈에 보이는 어떤 실증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많이 몰려들지 않고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고, 교회 건물이 크게 지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성령의 창조 역사는 반드시 내 교회의 양적 팽창 가운데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교회됨을 더욱 더 포기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창조는 과학기술에 의해 유전공학이 발전하고, 우주선을 발사해서 미지의 은하계를 정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창조개념은 인간의 삶의 상황을 더욱 더 황폐하게 하고 위협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반드시 유물론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차원적인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영역도 포함합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러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미 다 되어진 세상을 돌아보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고백은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과학의 힘에 의해 계속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고 있고, 앞으로도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서 고백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정신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시며, 하나님의 창조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 포괄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다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인간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교리 문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나를 창조한 하나님을, 내게 몸과 영을, 눈․귀와 모든 지체들을, 이성과 모든 감각을 주셨고 보존하신 하나님을, 거기에 의복과 구두를, 음식과 음료수를, 집과 뜰을, 아내와 자녀를, 토지와 소와 그리고 모든 선물들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악에서 지켜주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라는 고백은 인간은 맹목적인 운명에 내던져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늘의 별이나 달, 해가 아닙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생각은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평안과 희망"(렘 29:11)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 전체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실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에 대해 평안과 희망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믿음을 가졌던 예언자들을 이스라엘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언제나 분연히 일어나 자기 백성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이해한 이스라엘의 미래는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들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좌절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바벨론 왕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의 백성을 향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이러한 믿음은 한 공동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도 적용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낯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1-2, 5-6)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은 해와 달, 별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에서는 궁합, 이사, 택일, 토정비결, 점, 굿 같은 것들이 다 의미없는 것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에 대한 문제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문제로서 창조의 목적과 관련됩니다. 로호만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선한 것, 보기 좋은 것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보시기에 좋은 창조는 이미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아버지,

세상 속을 걷노라면

때로 벅찬 감동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기에

어느 곳에 머물든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당신을 그토록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그토록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는 저희이거늘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 저희를 그토록 사랑하게 하십니까?

 

아버지

당신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당신의 힘은 부드러운 연민입니다.

-조 만나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나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나이다. 그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창조물입니다. 이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해 가고 보존되어 갑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 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 창조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나라와 권세는 영원 무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찬양하고, 그분만을 영화롭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혐오스럽고 속이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분의 창조는 선한 창조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그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분의 선한 창조가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혐오스러운 현실을 바라보며 때때로 실망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만물을 보기 좋게 창조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유일하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마 16:13~20 / 히 1:1~3 설교자 : 임 영 수

 

 

오늘 우리는 드디어 사도신경의 중심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오스카 굴만(Oscar Cullman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순위로 볼 때 분명히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성령에 대한 신비의 빛이 드러나게 되고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기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별로 갈등을 느끼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앙의 갈등과 걸림돌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들 시대에서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대목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시인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의 철학적 지성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나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에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는 정교한 조직신학적 체계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서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사도신경에 명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구원은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신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구원은 "육체 밖에서, 세상 밖에서, 인격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제가 지난 날 이해한 구원도 이 세상에서 좋은 일하며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해에서, 금욕적인 삶은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세상, 역사, 인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심신 수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원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와서 잠자는 심령을 깨워 일어나게 해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갖게 합니다. 로흐만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벗어남이 아니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반 종교와 철학에서 이해되고 있는 구원은 역사 안에서가 아니라 역사로부터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이 현실에서 모든 재앙, 실패, 고난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역사 안에서 구원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현실을 멀리 떠나 저 피안의 세계에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현실로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편에서 시인이 경험한 현실은 너무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상황을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한다."(2절)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의 친구들은 시인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거절하고 자기는 "하나님께 피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현실의 고난을 직접 대면해 가면서 투쟁하며 싸워 나가겠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