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부어지는 일곱 대접 1 (계 16:1-3)

nam씨 2024. 9. 28. 14:51

부어지는 일곱 대접 1 (계 16:1-3)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이 시간은 “부어지는 일곱 대접”이라는 제목으로 대접재앙의 본론, 즉 오늘은 첫째 대접과 둘째 대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계시록의 성격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모두 우리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관심 가지고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즉 대환난의 후삼년 반에 일어나는 극한 환난이라, 혹은 대환난 전 신자는 올라가고 유대인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재앙이라, 혹은 알곡 성도를 다 거두어 가신 후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이 받는 재앙이라, 혹은 대환난 시대가 끝날 무렵에 일어날 대 재앙으로 보는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세대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주장으로 본 재앙에 전제되어 있는 복음의 힌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본 대접 재앙은 출애굽 사건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어 단순한 재앙이 아닌 구속사적인 바탕에서 전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앙의 집행이 시종일관 거룩하게 하는 성전의 음성에 의존되고, 성도와 선지자들의 피를 취한 자에 대한 심판 즉 세속에 대한 심판이 암시되어 있고, 구속의 상징인 제단이 확증하고, 여러 곳에서 회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지 않은 자의 복, 즉 거룩의 복을 강조함이라든지, 세속의 상징인 큰 바벨론이 무너짐이 그 좋은 예입니다.


마치 애굽의 열 재앙이 애굽에게는 심판이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악이 심판을 받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대접재앙은 예수님께서 요18:11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이 말씀이 그 힌트입니다. 그러니까 대접은 고난을 가리킨다는 이 진리가 대접재앙 해석의 키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징계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히12:8-10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베드로도 벧전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징계의 사랑이 이토록 귀합니다.


이처럼 대접재앙이란 고난의 연단을 받을 때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자기를 잊고 주를 사랑하며 주를 다 위하지 못한 마음에 몸부림치며 심지어 죽음을 넘어 주와 따로 거하기를 사모하고 그 무엇도 주님 사랑에 방해되지 않는 상태로 발전해 가기를 원하는 것이 대접재앙의 흐름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견딜 수 없어 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첫째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 받은 자와 우상숭배자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나는 장면입니다.


여기 대접은 징계의 고난입니다. 땅은 아직 세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죄인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여기 짐승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666에서 배웠듯 아직도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죄인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의 우상은 육신이 동경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666은 불신자들 뿐 아니라 믿는다면서도 아직까지 세상적으로 살아온 육신의 속한 우리들 속에도 있는 죄의 인격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룩과 세속이라는 두 요소가 아직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납니다. 그러니까 아주 괴로워하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의 사랑을 받으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징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즉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 앞에 이제까지 육신이 원하는 대로 죄의 인격대로 살았음을 슬퍼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것을 뉘우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도 나타나는 초기 현상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를 받는 그런 양심현상과는 다릅니다. 사탄의 참소도 고통스럽지만 참소는 자신을 정죄하는 절망적인 것이지만 이 대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함은 같지만 용서의 하나님 앞에 진실로 가슴 치며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정죄와 회개는 다르단 말입니다. 마치 탕자가 온갖 고난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듯 징계의 고난 앞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고후7:10-11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했습니다.


2. 세상에 속한 마음을 죽이고 성결케 합니다.


3절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둘째 대접재앙은 대접을 바다에 쏟을 때 바다가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는 징계입니다. 문자대로라면 바다에 핵폭탄이 터져서 모든 생물이 죽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 인류도 남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신령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 재앙은 물이 피가 되었던 모세의 이적을 연상시킵니다. “피는 생명”인데 바다가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그 안의 생물도 그 피로 인해 모두 죽었습니다. 그 안에 창1:21의 “큰 물고기” 원문에 ‘탄닌’ 즉 용과 뱀 공룡이 있다면 그것도 죽을 것이고, 다른 종류의 물고기도 죽을 것입니다.


바다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피바다가 되었으니 세상도 죽고, 그 안의 생물도 죽었으니 세상을 품고 살던 우리 마음의 악도 죽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에 탄닌과 같은 죄악의 괴물이 있다 해도 그 죄가 어떤 죄든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한 회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완악하고 마음에 악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앞의 첫째 대접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크게 마음 아파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둘째 대접에서는 이 마음 아파함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는 세상에 속한 마음을 회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도 우리에 대해 죽고 우리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진실로 받아들여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롬8:5-8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죄악에서 떠날 수 있을까요? 성도는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자입니다. 이 거룩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이 복음에 서서 세상적인 죄의 생명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 안에서 주신 내 자화상만 확신해도 죄는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굳게 붙잡아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무디의 젊은 동역자 무어하우스가 미국 시카고 무디의 주일학교에서 요3:16절만 가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며 한없이 은혜에 감동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강하셔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깨닫고 순종만이 현명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평안해지면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마는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은 그 완악한 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종하게 하시고 말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징계의 대접 앞에서 진실로 깨닫고 세상에 속한 우리의 마음 다 걷어 들여 회개하고 죄와 그 습관에서 온전히 돌아와 하나님의 놀라운 화평 속에서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