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대접재앙 서론 3 (계 15:2-3)

nam씨 2024. 8. 16. 21:30

대접재앙 서론 3 (계 15:2-3)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 시간은 “대접재앙 서론”이라는 제목으로 ‘십자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중 하나였던 무디 선생에 관한 일화 중에 무디가 그의 동역자 무어하우스를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어하우스는 불과 17세의 청년이었는데 이 청년이 미국 시카고 무디의 주일학교에서 요3:16절만 가지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쳤는지 그 때로부터 무디는 그 어린 청년을 자기 동역자로 삼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제까지 무디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설교를 많이 했지만 무어하우스는 무디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의 독생자 예수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시켰다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매일 같은 주제였는데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깊이 감동을 주어 성숙한 신자로 길러줄 수 있는 귀한 진리의 자양분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주시는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죄악도 세상도 육신도 자신도, 숨어 있는 멸망할 죄악도 다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계속하여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4.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서” 유리 바다는 그만큼 맑게 씻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바다는 성전 앞에 있는 놋바다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구원 받은 무리들을 종합한 그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장 되는 애굽 군대를 보면서 구원의 찬양을 불렀는데 이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견고히 섰었습니다. 즉 거룩함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티도 점도 흠도 없이 거룩하게 씻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눅 7장의 주님을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눅7:47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서 사랑함으로 씻어지는 죄가 있음을 봅니다. 믿음으로만 죄가 씻어지는 줄 알지만 사랑으로도 씻어집니다.

성화적인 은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장성하게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3:3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지만,



고전13:11에 장성하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렇게 됩니다. 미련하고 누추한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5.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 감동으로 늘 성령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여기 거문고는 내 거문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문고입니다. 계 14장에서 거문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지만 거문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 예로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성령이 임하셔서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또 왕하 3장에서는 사막에서 남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갈 때 엘리사를 청해서 거문고를 타며 찬양하자 해질녘에 에돔 쪽에서부터 물이 흘러와서 웅덩이를 채워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문고는 바로 성령의 감동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이런 노래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압도적으로 부여주시는 성령의 감동입니다. 전에는 인간의 감정에 따라 굴곡이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 충만이 항구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 가운데 온전히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6.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온전히 순복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그들은 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에 나타나 있듯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던 구원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모세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언제 하나님의 종이 됩니까? 그것은 호렙산에서였습니다. 출 3장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 호렙산 가시덤불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4-5)

당시 종들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여기 신을 벗는 습관은 룻 4장에서도 보듯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의미로 쓰였듯, 종과 같이 철저한 자기 권리 포기를 말합니다. 그동안 모세는 자칭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했고, 또 애국심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 백성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사랑으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 뜻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역사해 달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부리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종이 된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리시는 대로 충성했습니다. 이것은 40년의 연단의 결실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3~4절 이 짧은 노래 가운데 무려 7회나 주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혹은 주를 암시하는 하나님 왕 오직 등의 용어까지 합하면 10회 가량 나옵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게 된 하나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 모세와 같은 이런 자세가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의 종은 제 7년 안식년이 다가오면 해방이 되는데 그 중에 주인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생 종이 되기를 서약하는 종은 귀를 문설주에다 대고 구멍을 뚫었는데 그 의미는 이제부터는 주인의 말만 듣고 주인의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서약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자는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후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하셨고, 살전5:10에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7.  십자가 사랑에서 은혜를 받으면 구원의 실재를 누리며 삽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이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평행법 문장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에서 불렀던 모세의 노래는 곧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고전5:7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양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면 그들은 십자가 공로로 자기 죄에 대한 용서와 나아가 마음의 죄악을 예수 십자가 아래 다 매장한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를 진정 누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혈과 십자가의 공로를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즉 성화가 무르익은 시점에서 이러한 구원의 노래가 나타나는 것은 홍해 사건은 좁은 의미의 중생의 사건에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성화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의 확신과 실재를 가지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벧전1:7-9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은혜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 고난의 사랑에서 은혜를 깊이 받으십시다. 그 때 우리는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고 늘 감동으로 충만하고 온전히 주를 위해 살며 어린 양 예수의 구원의 실재를 누리며 사는 온전한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