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성령의 매임을 받아(사도행전 20:17~27절)

nam씨 2024. 9. 21. 18:56

성령의 매임을 받아(사도행전 20:17~27절)

 

오늘 묵상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했던 고별설교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매임을 받아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3년이나 머물렀던 에베소는 특별한 애정이 담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장로들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마 다시 이들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마음이 담긴 훈훈한 장면입니다. 밀레도에 정박한 화물선은 아무래도 화물을 내리고 선적하는 일로 시간이 좀 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하게 된 이면에는 사도 바울이 떠난 후에 데메드리오를 포함한 유대인들이 뭔가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사역했는지 너희가 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떠난 지 벌써 1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에베소에 들르게 되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급해도 에베소의 그 정든 사람들을 그냥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장로들'이라는 말은 각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행 14:23). 뒤에 바울은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라고 표현을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자들'이라고도 지칭된 그들은(28절)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약 5:14; 벧전 5:1~4).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장로와는 좀 다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직분이 확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들은 바울이 떠난 다음에 교회를 섬겼던 교회의 어른들이요 말씀 사역과 행정 사역을 했던 동역자들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그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바울은 고별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안식 후 첫날 떡을 떼려고 모였던 기독교 공동체에 했던 설교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설교는 에베소에 있는 장로님들을 청해서 나누는 바울의 사역 관이며 장로들과 교회를 은혜의 말씀께 위임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그 고별설교 가운데 바울 자신에 관한 이야기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세 부분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사역했는가에 관한 이야기(21절까지)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24절)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세 번째 부분은 위임과 부탁 부분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너희도 아는 바니”에 걸려 있는 바울의 사역 원리 부분입니다.

우선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동역했으며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는지, 어떤 자세로 사역을 감당했었는지 바로 당신들이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뭘 안다는 것입니까? 내가 어떤 자세로 사역을 했는지 다 보아서 안다는 말입니다. 겸손과 눈물,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유익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전한 것들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입니다.

특히 거리낌 없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를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교묘한 말로 피해가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대히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특히 앞에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관되게 전했다는 말입니다. 용기 있게 말씀을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위축되는 일이 없이 말씀을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회 일선에서는 망설여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원리는 이런데 그대로 전하면 상처가 될까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원리가 요동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늘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투명성의 원리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사역자는 삶이 투명하고 생각이 투명해야 합니다. 주님은 3년 동안 제자들과 동거, 동고동락했습니다. 감추고 거리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살아온 삶은 너희도 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내 얼마 남지 않은 목회 여정에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께 부름받을 수만 있다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도 아는 바니의 다른 표현은 투명성의 원리입니다. 사역자로서 사도 바울은 삶과 생각이 투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투명성의 원리에 입각한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아(22~25절)

우선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습니다. 비장함이 묻어나고 있고 꼭 가야 한다는 매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의해서 이 본문은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심령이 순전히 인간적인 집착이라면 사도 바울을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아니고 심령에 매임이 성령의 강권하심이라면 이것은 고집이 아니라 순종이 됩니다.

어쨌든 이 본문에는 꼭 가야 한다는 비장함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왜요?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23절에 의하면 성령께서 이미 각 성에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개인의 집착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매인다는 것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행보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영화가, 무슨 커다란 부와 명예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한 곳을 가는 것에 무슨 집착이 생겼겠습니까? 따라서 이 매임은 자신을 위한 매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매임이었습니다. 돈과 명예 때문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매인 것입니다. 그 매임은 기쁨의 매임입니다. 자발적인 매임입니다. 따라서 이 매임은 구속하고 속박하는 매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하게 하는 매임입니다. 성령께 매임을 입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거부하고 환난과 핍박을 피해갈 길을 모색했더라면 그것은 아마 더 큰 매임을 얻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왜요? 아마 이 고난의 길을 어떻게든 피해서 갔다면 평생 그로 인한 죄책감에 매어 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매였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구절은 바로 24절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랬습니다. 자신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에 매인 사람이라는 분명한 자기 이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매임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에 대한 매임이었습니다. 이 매임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매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매임은 성령에 매임이요, 인간적인 욕망에 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간절한 열망의 매임이었습니다. 그 매임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생명까지도 걸 정도로 간절한 매임이 있었습니다. 이 매임은 사도 바울의 평생을 붙잡고 있었던 매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매임이 사도 바울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열정적인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물어오시는 진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엔가 매여 살게 마련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무엇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이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 실체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에 매이고 사랑에 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여서 오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말씀은 26~27절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내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내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3:17-21절을 살펴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피 값을 찾게 되는 경우가 언제입니까? 말씀을 증거 하지 않아서 죄 가운데 죽게 된 경우 그 피 값을 말씀을 전하지 않은 그에게 찾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20절과 27절에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꺼림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3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 했기 때문에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31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지요. 정직했다는 말입니다. 말씀 앞에 충실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사도는 다시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마치 유언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예루살렘에 기다리고 있는 환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과 만남은 이것이 마지막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 있는 너희에게 나는 최선을 다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령께서 물어오시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끗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된 날, 우리 삶이 어디서나 일관된 삶의 원리로 투염하고 성령에 매여 깨끗한 삶을 사는 복된 날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으로 우리 삶을 주님 앞에 올바르게 세우는 복된 날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